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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진국 칼럼] 미스터 션샤인, 료마, 덩샤오핑

중앙일보 2018.10.15 00:03 종합 31면 지면보기
김진국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김진국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1980년 서울의 봄. 대학마다 학도호국단을 해체하고 학생회를 만들고 있었다. 대개 운동권 동아리의 대표들이 모여 후보를 내정해 놓고 회장으로 밀어붙였다. 서울대 정치학과도 대표를 그렇게 선출했다. 3학년 몇 사람이 의논해 적임자를 내정해 놓고 총회를 진행할 각본까지 짰다.
 
단독 후보를 추천한 뒤 재청, 삼청하고 사회자가 의사봉을 두드리려는 순간 한 복학생이 나서서 호통을 쳤다. “정치학을 공부한다는 놈들이 민주적 절차도 지키지 않고, 지들끼리 내정한 후보를 무투표로 밀어붙이느냐.” 얼마 뒤 아크로폴리스광장에서 열정적인 연설로 명성을 얻은 김부겸 행정안전부 장관이다.
 
돌이켜 보면 오만이었다. 독재정권과 싸워온 집단이 옳고, 묵인·방관해 온 집단은 나쁘다. 그러니 대오를 흩뜨리지 않고, 투쟁 목표를 관철하기 위해 단독 후보를 밀어붙이는 게 무슨 잘못이냐고 생각했다. 도덕적 우월감에 절차를 무시하고 뛰어넘으려 한 것이다.
 
문재인 대통령이 11일 ‘절차적 정당성과 민주적 정당성’을 언급했다. 제주 강정마을에서 해군기지 갈등에 대해 “정부가 사업을 진행하면서 주민과 깊이 소통하지 못했기 때문에 일어난 일”이라며 그렇게 말했다. 그러면서 그는 시위대에 대한 정부의 구상권이 철회됐으며, “관련된 사건이 (재판에서) 모두 확정되는 대로 (사면·복권을) 적극적으로 검토하겠다”고 약속했다.
 
문 대통령이 지적하는 절차는 법률 문제뿐 아니라 정서적 과정까지 포함한다. 법적 요건이 구비되더라도 관련 당사자와의 충분한 교감이 더 필요하다는 말이다. 강정 해군기지 건설을 결정할 당시 문 대통령이 대통령 비서실장이었다. 그런 점에서 이날 발언은 자성의 목소리다.
 
김진국칼럼

김진국칼럼

민주주의에서 절대 옳은 것도 그른 것도 없다. 의견이 서로 다를 수 있다. 서로 다른 의견이라도 틀린 것이 아니라고 존중해 주는 절차다. 법적 요건만 갖췄다고 소수 의견을 묵살하며 밀어붙이는 야만적·기계적 다수결이 아니다. 거기에서 필요한 것이 정치력이다. 그러나 이 정부에서도 그런 정치적 타협과 설득의 과정을 찾아보기 어렵다. 법률가적인 단죄와 몰아가기가 대세다. 심지어 법에 정해진 ‘민주적 절차’를 무시할 때도 있지만 도덕적 우월감 때문인지 죄책감조차 없다.
 
당장 이날 문 대통령이 언급한 사면·복권도 적절치 못하다. 절차도 뛰어넘고, 삼권 분립 정신에도 맞지 않다. “대법원이, 사법부가 빠르게 절차를 (진행)해 주면, 종료되는 때에 맞춰서 사면·복권이 이뤄질 것으로 생각한다”(김의겸 청와대 대변인)고 공언하는 마당에 재판이 무슨 의미가 있나. ‘어차피 결론은 사면’이라고 예고해 놓은 사건에 판사가 어떤 심판을 내릴 수 있겠나.
 
사법부 개혁도 청와대가 주도하는 인상을 지우기 힘들다. 대법원장을 대통령이 임명하는 거야 다 하는 일이지만 이렇게 파격적일까. 그 탓만도 아니다. 문 대통령은 “사법농단 의혹이 반드시 규명돼야 한다”며 사법 개혁을 촉구했다. 조국 민정수석은 법원행정처 폐지를 주문했다. 검찰 수사는 불명확한 운영비 사용을 두고도 대상에 따라 ‘비자금’과 ‘과거 관행’ 사이를 오락가락한다. 대법원장은 없고, 청와대만 보인다.
 
국회에서도 일방통행이다. 문 대통령은 “국회도 헌법이 부여한 책무를 다해 주기 바란다”고 훈시했다. 헌법재판관 인사청문보고서 채택, 판문점 선언 국회 비준 등을 가리킨다. 정당마다 생각이 다를 수 있다는 아량, 강정마을에서 보인 설득 노력은 구경하기 어렵다. 의회주의자였던 김영삼·김대중 전 대통령들과는 분명히 다르다. 의회보다는 시민단체에 더 가깝다. 자칫 제도에 대한 경시, 지나친 피아 구분으로 흐르지 않을까 걱정이다.
 
케이블TV 드라마 ‘미스터 션샤인’이 끝났다. 구한말의 슬픈 역사에 대한 관심을 불러일으키고, 반성의 기회를 줬다. 그 드라마에서는 선악이 분명하다. 고애신을 돕는 ‘우리 편’이면 무슨 일을 해도 박수 받는 것일까. 시나리오 평가가 아니다. 우리 대부분의 인식이 사실 그러하다. 일본 개화기 사카모토 료마(坂本龍馬)가 ‘존왕양이(尊王攘夷)’에서 친서양 개방파로 돌아선 일과 비교하게 된다. 구한말에는 그런 고민이 전혀 없는 나쁜 놈뿐이었을까.
 
선악의 이분법에는 고민과 모색, 타협과 협치가 들어설 자리가 없다. 권력의 입맛에 맞춰 움직이는 제도 폭력을 증오한 기억도 그것을 손에 쥐는 순간 잊어버린다. 스스로 혐오하던 전 정권이 서 있던 그 함정으로 걸어 들어가는 것도 모른다. 그런 점에서도 덩샤오핑(鄧小平)의 자제력과 실용적 지혜는 정말 대단하다.
 
김진국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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