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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수대] 트럼프의 INF 시즌2

중앙일보 2018.10.24 00:17 종합 31면 지면보기
김수정 논설위원

김수정 논설위원

“신뢰하되 검증하라(Trust, but verify).” 로널드 레이건 미 대통령이 1980년대 후반 미하일 고르바초프 옛소련 공산당 서기장과의 핵 군축 협상 때 국민에게 공개적으로 밝힌 원칙이다. 러시아의 격언이다. 트럼프 대통령은 북핵 협상을 두고 "시간 게임을 하지 않겠다”고 했고, 폼페이오 국무장관은 미국 농가의 잠언을 인용해 ‘덮어놓고 사지 않겠다(Don’t buy a pig in a poke)’고 했다. 비슷한 뜻이다.
 
핵폭탄의 위력을 이론적으로만 추정할 수 있었던 1910년대부터 소설 등을 통해 핵무기 반대 움직임은 있었지만, 본격화한 건 1945년 히로시마 핵폭탄 투하 이후다. 물리학자 및 시민들의 활동과 버트런트 러셀·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의 55년 선언 등은 핵 군축과 핵 통제 체제 형성에 힘을 실었다. 쿠바와 핵미사일 위기 한 해 전인 61년 존 F 케네디 대통령도 유엔에서 ‘오인이나 광기에 의해 언제든 끊어질 수 있는 실과 연결된 핵검(nuclear sword of Damocles) 아래 인류가 놓여 있다’고 경고했다.
 
레이건과 고르바초프는 핵 군축 역사에 한 획을 그었다. 제네바에서의 첫 만남 이듬해인 86년 12월 두 사람은 아이슬란드 수도 레이캬비크에서 이틀간 만났다. 70년대 조성된 데탕트가 무너지고 미·소 간 군비경쟁이 극에 달한 시기다. 군축 전문가들을 옆방에 대기시킨 채 통역만 대동했다. 미국의 ‘전략방위구상(SDI)’을 둘러싼 이견으로 합의엔 실패했지만, 1년 뒤 중거리핵전력조약(INF)의 다리를 놓았다. 첫 핵 군축 합의다. 미·소는 사거리 500~5500㎞ 핵미사일을 상호검증 방식으로 폐기하기로 했고, 실천에 옮겼다. 1989년 12월 몰타 냉전 종식 선언, 91년·93년·2010년의 전략무기 감축 조약의 토대가 됐다.
 
트럼프 대통령이 31년 역사를 맞은 INF 탈퇴를 선언했다. 러시아가 수년 동안 순항미사일을 배치하는 등 협정을 위반했다는 게 이유다. 트럼프는 중국의 전략 핵미사일 개발에도 경고장을 날렸다. 트럼프 행정부가 올 초 8년 만에 발표한 핵태세보고서(NPR)의 연장선상이다. 트럼프는 INF 파기와 함께 “핵을 증강하겠다”면서도 “러시아가 정신을 차리고, 중국도 협정에 들어오면 핵을 감축할 것”이라고 했다. 방식은 ‘벼랑끝 전술’이지만, 어쨌거나 목표는 중·러로 확대된 협정 추진이다.
 
‘미국을 다시 위대하게’란 구호로 ‘제2의 레이건’을 꿈꾸는 트럼프가 핵 군축 협상 시즌 2를 구상하고 있다. 30년 전 존재감 없던 중국이 거대한 몸집이 돼 턱하니 서 있다. 과연 레이건의 신화가 이어질 수 있을까.  
 
김수정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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