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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업 투자 줄고 가계 적금도 깨는데 … 정부만 “경기 회복세”

중앙일보 2018.10.04 00:02 종합 3면 지면보기
현재와 미래의 경기를 가늠할 수 있는 지표들이 1년 넘게 동반 내리막길을 걷고 있다. 추석 연휴 기간 카드 사용액의 감소와 예·적금 중도 해지액 급증, 세계 최고 수준의 가계 빚 증가 속도 등 경기가 불황기로 접어들었다는 정황들도 속속 포착되고 있다. 하지만 정부에는 현실의 다급함이 전달되지 않은 모양새다. 여전히 경기가 꺾였다는 입장을 공식화하지 않고 있는 것은 물론이고 경기 회복세가 계속 이어지고 있다는 주장도 나온다. 현실과 동떨어진 인식이라는 비판을 자초하고 있는 상황이다.
 

선행·동행지수 1년 넘게 동반 하락
가계 부채 증가 속도 세계 3번째
추석 해외 카드 사용 13% 줄어

“정부, 시장과 다른 낙관적 전망
민간 투자 유도하게 정책 바꿔야”

[그래픽=박경민 기자 minn@joongang.co.kr]

[그래픽=박경민 기자 minn@joongang.co.kr]

3일 통계청에 따르면 현재의 실물경기 동향을 보여주는 동행지수 순환변동치와 향후 경기 전망을 나타내는 선행지수 순환변동치가 모두 장기간 내림세다. 동행지수 순환변동치는 지난해 5월 100.7의 고점을 찍은 뒤 하락세로 돌아서 올 8월 98.9까지 떨어졌다. 세계 금융위기 여파가 컸던 2009년 8월(98.8) 이후 최저치다.
 
지난 1년3개월 동안 단 한 번도 오르지 않았을 뿐 아니라 최근 들어 하락세가 더 가팔라졌다. 동행지수 순환변동치는 100 미만이면 경기가 좋지 않다고 해석되는 지표인데 지난해 12월(99.8) 이후 9개월 연속 100을 밑돌고 있다.
 
선행지수 순환변동치의 흐름도 비슷하다. 지난해 7월 101.2로 정점을 찍은 후 하락세로 돌아서 올 8월까지 1년1개월간 반등 없이 내리막길을 걷고 있다. 특히 7월 99.8에서 8월 99.4로 0.4포인트 하락하면서 2016년 2월(0.4포인트 하락) 이후 2년6개월 만에 가장 큰 낙폭을 기록했다. 수출을 제외하면 거의 모든 경기 지표가 좋지 않다. 미래 성장의 발판이 될 투자까지 줄며 향후 경기 전망마저 암울해진 상황이다.
 
시장 지표들도 명확하게 불황의 냄새를 풍긴다. 3일 KB국민카드에 따르면 올해 추석 연휴(지난달 22~26일) 중 고객의 일평균 해외 카드 사용 건수는 3만2742건으로 지난해 추석 연휴 기간의 3만7415건보다 12.5% 줄었다. 일평균 해외 카드 사용 금액 역시 3억4795만원으로 지난해(4억205만원)보다 13.5%나 감소했다.  
 
카드 소비자는 외식과 쇼핑에도 인색했다. 올해 추석 연휴 일반음식점에서의 일평균 카드 결제 건수는 95만5315건으로 지난해 대비 8.9% 줄었다. 반면 상대적으로 저렴한 휴게음식점에서의 사용액은 15%나 늘어났다.
 
[그래픽=박경민 기자 minn@joongang.co.kr]

[그래픽=박경민 기자 minn@joongang.co.kr]

예·적금 중도 해지액도 급증했다. 이태규 바른미래당 의원이 금융감독원으로부터 제출받은 자료에 따르면 지난해 7월부터 올해 6월까지 시중은행에서 개인 고객(개인 사업자 포함)이 중도 해지한 정기 예·적금 건수는 725만4622건, 금액은 52조2472억원이었다. 전년 동기와 비교하면 건수는 31.8%, 금액은 20.8%나 늘어났다. 이 기간에 손해보험사 장기보험상품 해약 건수도 8.2%, 해약 환급금도 25.7% 늘었다.  
 
