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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先종전선언-영변 폐기·後핵신고" 검증 미루자는 정부 중재안

중앙일보 2018.10.04 18:15
강경화 외교부 장관이 4일 오전 서울 세종대로 외교부 청사에서 최근 한반도 정세 등과 관련한 활동결과를 브리핑하고 있다. [뉴스1]

강경화 외교부 장관이 4일 오전 서울 세종대로 외교부 청사에서 최근 한반도 정세 등과 관련한 활동결과를 브리핑하고 있다. [뉴스1]

정부가 북한의 핵 신고를 보류하고 ‘종전선언-영변 핵시설 폐기’부터 맞교환하는 중재안을 내놨다. 북핵 협상에 속도를 붙이기 위해 최우선 순위에 놓여 있던 북한의 핵 능력 파악을 뒤로 미루자는 변칙적 접근이다.
 
강경화 외교부 장관은 3일(현지시간) 보도된 미 워싱턴포스트(WP) 인터뷰에서 “북한은 영변 핵시설을 영구적으로 폐기하겠다고 시사했으며, 이는 북한 핵 프로그램에서 매우 큰 부분”이라며 “종전선언 같은 미국의 상응 조치에 대한 화답으로 북한이 그렇게(영변 폐기를) 한다면 이는 비핵화로 향하는 매우 큰 진전”이라고 밝혔다. WP는 “강 장관은 처음부터 핵 리스트를 요구하는 것은 검증을 둘러싼 갈등으로 협상의 발목을 잡을 수 있다고 했다”며 “한국은 미국을 향해 ‘북한에 핵무기 보유목록을 요구하는 것을 보류해야 한다(hold off)’고 제안했다”고 전했다.  
 
통상 비핵화는 ‘신고(핵 리스트 제출)-검증-폐기’ 세 단계를 통해 완료된다. 신고가 비핵화의 첫 단계인 이유는 핵 프로그램과 핵무기, 핵물질 등의 정확한 규모와 기술 수준을 파악해야 무엇을 검증하고 폐기할지 파악하는 로드맵을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외교 소식통은 “전체 그림이 나와야 북한이 취할 비핵화 조치에 대한 견적도 나온다. 전체 양을 모르면 핵탄두 10기를 반출했다고 해도 그게 어느 정도 무게감이 있는 조치인지 확인할 길이 없다”고 말했다.  
 
그런데 강 장관이 제시한 중재안은 비핵화 정공법이 아니라 신고에 앞서 ‘종전선언-영변 핵시설 폐기’라는 패키지딜부터 먼저 하자는 뜻이다. 강 장관 스스로도 “우리는 과거와 다른 접근법을 취하길 원한다”며 “언젠가는 핵 리스트를 봐야 하겠지만, 양측이 충분한 신뢰를 쌓을 수 있는 행동과 상응 조치를 주고받았을 때 그 시점에 더 신속하게 도달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핵 신고 시점을 종전선언-영변 폐기 이후로 놓고 있음을 시사하는 대목이다.
 
강 장관은 4일 오전 내신을 상대로 한 기자회견에서도 관련 질문에 “북·미 간에는 70년 동안 쌓인 불신이 있기 때문에 다른 나라들과 달리 신뢰 구축과 함께 비핵화를 만들어 나가야 한다”고 말했다. 또 “미국이 제공할 수 있는 상응 조치를 포괄적으로 고려하면서 로드맵을 만들어야 한다는 융통성 있는 생각이 우리뿐 아니라 미국에도 있다”고 설명했다. 핵 리스트 신고의 시점은 언제가 적절하다고 보느냐고 묻자 강 장관은 “구체적 시점은 마이크 폼페이오 미 국무장관이 북측과 논의한 결과를 지켜보면 좀 더 구체적인 그림이 나올 것이라 생각한다”고 답했다.
 
강 장관은 7일 방북 예정인 폼페이오 장관에게는 이미 이런 중재안을 제안해놓은 상태다. 미국이 정부의 제안에 어떻게 반응했는지는 확인되지 않았다. 미국은 싱가포르 북·미 정상회담 직후부터 일관되게 북한이 취해야 할 비핵화 초기 조치로 핵 리스트 제출을 요구해왔기 때문이다. 강 장관도 기자회견에서 상응 조치와 관련해 “한·미 간에 꼭 생각을 같이 한다는 것은 아니다”라고 했다. 하지만 11월 중간선거 전 가시적 성과로 이어질 수 있다면 미국 역시 이런 중재안에 솔깃할 가능성도 있다.  
 
핵 리스트 신고 검증을 후순위로 돌리자는 정부의 제안은 과거의 북한 비핵화 협상이 검증 단계에서 번번이 틀어졌던 점을 감안한 것이다. 실제 강 장관은 WP에 “과거의 경험을 보면 핵 리스트와 그에 대한 검증은 협상의 많은 부침을 초래한다. 지난번에도 우리가 리스트를 제출받은 뒤 리스트 검증의 구체적인 절차를 논의하다 협상이 깨진 것”이라고 말했다.  
 
