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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소문 포럼] 소득주도성장·탈원전 정책 … 이름을 바꿔보자

중앙일보 2018.10.10 00:31 종합 27면 지면보기
홍승일 중앙일보디자인 대표

홍승일 중앙일보디자인 대표

한글은 쉬운데 우리말은 어렵다. 중앙일보 연재 ‘우리말 바루기’만 꼬박꼬박 읽어봐도 절감한다. 사투리에서 비롯된 발음과 표기의 괴리, 비슷한 모음, 숱한 예외 탓에 한숨이 절로 날 때가 많다. 외국인은 오죽할까. 근작 『까칠한 우리말』(안남영 저)은 언론계 은퇴 후 인도네시아에서 2년간 한국어 보급 활동을 한 저자가 현지인 피교육생들의 가려움을 긁어준 우리말 교육서다. 웬과 왠, 돼와 되, ‘-데’와 ‘-대’ 구분이 얼마나 까다로운가.
 

한글날 되돌아 본 국가 백년 대계 정명론
탈원전 같은 극단적 이름이 갈등 부추겨

하지만 신경 조금 쓰면 될 쉬운 표현들조차 거듭 틀리는 걸 볼 때면 눈살이 찌푸려진다. 몰랐다면 할 수 없지만, 부주의와 무관심 탓이라면 야단맞아 싸다. 서울 남산 1호터널을 지나치면서 ‘좋은 하루 되세요’(서울시)라는 어설픈 존대 문구를 접할 때마다 되레 좋은 하루를 잡치는 기분이다. 사무실에 들어와 조간신문 펼치면 ‘미망인(未亡人)’이란 민망한 표현이 여전히 부음 광고를 장식한다.
 
예능·음악 방송프로에선 ‘-분’을 달지 않으면 존대로 안 쳐준다. 부인·부군 같은 존칭을 놔두고 아내분·남편분 같은 희한한 조어(造語)가 판을 친다. 커피전문점 직원의 “아메리카노 나오셨습니다”는 짜증스러웠지만 측은지심으로 바뀌는 중이다. 오죽하면 사람 아닌 물건에까지 존대할까. 못된 손님 갑질에 혼비백산했나, 직장의 과잉 고객 응대 서비스 교육에 중독이 된 걸까.
 
차제에 젊은 네티즌들이 애용하는 ‘JMT’ ‘TMI’ 같은 ‘급식체’(축약 신조어)까지 거론할 필요는 없겠다. 10대 청소년의 디지털 문화라는 별도의 사회적 담론이 필요한 영역인데다, 이런 말들에 섣불리 ‘외계어’ 운운했다간 ‘구닥다리 꼰대’ 핀잔을 듣기 일쑤다.
 
국민소통수석과 국민신문고를 신설한 ‘촛불 정권’답게 대민 소통력 제고가 급선무다. 문재인 대통령이 국무회의에서 ‘공공언어의 개선’을 촉구한 것은 다 이유가 있다. 청와대 경내 문화재 침류각의 안내판 문구 중 오량가구·불발기 같은 생경한 전문용어가 도마 위에 오르기도 했다. 불통의 공공용어를 순화하라는 청와대 지시에 부처마다 부랴부랴 개선 방안을 만들어 보고하느라 부산을 떨기도 했다.
 
하지만 한글날마다 법규·행정 용어 순화하겠다고 다짐하는 연례 의식보다 훨씬 시급한 것이 있다. 국가 수십 년 대계에 두고두고 영향을 미칠 중대 정책의 이름부터 순화하는 것이다. 소득주도 성장·탈원전을 능가할만한 것이 없다.
 
소득주도 성장은 경제학 논문에서나 등장할 법한 학술용어가 선거공약화 하면서 국민적 관심사로 떠오른 경우다. 성장이론이라고 하지만 기실 분배이론에 가깝다는 학자(김소영 서울대 교수)가 적잖을 정도로 논란이 많다. 근로자 이외에 600만 영세 자영업자까지 챙기겠다고 임금주도 대신 소득주도 성장이라고 명명한 배려까지는 좋았는데 정작 자영업자 반발을 예상치 못했으니 그 무신경과 무대책은 무언가.
 
탈원전은 정책 명으론 거칠기 짝이 없는 낙제점 슬로건이라는 중론이다. 뇌리에 박히는 선명성 효과는 만점이지만, 표현의 휘발성으로 인한 국론분열 폐해를 이미 단단히 겪고 있다. 원전 비중을 줄이면서 친환경·신재생 비중을 늘려가겠다고 했으면 족했다.
 
“이름을 바로 세우지 않으면 말이 서지 않고, 말이 서지 않으면 만사가 이뤄지지 않는다.” 이름이 사물을 좌우한다는 공자의 정명론(正名論)에 비춰 부적절한 정책브랜드를 손볼 때다. 새 정부 출범 1년 남짓 기간, 이 두 정책으로 인한 혼돈과 국력 낭비는 도를 넘었다. 경제성장과 에너지 문제의 정답은 보수·진보 두 진영 입장의 중간 어디쯤일 것이다. 소득주도가 ‘포용 성장’ 같은 개념으로 변신을 꾀하듯이 탈원전도 ‘에너지 전환’ 같은 대안 명칭을 찾아봤으면 한다. 그릇이 달라지면 내용도 바뀐다. 적어도 탈원전·소득주도 성장 같은 ‘까칠한’ 정책 명을 고집해 갈등을 부추기는 일만큼은 삼갔으면 좋겠다.
 
홍승일 중앙일보디자인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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