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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소문 포럼] 사법부를 못 믿는 나라는 추락하고 만다

중앙일보 2018.10.01 00:11 종합 27면 지면보기
김원배 사회팀장

김원배 사회팀장

얼마 전 퇴근하는 지하철 안에서 앉을 자리가 보였다. 그런데 두 여성 사이였다. 찰나와도 같은 시간에 여러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자리에 앉으면 몸은 편할 것이다. 하지만 자칫하면 어디라도 스칠 가능성이 있다. 앉을까 말까. 그즈음 논란이 됐던 ‘대전 곰탕집 성추행’ 동영상을 많이 봤던 탓일지도 모르겠다. 지난해 11월 대전의 한 음식점에서 여성의 엉덩이를 만진 혐의로 기소된 남성에게 1심에서 징역 6개월의 실형이 선고됐고 그는 법정구속됐다. 이후 구속된 남성의 부인이 청와대 청원 게시판에 ‘제 남편의 억울함을 풀어주세요’라는 글을 올렸고 31만 명이 동의했다.
 

곰탕집 성추행 실형에 안희정 무죄로 커지는 판결 불만
대법원 재판 거래 의혹, 신속한 ‘제한 수사’로 해소해야

여기에 공감한 사람들이 ‘당신의 가족과 당신의 삶을 지키기 위하여(당당위)’라는 온라인 카페를 만들어 집회도 연다고 한다. 이들이 주장하는 것은 구속된 남성의 무죄가 아니다. 공개된 폐쇄회로(CC)TV 영상에서 명확한 증거가 발견되지 않았는데 상대방 여성의 말만 믿고 유죄, 그것도 실형을 내려야 하느냐에 대한 불만이다. “옷깃만 잘못 스쳐도 감옥 간다”는 말까지 나온다. 이들은 ‘무죄 추정’을 해야 할 법원이 ‘유죄 추정’을 했다고 주장한다. 물론 여성 카페에선 “성추행이 확실하다. 그런 남편을 믿고 청와대에 청원하는 부인이 불쌍하다”는 글도 올라온다.
 
주목할 것은 수사와 재판을 믿지 못하는 사람들이 늘고 있다는 점이다. 나아가 온라인의 목소리를 거리에서 보여주려 한다. 숫자로 보여줘야 더 큰 영향력이 생긴다고 믿기 때문이다. 당당위 운영자 김재준(28)씨는 “실제로 모여서 한목소리를 내지 않으면 (우리 의견이) 사회에 반영이 되질 않는다”고 말했다.
 
홍대 누드모델 몰래카메라 사건으로 촉발된 혜화역 여성 시위도 비슷하다. 이들의 불만은 남성 범인은 제대로 못 잡는 경찰이 여성 피의자는 그렇게 신속하게 붙잡아 처벌하고 얼굴까지 공개했느냐다. 이런 여성들의 불만은 역대 최대 규모의 여성 시위로 이어졌다. 성폭력 혐의를 받는 안희정 전 충남지사의 1심 무죄 판결을 놓고 여성계의 반발이 거셌다. “안희정이 무죄면 사법부는 유죄다”라는 구호까지 등장했다.
 
판사 개인을 겨냥하는 일도 있다. 퇴임 뒤 소액 사건을 담당하는 시골판사로 임용된 박보영 전 대법관을 맞이한 것은 쌍용차 해고노동자들이었다. 이들은 박 전 대법관이 재임 시절 정리해고를 무효로 본 항소심을 파기했다는 이유로 사과를 요구하고 있다. 사람들이 자기주장을 하고 이를 관철하려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모두가 거리로 나온다면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이 돼버린다.
 
이런 사안을 최종 판단하고 사회 결속을 유지하는 것은 사법부의 역할이다. 대한민국 헌법 제103조는 ‘법관은 헌법과 법률에 의하여 그 양심에 따라 독립하여 심판한다’고 규정한다. 재판 결과가 마음에 들지 않을 수 있지만 판사의 의도를 의심하기 시작하면 끝이 없다.
 
현재 사법부는 양승태 전 대법원장 시절의 재판 거래 및 사법행정권 남용 의혹으로 검찰 수사를 받고 있다. 정황 증거로 재판 거래를 의심할 수 있겠지만 해당 법관이 “법과 양심에 따라 판결했다”고 한다면 어떻게 범죄를 입증할 수 있을지 의문이다. 당사자의 양심선언 아니면 궁예의 관심법(觀心法) 밖에 없다. 수사가 최선은 아니었다는 얘기다. 하지만 일단 수사가 시작된 이상, 없던 일로 돌아갈 수도 없다.
 
미국도 브렛 캐버노 연방대법관 후보자의 성폭행 의혹으로 떠들썩하다. 상원 법사위에선 11대 10으로 인준안이 통과됐지만 상원 전체 표결에 앞서 1주일간 미 연방수사국(FBI)이 ‘제한적 범위의 수사’를 하기로 했다. 진실이 규명될지는 미지수지만 공화당 의원들이 나름 출구 전략을 마련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제한적 범위에서 시한을 둔 신속한 수사. 우리도 그런 지혜를 발휘할 수는 없을까. 사법부의 신뢰 회복은 시급한 일이다. 안정되고 신뢰받는 사법 시스템이 마련되지 않으면 지속적인 경제성장과 사회 발전을 기대하기 어렵다.
 
김원배 사회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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