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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전선 앞두고 혼선, 무리한 압록강 진격…날아간 통일 꿈

중앙일보 2018.10.13 0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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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 10월 1일, 6.25전쟁 당시 유일하게 북으로 달려갔던, 하지만 너무나 짧게 막을 내린 아쉬웠던 북진이 시작되었다. 한반도 북부는 마치 모래시계처럼 38선을 넘으면 황해도 돌출부로 인해 전선이 갑자기 넓어졌다가 청천강 하류와 원산 부근을 연결하는 선에 이르러서는 전선이 급속히 좁아지게 되고 그 위로 올라가면 다시 전선이 3배 이상 벌어지는 특이한 구조다.
 
한국 전선으로 향하는 중공군 대열이 압록강을 건너고 있다. 북진하던 국군과 연합군을 막아 전선을 경기도까지 밀고 내려왔던 중공군은 1951년 5월 막대한 병력을 동원해 강원도 인제와 홍천 지역에 대규모 공세를 펼쳤다. [ 중앙포토 ]

한국 전선으로 향하는 중공군 대열이 압록강을 건너고 있다. 북진하던 국군과 연합군을 막아 전선을 경기도까지 밀고 내려왔던 중공군은 1951년 5월 막대한 병력을 동원해 강원도 인제와 홍천 지역에 대규모 공세를 펼쳤다. [ 중앙포토 ]

 
당연히 신중해야 했지만, 맥아더는 상황을 낙관했다. 전쟁을 빨리 끝내기를 원했던 그는 평안도와 함경도가 지리적으로 분리된 점을 고려해 예하 부대를 미 8군과 미 10군단으로 나누어 경쟁을 시켰다. 북진 개시 직전 아군은 미 10군단이 인천에 상륙한 후 서울을 탈환하고 38선 밑까지 진격했고 낙동강 방어선을 지키던 미 8군은 반격을 개시해 수원 부근까지 올라온 상태였다.
 
그런데 맥아더는 미 10군단을 원산에 상륙시켜 함경도를 공략하도록 했다. 대신 평안도는 아직 한강 밑에 있던 미 8군이 담당해야 했다. 부하들은 무리라고 생각했지만 반대할 수 없었다. 직전에 있었던 인천상륙작전이 모두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성공했기 때문이었다. 인천항은 한쪽에서 38선 바로 밑까지 진격했던 미 10군단의 병력과 장비를 다시 배에 싣고 다른 한쪽에서는 미 8군을 지원하기 위한 물자를 하역하느라 북새통이 되었다.  
  
원산 해안가에 접안한 미 해군 LST. 기뢰에 막혀 바다 위에 떠 있는 미 제10군단은 10월 26일에 원산에 상륙했으나 이미 일주일 전에 육상으로 북상한 국군 제1군단이 점령한 후였다. [사진 미 해군]

원산 해안가에 접안한 미 해군 LST. 기뢰에 막혀 바다 위에 떠 있는 미 제10군단은 10월 26일에 원산에 상륙했으나 이미 일주일 전에 육상으로 북상한 국군 제1군단이 점령한 후였다. [사진 미 해군]

 
결국 제때 보급받지 못한 미 8군은 10월 4일에서야 선두의 미 제1기병사단이 38선을 넘을 수 있었다. 이는 도주 중이던 북한군에게 천금 같은 시간이 되었다. 거기에다 서해의 인천으로 나와 동해의 원산으로 향한 미 10군단은 기뢰에 걸려 상륙을 못 하고 보름 가까이나 바다 위에 떠 있어야 했다. 그러는 사이에 동해 축선을 따라 북진하던 국군 1군단이 원산을 먼저 점령해 버리면서 미 10군단의 해상 기동은 무의미하게 막을 내렸다.
  

38선 이북은 황해도지역을 지나는 A-A선에서 넓어졌다가 청천강 부근의 B-B선에 대폭 축소되고 난 후 함경도 북부지역을 포함하는 C-C선에 이르러서는 대폭 확대되는 지형이다. 따라서 신중한 진격 방법을 선택해야 했다. [사진 남도현]

38선 이북은 황해도지역을 지나는 A-A선에서 넓어졌다가 청천강 부근의 B-B선에 대폭 축소되고 난 후 함경도 북부지역을 포함하는 C-C선에 이르러서는 대폭 확대되는 지형이다. 따라서 신중한 진격 방법을 선택해야 했다. [사진 남도현]

  
결론적으로 미 10군단이 38선에서 평양으로 전진하고 후속해서 올라오던 미 8군을 서울에서 분리해 일부는 미 10군단을 따라 평안도로, 일부는 경원 가도를 따라 원산으로 진격시켜 동해축선으로북상 중인 국군 1군단과 합류해 함경도로 북진하는 것이 순리에 맞았다. 10월 초순에 그렇게 아군이 자충수를 두며 지체하는 동안 중공군이 은밀히 압록강을 건넌 전개를 완료했다.  
 
처음 언급처럼 북한에서 폭이 가장 좁은 청천강-원산 이북을 지나면 전선이 3배 이상 넓어진다. 따라서 이곳에 강력한 교두보를 구축한 후 앞으로 나가야 했다. 만일 전세가 바뀌어 이곳에서 물러나면 아군이 다음에 방어선을 구축할 지점은 평택-삼척선 인데 이것은 북한 전체는 물론 서울도 다시 포기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아군은 그대로 한중국경을 향해 다가갔고 갈수록 전선이 넓어지자 부대 간 단절이 발생했다.    
 
1950년 12월 24일 마지막 철수선 베고(Begor)가 출항한 직후 폭파되는 흥남 부두. 공산군이 사용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서였지만 그 이면에 아군이 이곳에 다시 오지 않는다는 의미도 내포되어 있다. 그렇게 북진은 좌절되었다. [사진 미 해군]

1950년 12월 24일 마지막 철수선 베고(Begor)가 출항한 직후 폭파되는 흥남 부두. 공산군이 사용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서였지만 그 이면에 아군이 이곳에 다시 오지 않는다는 의미도 내포되어 있다. 그렇게 북진은 좌절되었다. [사진 미 해군]

  
이렇게 만들어진 거대한 간격은 은밀히 매복하고 있던 중공군에게 훌륭한 침투로를 제공하여 주었다. 갑자기 공세에 나선 중공군은 각각 떨어져 있던 아군 부대들의 배후를 차단하고 격파해 나갔다. 거기에다 생소한 심리전과 산악 우회전은 대단한 효과를 발휘했다. 인해전술 운운하지만 중공군 참전 초기였던 1950년 말까지 양측의 병력은 40여 만으로 대등했다. 더구나 화력은 아군이 유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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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라서 북진 실패는 중공군보다 유엔군의 오판 때문에 발생한 측면이 있다. 결국 12월 24일 마지막 철수선이 흥남부두를 떠나며 통일의 희망은 석 달 만에 꿈으로 끝났고 다시는 돌아오지 않았다. 만일 서울 탈환 후 미 10군을 회군시키지 않고 곧바로 진격시켰다면, 아니면 천혜의 방어선인 청천강-원산에 강력한 교두보를 구축한 후 신중하게 북진했다면 과연 역사는 어떻게 되었을까? 참으로 궁금해지는 가정이 아닐 수 없다.
 
군사칼럼니스트 남도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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