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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CTV 45개, 모니터 0명···그런데도 풍등만 탓하는 경찰

중앙일보 2018.10.10 14:53
지난 5월 대구의 한 풍등 날리기 행사에 사용된 풍등 모습. 고양 저유소 화재와는 무관함. [연합뉴스]

지난 5월 대구의 한 풍등 날리기 행사에 사용된 풍등 모습. 고양 저유소 화재와는 무관함. [연합뉴스]

안녕? 난 '풍등(風燈)'이라고 해. 바람 풍, 등잔 등으로 이뤄진 이름처럼 작은 열기구로 보면 돼.
 
요즘 난 평생 들을 욕을 한꺼번에 먹고 있어. 눈치챘듯이 지난 7일 고양 저유소 화재 사건 원인으로 내가 지목되면서부터지.
 
내 몸은 지름 40㎝, 높이 60㎝에 불과하지만, 저유소에 저장된 휘발유 260만L를 하루 만에 불태워버렸어. 자그마치 시가 40억원어치 기름을 쓸모없는 검은 연기로 만든 셈이지. 그나마 사람이 1명도 안 다친 게 천만다행이야.  
 
내가 의도하지 않았지만, 정말 미안하게 생각해. 화재 전날 초등학교 행사에서 날아온 날 호기심에 불을 붙여 날린 스리랑카 근로자 A씨(27)도 얼마나 놀랐을까. 물론 아무리 실수라고는 하지만, 대한민국을 들썩이게 한 큰불이 났으니 본인이 저지른 잘못만큼 처벌받는 건 당연해. 
 
10일 오후 경기 일산동부경찰서에서 고양 저유소 화재 사건 피의자 A(27·스리랑카)씨가 유치장에서 나오고 있다. 이날 검찰은 A씨에 대한 구속영장을 청구하지 않기로 결정해 A씨는 긴급체포된 지 48시간 만에 풀려났다. [연합뉴스]

10일 오후 경기 일산동부경찰서에서 고양 저유소 화재 사건 피의자 A(27·스리랑카)씨가 유치장에서 나오고 있다. 이날 검찰은 A씨에 대한 구속영장을 청구하지 않기로 결정해 A씨는 긴급체포된 지 48시간 만에 풀려났다. [연합뉴스]

다행히 A씨는 긴급체포된 지 48시간 만인 10일 풀려났어. 경찰이 중실화 혐의로 구속영장을 두 번이나 신청했다가 검찰이 나와 저유소 화재 사이의 인과 관계 소명(설명)이 부족하다며 돌려보낸 덕분이지. 그렇다고 A씨가 피의자 신분까지 벗은 건 아냐. 불구속 상태에서 경찰 조사를 받을 뿐이지. 
 
구속이 불발되면서 체면을 구긴 경찰도 수사 전담팀을 22명으로 늘리며 단단히 벼르고 있다고 하니, 수사 결과는 지켜볼 일이야. 다만 이번 화재의 모든 책임을 나나 무심코 날 하늘로 띄운 외국인 노동자 한 사람에게만 돌리지 않길 바랄 뿐이야.  
 
7일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화전동 대한송유관공사 경인지사 저유소에서 불이 나 소방관들이 진화 작업을 벌이고 있다. [연합뉴스]

7일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화전동 대한송유관공사 경인지사 저유소에서 불이 나 소방관들이 진화 작업을 벌이고 있다. [연합뉴스]

내 눈에는 오히려 '대한송유관공사의 안전불감증과 총체적 관리 부실이 부른 참사'가 이번 화재의 본질로 보이거든. 국가 기간 시설인데도 내가 그날 잔디에 떨어져 불이 옮겨붙어 저유소 탱크가 폭발하기까지 18분간 대한송유관공사 직원 누구도 눈치채지 못한 사실만 봐도 그래. 폐쇄회로TV(CCTV)가 45대나 있는데 모니터 전담 인력이 1명도 없다는 게 말이 돼? 탱크 외부에 화재를 감지하는 장치나 불씨가 탱크에 들어가는 걸 막아줄 장치가 전혀 없던 것도 경찰이 명백히 밝혀야 할 대목이라고 생각해. 
 
그러고 보니 날 모르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다는 사실을 깜빡했네. 그럼 정식으로 날 소개하지. 아마 다들 연말연시 지자체에서 여는 해넘이·해돋이 행사 때 밤하늘을 멋지게 수놓는 내 모습을 한 번쯤은 봤을 거야. 사람들이 소원을 빌며 날 날려 '소원등'이라고도 부르지. 세월호 참사 이후 실종자 가족들이 추석이 돌아오면 실종자 이름이 적힌 날 날리곤 했어. 갑자기 내 역할을 제대로 못 한 것 같아 울컥하네.
 
