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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크스 거부하는 공산국가, 중국의 아이러니

중앙일보 2018.10.06 05:47
제발 우리 동아리 지도교수 맡아주세요.
지난 달 20일 중국 베이징대 학생이 올린 공개 서한이 중국 네티즌 사이에서 큰 화제를 모았습니다. 자신을 베이징대 마르크스학회 대표라고 소개한 이 학생은 학회가 존폐 위기를 맞은 상황이라고 설명했습니다. 학내 공식 동아리로 인정 받기 위해서는 지도교수가 필요한데 이달 들어 모든 교수들이 이 역할을 거부하고 있다는 겁니다.  
 
게시물은 얼마 지나지 않아 삭제됐지만 곧 두 번째 글이 올라왔습니다.  
21일자로 베이징대 청년 공산주의 모임(PKU YCL)이 해체됐습니다. 지도교수를 구하지 못해 학내 공식 동아리의 지위를 상실했기 때문입니다.
 
한 발 더 나가 해당 모임의 임원들은 학교 측의 징계를 받게 됐습니다.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진 걸까요?
 
[출처 셔터스톡]

[출처 셔터스톡]

21일자 파이낸셜타임스에 따르면 학생들은 이 사태의 배경에 중국 정부가 있다고 보고 있습니다. 베이징대 학생들이 노동조합을 만들겠다며 파업에 나선 자스커지 노동자들을 도운 적이 있기 때문입니다. 자스커지(佳士科技, 영어 이름 Jasic Technology)는 중국 남부 광둥(廣東)성 선전에 있는 로봇 제조 기업입니다. 이 회사의 노동자 1만 여명은 최근 3개월째 노사분규를 이어가고 있습니다. 발단은 회사가 야근을 하루 4시간으로 늘린데서 비롯됐습니다. 근무 시간이 길어지며 몇 달 동안 하루도 쉬지 못하는 직원들이 생겨났고 화가 난 이들이 노조 설립을 추진하게 된 겁니다. 사측에선 노조 설립을 주도한 노동자 7명을 해고했고 경찰은 사회 질서를 어지럽혔다는 이유로 이들을 구속했습니다.
 
[출처 셔터스톡]

[출처 셔터스톡]

그러자 베이징대, 칭화대, 런민대를 비롯한 9곳의 중국 대학생들이 노동자들을 지지하는 공개 서한을 발표했습니다. 대부분 좌파 성향의 동아리인 마르크스학회 회원들이었습니다. 중국 대학생들이 노동 문제에 대해 집단 행동에 나선 것은 1989년 톈안먼 사태 이후 처음입니다. 중국 인권 문제를 연구하는 판이(潘毅) 홍콩대 교수는 노동자들의 석방을 촉구하는 연대 서명을 추진했고 전 세계 100명이 넘는 학자들이 여기에 동참한 상황입니다.  
 
공산당이 정권을 잡은 이후로 마르크스주의는 수십년간 중국 모든 대학의 필수 과목이었습니다. 하지만 시진핑 체제에 접어들며 대학들은 이제 마르크스주의가 아닌 '시진핑 사상'을 받아들이라는 압박을 받고 있습니다. 지난해 중국 교육 당국은 초등학교 5~6학년 교과서에 시진핑 사상을 수록하겠다고 밝혔고, 최근에는 초등학교와 중학교 교과서에 외국 관련 내용을 삭제하도록 조치했습니다.  
 
 시진핑 중국 주석이 마르크스 탄생 200주년을 기념해 지난 5월 베이징대학교를 찾았다. 베이징대 마르크스주의 문학관에서 관련 문헌을 보는 모습 [출처 신화통신]

시진핑 중국 주석이 마르크스 탄생 200주년을 기념해 지난 5월 베이징대학교를 찾았다. 베이징대 마르크스주의 문학관에서 관련 문헌을 보는 모습 [출처 신화통신]

시진핑은 지난 5월 마르크스 탄생 200주년을 기념해 베이징대에 방문했습니다. 반제국주의 학생운동인 5ㆍ4 운동 99주년과 베이징 대 창설 120주년 기념일을 이틀 앞둔 날이었습니다. 시진핑은 이 자리에서 "베이징대는 중국에 마르크스주의를 전파하고 연구한 최초의 장소로, 중국 공산당의 설립에 커다란 공헌을 했다"며 "앞으로도 사회주의 후계자를 기르는 근본 임무에 전력하라"고 연설했습니다. 하지만 이 같은 연설이 무색하게도 중국의 마르크스주의는 시진핑 시대에서 가장 큰 위기에 직면했습니다.  
 
사회주의를 앞세운 노동자의 나라에서 마르크스가 핍박받는 상황. 21세기 중국의 모습이 참 아이러니합니다.
 
차이나랩 김경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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