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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명 못따르겠다" 고종에 반항한 선비 이남규

중앙일보 2018.10.14 08:00
[더,오래] 김준태의 후반전(18)
1895년 영흥 부사 수당(修堂) 이남규(李南珪, 1855~1907)는 사직하고 고향으로 내려갔다. 당시 왕비가 일본에 의해 비참하게 시해당하는 참변이 일어났는데도 왕은 협박을 이기지 못해 왕비를 폐서인했다. (고종실록 32년 8월 22일) 그러자 이남규가 분개한 것이다. 그는 신하로서 나라를 지키지 못한 자신을 처벌해달라며 다음과 같은 상소를 올렸다.
 
이남규(李南珪, 1855~1907) 영정. 1855년에 태어나 1875년 문과에 급제한 후 홍문관 교리·동학 교수·사헌부 지평·공조참의·안동관찰사 등 여러 관직을 역임하였다. [사진 독립기념관]

이남규(李南珪, 1855~1907) 영정. 1855년에 태어나 1875년 문과에 급제한 후 홍문관 교리·동학 교수·사헌부 지평·공조참의·안동관찰사 등 여러 관직을 역임하였다. [사진 독립기념관]

 
“수치를 잊고 모욕을 참으며 편안하기를 도모하여 구차하게 살아간다면, 시간이 흐를수록 사람들의 마음은 침체되어 진작시키려 해도 소용이 없을 것입니다. …분통함을 삭이고 아픔을 씹고 있는 (고종의) 마음을 모르는 것은 아니나 왕후에게 죄를 돌려 폐서인으로 삼는 것은 도저히 있을 수 없습니다. 이번에 내리신 칙명은 신하 된 자로서 차마 들을 수 없는 것인데 하물며 이를 참고 백성들에게 공포하라는 것입니까?

이제 신이 목숨을 바칠 때인 것 같습니다. 이 조칙을 선포하는 것은 정의가 아니니 의리로 보아 신은 죽어야 마땅합니다. 이 조칙을 선포하지 않는 것 역시 어명을 거스르는 것이니 죄로 보아 죽어야 마땅합니다. 어차피 죽어야 한다면 차라리 명을 어기고 벌을 받아 죽을지언정 정의롭지 못한 일을 하여 의리를 배반해 죽을 수는 없습니다…”


파직하고 어명 어긴 죄 물어달라 간청
상소문의 골자는 임금의 명을 거역하는 것이 큰 죄를 저지르는 일이며 수령으로서 책무를 다하지 않는 것임을 알지만 아무리 어명이라 할지라도 도리에 어긋난 명령은 따를 수 없으니 차라리 파직하고 죄를 물어달라는 것이다. 그리곤 그는 다시는 관직에 나서지 않았다. 왕이 벼슬을 내렸지만 계속 사직하며 향리에 은거했다.
 
하지만 10년이 지나 일본에 의해 강제로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이남규는 분연히 나선다. ‘을사오적’을 처단하라고 주청했을 뿐 아니라, 을사늑약에 반대한 신하들도 꾸짖었다. “그 흉측한 문서를 찢어버리지 못하고 겨우 머리를 숙이고 붓으로 ‘부(否)’자를 써내려가는 것만으로 할 도리를 다했다고 여길 수 있습니까?” 강하게 저항하는 대신이 한 사람도 없었던 상황을 개탄한 것이다.
 
을사늑약 체결서. 이남규는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을사오적을 처단하라고 주청했을 뿐 아니라, 을사늑약에 반대한 신하들도 꾸짖었다. [중앙포토]

을사늑약 체결서. 이남규는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을사오적을 처단하라고 주청했을 뿐 아니라, 을사늑약에 반대한 신하들도 꾸짖었다. [중앙포토]

 
이남규는 “성공할지 실패할지는 생각하지 말고 군신 상하가 합심해 죽음을 각오하고 결전을 벌이자”고 주장했다. 그렇게 의기(義氣)를 지켜야 나라가 망하더라도 다시 일으켜 세울 희망이 있다는 것이다. 이후 이남규는 의병장 민종식을 적극적으로 지원하는 등 충청남도 지역 의병들의 정신적 지주 역할을 했다. 최익현이 의병을 일으키면서 동참을 요청했을 정도다.
 
1907년 헤이그밀사사건을 빌미로 고종을 강제 퇴위시킨 일본은 조선을 병탄하기 위한 사전 조치로서 ‘정미7조약’을 강행, 대한제국의 군대마저 해산시킨다. 그리고 각 지방의 항일 의병들을 무자비하게 진압했다. 이 과정에서 이남규도 제거 대상에 올랐다. 9월 26일 밤 100여 기의 일본군이 그가 은거하고 있던 충남 예산 평원정(平遠亭)에 들이닥쳤다.


은거지에 들이닥친 일본군에 의해 순국
기록에 따르면 일본군이 그를 포박하려 하자 이남규는 준엄하게 꾸짖었다고 한다. “선비를 죽일지언정 욕보일 수 없다.” 당당히 따라나선 그를 두고 일본군은 계속 회유했지만 그는 단호했다. “죽이려면 죽일 것이지 무슨 말이 많은가?” 순간, 수많은 칼날이 그를 향해 쏟아졌다. 아들과 노복이 놀라 막아섰지만, 속절없이 함께 쓰러졌을 따름이다. 훗날 대한민국 건국훈장을 추서 받기도 한 항일애국지사 이남규는 그렇게 순국했다.
 
이남규는 대부분의 신하가 일본의 위세에 눌려 눈치만 보고 임금조차도 아무런 항변을 하지 못한 상황에서 조선의 자존심을 지키고 선비정신이 아직 죽지 않았음을 과시한 것이다.
 
김준태 동양철학자 역사칼럼니스트 akademie@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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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준태 김준태 성균관대학교 한국철학인문문화연구소 선임연구원 필진

[김준태의 후반전] 고전과 역사에서 길을 찾는 탐험가. 이제껏 배운 교훈 중 하나는 사람마다 꽃 피우는 때가 다르다는 것이다. ‘결정적인 순간’은 각기 다른 시간에 찾아온다. 그러니 늦었다고 한탄할 일이 아니다. 여기, 나이에 지지 않고 큰 꿈을 꾸었으며, 세월에 굽히지 않고 열정을 다한 사람들이 있으니. 인생 후반기에 더욱 빛났고 아름다웠던 역사 속 인물들을 소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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