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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일기]실화라는 이름의 허구 ‘암수살인’, 희생되는 형사의 삶

중앙일보 2018.10.04 03:00
영화 암수살인 스틸컷. [사진 쇼박스]

영화 암수살인 스틸컷. [사진 쇼박스]

지난 3일 개봉한 영화 ‘암수살인’은 2010년 부산에서 있었던 연쇄 살인범 검거를 모티브로 했다. 예고편 첫 화면부터 ‘실화 스토리’임을 강조한다. 
 

영화 ‘암수살인’ 속 부패 경찰 김치환 형사
실제론 살인범 검거, 여죄 밝힌 일등공신
영화 ‘친구’로 주목받은 뒤 긴급체포 된적도
"극적 재미위해 20여년 형사의 삶 희생돼서야"

영화는 ‘선한 형사’와 ‘악한 형사’를 대비시킨다. 악한 형사는 증거를 조작하고, 선한 형사는 그 조작을 바로 잡고 살인범의 죄를 파헤친다. 선악의 선명한 대비로 영화는 말 그대로 ‘극적인 재미’를 살린다. 
 
그런데 의문이 든다. 이처럼 극단적으로 악하고, 극단적으로 선한 형사가 실존했을까. 부산경찰청과 중부서를 돌며 당시 수사에 참여했던 형사들을 만나 봤다. 놀랍게도 이들은 ‘영화와는 완전히 다른 실화’를 털어놓는다. 극중 부패 경찰로 그려진 인물(실명 김치환 경위)이 실제로는 살인범 검거의 일등 공신이었다. 검거 뿐 아니라 여죄를 밝히고 무기징역을 선고 받게 하는데 핵심 역할을 했다.
 
극중에는 선한 형사(실명 김정수 형사)가 살인범에게 ‘돈을 주고 자백을 사는’ 장면도 여러차례 등장한다. 영화는 미제 사건 해결을 위해 불가피한 행위라는 메시지를 시종일관 던진다. 그러나 실제로 경찰이 범죄자와 돈거래를 하면 직권남용에 부당거래에 해당한다. 돈거래로 취득한 증거와 진술은 재판에서 인정받지 못한다. 돈 거래가 드러나면 범죄는 무죄로 판결 나기 십상이다. 김치환 형사는 “범인으로부터 (돈 거래) 제안이 있었으나 거절했다”고 말한다.
영화 `친구`의 한장면.

영화 `친구`의 한장면.

선한 형사의 실존 인물은 돈거래 여부를 묻는 언론 인터뷰에 일절 응하지 않고 있다. 김치환 형사에게 검거된 살인범이 왜 다른 형사로 담당이 바뀐 후에만 범행을 술술 털어놨는지 궁금증도 풀려야 할 대목이다. 
 
왜곡은 이 뿐 아니다. 영화는 살인범 이씨와 아무 상관없는 미제 사건도 끌어들였다. 피해자 유족이 한때 상영금지 가처분을 내는 등 곤욕을 치렀다.
 
악한 형사로 그려진 김치환 경위가 영화의 재미에 희생된 건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칠성파 두목 검거를 다룬 2001년작 영화 ‘친구’도 김 경위를 모티브로 했다. 유명세를 탄 그는 내부 견제와 음해에 시달렸다고 한다. 2014년엔 칠성파 2대 두목에게 돈을 받고 도피를 도왔다며 긴급체포됐으나 무죄를 선고 받는 시련을 겪었다. 
 
영화 제작에는 적게는 수억, 많게는 수백억이 투입된다. 제작진은 흥행을 위해 과도한 설정과 자극적인 스토리의 유혹에 쉽게 빠진다. 하지만 실화를 바탕으로 한 영화라면 좀 더 신중해야 한다. 실존 인물들의 명예와 불명예가 극중 설정에 따라 손바닥처럼 뒤집혀지기 때문이다.
 
김 경위는 말한다. “주목 받기 위해 일하지 않았는데 열심히 일한 결과 주목 받게 됐다. 그런데 영화가 나오면서 자랑스러운 형사 인생이 한순간에 매도 당하게 생겼다”고. 그러면서 “실화를 바탕으로 각색했다고만 밝혔어도 이렇게 억울하진 않았을 것”이라고.

 
제작진은 제작 과정에서 김치환 경위에게 한번도 연락하지 않았다고 한다. 이렇게 영화가 만들어지는 사이, 기피 업무인 강력사건을 맡아 20여년을 달려온 한 형사의 삶이 나락으로 떨어졌다.
 
부산=이은지 기자 lee.eunji2@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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