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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상복 연애소설> 서약서를 종잇조각으로 보시나요?

중앙일보 2018.10.19 08:00
[일러스트 이정권 기자]

[일러스트 이정권 기자]

제4화 

"제가 먼저 물었는데 대답은 않고 도로 물으시네요. 어쨌든 제가 먼저 답하죠. 제게 타고난 실력 같은 건 두 개쯤 됩니다. 하나는 동의하지 않겠지만 외모...ㅎㅎ. 그냥 농담 한번 해봤습니다. 다른 하나는 진짜입니다. 어떤 여자가 내 스타일인지 단박에 알아보는 실력이지요."
 
"그래요, 타고난 실력이란 외모 같은 거죠.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부여받은 것이니까요. 그런 게 많은 사람을 복 받은 사람이라고 하죠."
 
"글재주 같은 건 노력의 결과이지 타고난 재주는 아니라고 믿는 거죠?"
 
"글재주도 타고난 사람이 분명 있지요. 그런데 저는 아닙니다."
 
그녀는 국어 선생님이었던 아버지에게 글을 배웠다고 했다. 자신은 특별한 관심이 없었는데 아버지의 성화에 억지로 배우게 됐다고 했다.
 
"아버지는 아들 둘, 딸 둘을 뒀는데 유독 막내인 나에게만 글을 잘 써야 한다며 독하게 교육시켰어요."
 
적어도 글에 관해서는 사적인 영역에 관한 대화도 조금씩 오가고 있었다.
 
"그건 아버지가 다른 자식들보다도 유독 예뻐했다는 뜻 아닌가요?"
 
"그렇게 볼 수도 있겠죠....."
 
우리의 이메일 대화는 시간이 갈수록 조금씩 자연스러워졌다. 내가 카톡도 문자가 아니냐며 카톡으로 대화의 장을 옮기자고 했지만 거긴 그냥 소통하는 곳이고, 글쓰기에는 적합한 곳이 아니라며 여전히 반대했다. 그러면서 손편지로 쓰라고 하지 않는 걸 다행으로 여기라고 했다. 나는 더 이상 토를 달 수 없었다. 어떻게든 그녀와의 만남을 이어가야 했기에. 더구나 손편지를 쓴다면 나의 악필이 고스란히 드러나 판이 깨질지도 모를 일이었다.
 
요즘 대학생들은 매번 만남을 세고, 100번째와 같이 특별한 날에는 선물을 주고받거나 그들만의 세레모니를 한다고 하지만 우린 역시 그런 나이는 아니었다. 그럼에도 이메일 통신이 한 달째 되던 날, 나는 슬쩍 그녀의 마음을 떠보았다.
 
"오늘이 무슨 날인지 아세요? "
 
당연히 모른다는 반응이었다.
 
"제가 첫 메일을 보낸 지 한 달째 되는 날인데... "
 
"그래서요?"
 
"좀 특별한 자리라도 만들고 싶은데...."
 
그녀는 유치한 놀이를 하려면 유치원이나 가라고 대꾸했다. 외모나 스타일에 비해 그녀는 무척이나 보수적이었다. 달콤한 연애 같은 건 아무래도 그녀의 관심사가 아닌 것 같았다. 소통은 이어지고 있었지만 그녀의 성향과 정체는 여전히 안개 속이었다.


계절의 변화에 편승하다
해마다 한여름이면 며칠째 열대야라는 뉴스가 낡은 축음기 틀듯 나왔다. 그런데 올해는 정말로 뉴스거리로 부족함이 없었다. 기상청은 외우기도 쉽게 111년만의 폭염이라고 했다. 아침 최저 온도가 30도를 넘는 날이 이어졌고, 낮 최고 기온은 마침내 40도를 넘어서기도 했다. 그 위세는 누구도 꺾을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러던 어느 날 저녁, 결이 다른 한 줄기 바람이 불어왔다.
 
"지금 절기가 막 바뀌는 게 제 눈에 보여요. 해마다 가장 고대하는 순간이지요. 계절의 바뀜이 한 해 네 번 있을 테지만 지금 이 시간이 나를 가장 고양시키곤 합니다. 모퉁이를 돌면 다른 색깔, 다른 모양의 공기가 떼 지어 올 것만 같습니다. 이런 계절에 청동기시대 유물 같은 이메일 통신에만 매달려 있기엔 너무 아깝다는 생각이 드네요."
 
답장은 1시간쯤 뒤에 왔다.
 
"청동기인지 철기인지 분명치는 않지만 하여튼 제가 그 언저리 사람인 건 맞는 거 같아요....성장이 그쯤에서 멈춘..."
 
분위기를 잡고 방향을 좀 틀려고 했으나 그녀는 응할 태세가 아니었다.
 
"또 유치원이나 가라는 핀잔을 받아도 좋으니 정식으로 데이트 신청을 합니다. 30대 후반에 마침내 일생을 걸만한 연애에 도전하면서 부모 세대가 즐겼다던 펜팔로만 머물 수 없는 것 아닌가요?"
 
있는 용기를 다 짜내 분명하게 의사를 밝혔다. 계절이 바뀌는 이 시간에 우리의 미팅 포맷도 바꿔볼 참이었다. 사실 변화를 시도할 때가 됐고, 일단 한번 물꼬를 트면 그다음은 판이 바뀔 수도 있을 거라고 계산했다. 
 