이 의원은 “예·적금과 보험 해약 건수가 지속 증가하는 것은 서민 가계가 심각한 위기에 봉착해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밝혔다.
 
살림살이가 어려워지면서 빚은 계속 늘어나고 있다. ‘소득주도 성장’이 아닌 ‘빚 주도 불황’이 한국 경제를 위협하고 있는 상황이다. 국제결제은행(BIS)이 지난달 23일(현지시간) 공개한 ‘BIS 분기 보고서(Quarterly Review)’에 따르면 한국은 세계에서 세 번째로 가계 빚이 빨리 늘어난 나라였다. 지난 3월 말 기준 한국 가계부채가 국내총생산(GDP)에서 차지하는 비율은 95.2%로 1년 전(92.9%)보다 2.3%포인트 높아졌다. BIS가 통계를 낸 43개국 중 중국(3.7%포인트), 홍콩(3.5%포인트)에 이은 3위였다. 가계 빚 규모로 따지면 상황은 더 심각하다. 중국과 홍콩의 GDP 대비 가계부채 비율은 49.3%와 71.0%로 한국에 크게 못 미친다. 이 비율로만 보면 한국은 스위스(128.3%), 호주(122.2%) 등에 이은 세계 7위다.
 
[그래픽=박경민 기자 minn@joongang.co.kr]

[그래픽=박경민 기자 minn@joongang.co.kr]

빚이 늘어나는 속도만큼 가계가 부담해야 할 이자와 원금 상환액도 빠르게 증가하고 있다. BIS 통계에 따르면 1분기 한국의 가계 가처분소득에서 부채 원금과 이자 상환액이 차지하는 비율을 뜻하는 총부채원리금상환비율(DSR)은 12.2%로 1년 사이 0.4%포인트 높아졌다. 비교 대상인 17개 선진국 중에서 상승 속도로 1위였다.
 
하지만 정부의 인식은 현실과 많이 동떨어져 있는 모양새다. 김동연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은 2일 국회 경제 분야 대정부질문에서 “내년 예산 증가율이 위기 당시 수준인데 현 경제 상황이 위기라고 생각하느냐”는 김성식 바른미래당 의원의 질문에 “외환위기나 금융위기 당시와 현재 상황은 매우 다르다고 생각한다”고 답했다.  
 
어운선 통계청 산업동향과장도 2일 ‘8월 산업활동동향’을 발표하면서 “경기 하강 국면으로 봐야 하는 것 아니냐”는 기자들의 질문에 “분명 안 좋은 모습이지만 경기 국면을 판단하기 위해서는 국내총생산(GDP) 등 다른 지표도 봐야 한다”며 유보적 입장을 취했다. 심지어 정부의 공식적 경기 판단이 담기는 ‘그린북’(경제동향)은 지난해 12월부터 올 9월까지 10개월 연속으로 ‘회복 흐름’ 또는 ‘회복세’라는 표현을 담았다.
 
전문가들의 생각은 어떨까. 상당수의 전문가가 정부 의견보다는 시장 지표에 더 무게를 두고 있다. 성태윤 연세대 경제학부 교수는 “전체적인 투자 여건을 비롯한 경기 상황이 지속해서 하강하고 있다고 봐야 한다”며 “반도체를 제외한 주력 산업이 부진한 가운데 특히 전·후방 연관 효과가 큰 자동차 산업의 침체가 이어지고 있어 향후 경기가 나아지기 어려운 상황”이라고 말했다.
 
정부가 이제라도 시장 지표와 엇나가는 낙관적 전망을 버리고 경제 정책의 궤도를 틀어야 한다는 지적도 나온다. 표학길 서울대 경제학부 명예교수는 “소득주도 성장 정책이 성장 동력은 떨어뜨리고 오히려 취약 계층에 악영향을 주고 있는데 정부와 여당만 이를 인정하지 않고 있다”며 “민간 투자 유도를 중점에 두는 방향으로 경제 정책의 궤도를 완전히 틀어야 한다”고 말했다.
 
조현숙·이후연·정용환 기자, 세종=하남현 기자 newear@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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