강 장관이 언급한 사례는 조지 W 부시 행정부 때였던 2008년 5월 북한이 영변 핵시설의 원자로 가동 및 플루토늄 관련 기록 제출한 일이다. 당시 북한은 1만 8000여쪽을 미국에 넘겨줬다. 하지만 이후 6자회담에서 핵시설 사찰 규모와 핵물질 샘플 채취를 포함한 검증의정서 합의에 실패하면서 6자회담이 중단됐다.
3일 미 국무부 청사에서 기자회견중인 마이크 폼페이오 국무장관. [AP=연합뉴스]

3일 미 국무부 청사에서 기자회견중인 마이크 폼페이오 국무장관. [AP=연합뉴스]

 
하지만 ‘종전선언-영변 폐기-핵 리스트 제출’ 순서의 정부 제안은 결국 비핵화의 핵심인 검증은 뒤로 미루고 북한에 보상부터 해주자는 취지로 인식될 수 있다. 박인휘 이화여대 국제학부 교수는 “폼페이오 장관의 4차 방북이 임박한 시점에서 협상을 잘 굴러가게 하기 위한 윤활유 기능을 할 수 있는 제안을 한 것으로 보이지만, 북한의 현재 핵 능력을 공개하지 않고 종전선언의 문턱을 넘어가는 데 동조하는 것처럼 비치면 곤란할 수 있다”고 말했다.  
 
미 외교전문지 더 디플로맷의 앤킷 판다 선임 에디터는 북한 조선중앙통신이 2일 종전선언과 핵 리스트 제출을 맞교환해야 한다는 워싱턴 조야의 의견에 “황당무계하다”고 한 점을 언급하며 “강 장관의 제안으로 미뤄볼 때 남북 간에는 이미 종전선언-핵 리스트 교환은 하지 않는다는 데 대한 동의가 이뤄진 것 같다”고 했다.    
 
이는 또 북한이 그간 주장해온 단계적·동시적 접근을 수용하는 측면도 있다. 북핵 6자회담 수석대표를 지낸 천영우 한반도미래포럼 이사장은 “영변 핵시설은 노후한 데다 북한이 영변 외에 추가적 농축 시설을 갖고 있는 점을 고려하면, 영변 핵시설 폐기는 북한의 핵무기 생산 속도를 늦추는 정도의 의미가 있을 뿐”이라며 “전체 동결도 아닌 부분 동결을 할테니 그 전에 종전선언을 하자는 뜻인데, 이런 살라미식 접근에 단계별로 보상을 해주기 시작하면 정작 결정적 시점에 쓸 카드가 소진될 수 있다”고 지적했다.
 
영변 핵시설에 대한 검증도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영변 핵시설의 규모는 공개된 것만 해도 건물 최소 약 390개에 이른다. 핵 리스트도 제출받기 전 영변 검증에 장기간이 소요되고 비핵화 협상이 한없이 늘어질 수 있다.  
 
설상가상으로 미국은 비핵화 시간표도 거둬들였다. 폼페이오 장관은 3일(현지시간) 국무부에서 열린 기자회견에서 “2021년은 내가 정한 것이 아니다. 이는 평양 남북 정상회담에서 양측 정상들 간에 이뤄진 언급으로, 나는 그것을 반복한 것”이라고 말했다. 폼페이오 장관은 9·19 평양 공동선언 발표 뒤 ‘2021년까지 달성될 북한의 신속한 비핵화 과정’을 언급했는데, 이것은 남북 간 합의일 뿐 미국이 정한 시한이 아니라고 확인한 것이다.  
 
한 전직 외교관은 “북한과의 비핵화 합의에서 핵심 3대 요소는 신고, 검증, 타임라인이다. 검증을 약속받아도 언제까지 한다는 시한을 박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다”며 “검증은 뒤로 미루고, 타임라인도 얼마나 늘어져도 상관없다는 식으로 접근하면 결국 북한의 시간 끌기에 말려들 우려가 크다”고 말했다.  
 
폼페이오 장관의 방북에 앞서 북한은 우방들과 작전 회의를 준비하는 모양새다. 대미 협상을 전담하는 최선희 북한 외무성 부상은 4일 중국 베이징에 도착했다. 조선중앙통신은 이날 "최선희 동지를 단장으로 하는 조선외무성 대표단이 베이징에서 진행되는 조중(북중)쌍무협상과 모스크바에서 진행되는 조로(북러) 쌍무협상, 조중로(북중러) 3자 협상에 참가하기 위하여 4일 평양을 출발하였다"고 보도했다. 북한 노동신문은 이날 "제재로 불리해질 것은 다름 아닌 (미국) 그들 자신"이라며 "제재는 미국에 대한 우리 불신을 증폭시키는 근본 요인 중 하나"라고 주장했다. 대북제재 해제가 폼페이오 장관의 방북 보따리에 포함돼야 한다고 요구한 것이나 다름없다.
 
일각에선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다음주중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를 방문해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과 북ㆍ러 정상회담을 할 가능성도 제기된다. 청와대 관계자는 이와 관련해 “김 위원장이 러시아를 방문하는지는 알 수 없다”면서도 “그렇다 하더라도 북한이 그동안의 북ㆍ미 비핵화 협상을 거스를만한 행동을 할 것으론 보이지 않는다. 북한의 일상적인 외교활동으로 본다”고 말했다.
 
유지혜·권유진 기자 wisepe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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