밑져봤자 본전이라는 생각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그녀의 답장 첫머리는 이랬다.
 
"이제 좀 친해졌다고 서약서 정도는 한낱 종잇조각으로 치부하자는 건가요?"
 
-아, 역시나...
 
예상에서 벗어나지 않는 그녀였다. 이메일 통신을 시작할 즈음 그녀는 일방적으로 작성한 서약서를 보내왔다. 
1. 이 시간 이후 을의 스토킹은 전면금지다. 들키면 끝장이다. 
2. 상호 간 대화 채널은 이메일뿐이다. 
3. 오프라인 미팅은 없다. 단, 갑이 제안한 경우는 예외로 한다.
 
갑과 을이 누군지는 설명할 필요도 없다. 당시 나는 3항을 보고 상당히 고무됐다. 대면 미팅, 다시 말해 데이트 가능성이 열려 있는 것으로 해석했기 때문이다. 조석으로 부는 바람의 밀도가 달라진 이즈음, 데이트 한번 하자고 제안한 것도 이런 희망적인 근거에서였다. 갑이 제안하는 경우로만 국한했지만 나는 모른 척하고 들이밀었다.
 
그녀의 점잖은 충고는 이어졌다. 
"오프라인 미팅을 제안하기 앞서 서약서를 먼저 언급했어야 하지 않을까요? 서명한 서약서 내용은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이런 제안을 하는 것은...뭐 이렇게요."
 
그녀의 지적은 언제나 내게 변명할 여지를 주지 않았다. 그래도 끄트머리엔 천군만마 같은 한마디가 붙어 있었다. 나의 제안에 응하겠다는 것이었다. 절로 쾌재가 터져 나왔다.
-그래, 사람이라면 최소한 이 정도 융통성은 있어야지. 이 요청도 안 들어줬으면 AI(인공지능)와 연애하는 기분이었을 거야. 
 
첫 데이트 장소를 어디로 정해야 할지 고민이었다. 그녀에게 물어보는 게 좋을 거 같았다. 
"계약 위반에도 불구하고 제 청을 받아줘서 너무 감사합니다. 음식과 식당은 어떤 게 좋겠습니까?"
 
내 글은 어느새 군대에서나 쓴다는 다나 까로 변해 있었다. 절로 웃음이 삐져나왔다. 
-왜 이렇게 됐지?
 
생각해 보니 우리의 소통수단이 말이 아니라 글이라는 점이 그렇게 만들었다. 그리고 그 바탕에는 정통 글쓰기를 종교처럼 떠받드는 그녀가 있었다.


마침내 첫 데이트
얼굴을 마주한 역사적인 첫 데이트는 그녀를 도서관에서 처음 발견한 지 정확히 두 달 되는 9월 16일로 잡았다. 장소는 남자가 정하는 것이라고 해서 내가 정했지만 그녀 마음에 들지 몰라 적이 불안했다. 그녀에 대해서는 여전히 아는 게 없는 상태였다.
 
잠원동에 꽤 괜찮다는 중국식당으로 잡았다. 철기나 청동기시대 운운했던 게 생각나 양식당은 아예 배제했다. 나는 약속시간 40분 전에 도착했다. 방을 달라고 할까 하다 그건 좋은 방법 같지 않았다. 둘만이 있는 공간에서 대화가 끊기기라도 하면 그 어색함을 어찌할 것인가. 홀 구석에 자리를 잡고 핸드폰을 들여다봤다. 거의 100만원이나 하는 기계였지만 그녀와의 소통에서는 무용지물이었다. 순간 나는 그녀가 핸드폰을 아예 사용하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메일만 고집하고 카톡은 극구 거부하고, 사고방식은 또 얼마나 낡았는지....
 
그럼에도 그녀가 곧 내 앞에 나타날 것이라고 생각하니 가슴이 콩닥콩닥 뛰었다.
 
그녀는 약속시간 2분 전에 식당 입구에 들어섰다. 나는 그녀의 차림을 보고 일단 안도했다. 평소도 늘 세련된 차림이었지만 그날은 좀 더 신경 쓴 티가 났기 때문이다. 오늘 만남에 의미를 부여하고 있는 거라고 해석했다. 하긴 나 좋다고 목매는 남자와 처음 마주하는데 아무렇게나 입고 나올 그럴 여자는 없지 않겠는가.
 
"설마 오늘 같은 날까지 글 못 쓴다고 핀잔주려고 오신 건 아니죠?"
 
분위기도 누그러뜨릴 겸 나는 그렇게 말문을 열었다.
 
"그럼 내가 그렇게 꽉 막힌 무슨 사감 선생 같다는 말씀인가요?" 
 
그녀도 제법 재치 있게 받았다. 음식을 주문하려고 물어보자 그녀는 알아서 시켜달라고 했다. 
 
"그리고 마음에 들지 않으면 하나하나 지적하려고요?" 
 
나는 그녀의 입가에 번지는 자연스런 미소를 봤다.
 
"걱정 마세요. 평생 주눅 들어 살아온 사람처럼 왜 그래요?" 
 
"평생요?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최근 몇 달은 분명히 그렇게 살아왔지만" 
 
이 정도면 오늘 데이트가 성공적일 거라고 여겨도 되리라.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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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상복 심상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