난 원래 중국에서 처음 만들어졌다는 게 정설이야. 중국 삼국시대 촉한의 정치가인 제갈공명이 전쟁에서 적군에 포위됐는데 바람의 방향을 계산해 날 만들어 날려 위험에서 벗어났다는 기록이 있거든. 중국에서 날 '공명등'이라 부르게 된 배경이지. 제갈공명이 181년에 태어나 234년에 죽었으니, 내 역사는 최소 1784년이 넘는 셈이야.  
 
지난 9일 경기 고양경찰서에서 장종익 형사과장(왼쪽)이 고양 저유소 화재 사건과 관련된 풍등과 동일한 제품을 공개하며 수사 결과를 발표하고 있다. [연합뉴스]

지난 9일 경기 고양경찰서에서 장종익 형사과장(왼쪽)이 고양 저유소 화재 사건과 관련된 풍등과 동일한 제품을 공개하며 수사 결과를 발표하고 있다. [연합뉴스]

어쨌든 그 뒤 중국인들은 종이 풍선에 촛불을 밝혀 하늘로 띄워 보내면서 성공과 복을 기원했다고 해. 한국에서도 날 이용한 이른바 '풍등놀이'가 있었대. 경남에서 동짓날 저녁에 서당 생도들이 이웃 서당 생도들과 날 가지고 싸우던 놀이지. '등싸움' '초롱쌈'이라고도 불렸대. 조선시대에는 날 군사 신호로도 썼다니 아마 이때가 내 전성기가 아니었나 싶어.  
 
요즘엔 보통 알루미늄 뼈대에 한지 같은 얇은 종이를 씌워 고체연료에 불을 붙여 날 날리게 돼 있어. 몸값은 바닥이야. 인터넷에서 1000원도 안 되는 가격에 살 수 있지. 심지어 300원짜리도 있다고.
 
문제는 이번 사건처럼 내가 크고 작은 화재의 원인이 될 수 있다는 거지. 지난해 말 소방기본법이 개정돼 날 날리는 걸 제한할 수 있게 됐지만, 여전히 허점투성이야. 해당 법 12조 1항엔 '소방본부장이나 소방서장은 풍등 등 소형 열기구 날리기를 비롯해 화재 예방상 위험하다고 인정되는 행위를 금지·제한할 수 있다"고 내 이름 두 글자를 똑똑히 적어 놨어. 하지만 소방서장 등이 "여기서 풍등을 날리면 안 된다"고 금지나 제한 명령을 내리고, 이를 따르지 않을 때만 처벌 대상이 된다는 거야. 이마저도 200만원 이하의 벌금을 물리는 게 전부래. 날 단순히 소유하거나 판매한 행위는 아예 막을 법적 근거도 없어. 지금도 온라인 쇼핑몰에서 누구든 날 쉽게 사고팔 수 있는 이유야.      
 
지난 7일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저유소에서 휘발유 저장탱크 폭발로 큰불이 나 소방 당국이 헬기를 동원해 진화 작업을 벌이고 있다. [뉴스1]

지난 7일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저유소에서 휘발유 저장탱크 폭발로 큰불이 나 소방 당국이 헬기를 동원해 진화 작업을 벌이고 있다. [뉴스1]

실제로도 법대로 날 단속한 사례는 아주 드물다고 해. 유우종 군산소방서장은 "소방서장이 화재 예방상 필요하다고 판단하면 풍등 날리는 행위에 대해 제재를 할 수 있지만, (군산소방서 관내에서는) 아직 이것(소방기본법)으로 제재를 가한 적이 없다"고 해. "현실적으로 선의의 목적을 가지고 (풍등 날리기) 행사를 하는데 무작정 막는 건 너무 야박하지 않냐"는 거지.  
 
애초 A씨도 한 초등학교 행사에서 날린 나와 친구들 80여 명 중 땅에 떨어진 날 우연히 주운 것뿐이잖아. 전문가들은 내 몸 안에 장착된 고체연료에 불이 붙으면 일정 시간이 지나야 꺼지기 때문에 "불덩이가 날아다니는 것과 같다"고 경고해. 언제든 하늘을 둥둥 떠다니다 불이 붙기 쉬운 산이나 걸어 다니는 사람 머리 위로 떨어질 위험이 있다는 얘기지.  
 
이제 나를 둘러싼 법의 허점과 현실과 동떨어진 제도를 바로잡고 보완하는 건 너희들 몫이야. 다만 한 가지만 약속해줘. 부디 애먼 날 이번 화재의 희생양으로 삼지 않겠다고…. 설마 교통 사고가 났다고 모든 자동차를 없애자는 사람은 없겠지?
 
고양=김준희 기자 kim.junhee@joongang.co.kr
 
※본 기사는 지난 7일 발생한 고양 저유소 화재에 대한 경찰 수사와 전문가 의견, 한국민족예술사전 등을 바탕으로 화재 원인으로 지목된 풍등 1인칭 시점에서 재구성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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