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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영기의 시시각각] 중국의 착한 공산주의자

중앙일보 2018.10.01 00:03 종합 30면 지면보기
전영기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전영기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오늘은 중국 공산당이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을 선포한 지 69주년 되는 날이다. 설날 연휴인 춘절과 함께 이 나라 최대의 국경절 휴가가 이어지고 있다. 거리는 형형색색 중산층의 풍요와 여유를 즐기는 사람들로 넘친다. 베이징에서 충칭을 거쳐 선전에 이르는 지난 1주일 여행길은 역사를 보란 듯이 압축한 중국의 기적 같은 경제 성장을 경험하는 시간이었다. 23년 전 추억이 오버랩됐다. 당시 두 달간 취재 끝에 남겨진 이 땅의 인상은 베이징 시내 공중화장실에서 나오는 악취, 충칭의 창장(長江) 주변 언덕에 산재해 있던 움막집, 중앙이나 지방 정부의 관리들을 만날 때마다 바쳐야 했던 미화 10달러나 100달러짜리 뇌물이었다.
 

부민강국 위해 이념·동맹 다 내려놔
김정은도 ‘덩샤오핑의 길’ 따라가야

가난과 부패에 찌든 중국을 지금의 글로벌 국가로 변모시킨 첫째 요인으로 덩샤오핑의 리더십을 꼽는 데 인색한 역사가는 없을 것이다. 중국 정부는 올해를 건국 69주년보다 ‘개혁·개방 40주년’으로 더 크게 선전하고 있는데 이는 1978년 집권해 나라의 진로를 완전히 뒤바꾼 덩샤오핑의 위대한 선택과 집념을 기리기 위해서다. 덩샤오핑은 영구 미라로 보존된 마오쩌둥 같은 신격화가 싫어 자기 시신을 화장해 달라고 유언한 공산주의 권력사의 특별한 존재다.
 
정치인 덩샤오핑이 평생 추구한 목표는 부민강국(富民强國)-. 모든 인민을 부자가 되게 하고 조국을 남한테 꿀리지 않는 강력한 나라로 만드는 것이었다. 공산체제는 부민강국을 달성하기 위해 필요한 수단일 뿐이었다. 인민의 부유함은 자본주의 시장 체제를 도입함으로써 돌이킬 수 없는 방향으로 진행됐고, 그로 인해 축적된 경제력에 군사력과 과학기술력이 더해져 글로벌 강국의 비전이 실현되고 있다. 여행길에 만난 인민들은 ‘어떻게 이런 번영이 가능했나’라는 질문에 주저 없이 “자본주의 경제의 힘”이라고 답변했다. 자본주의는 중국인이 사랑하는 단어가 되었다. 경제력이 뒷받침되지 않는 민주주의는 껍데기 민주주의다.
 
78년 급진 공산주의자들이 숙청된 뒤 권력을 잡은 덩샤오핑은 “그 어떤 당이나 국가·민족도 마음이 교조적 원리나 미신에 묶여 있다면 진보할 수 없고 생명력을 잃어 결국은 죽어 없어진다”는 말로 개혁·개방의 길을 열었다. 97년 그가 사망할 때까지 “계급투쟁을 계속하라”거나 “혁명을 지속시키자” 같은 구호는 등장하지 않았다.
 
덩샤오핑의 개혁·개방 1호 정책은 농업에서 개인의 토지 이용을 허용하는 것이었다. 2호는 선전을 비롯한 4개 지역에 경제특구를 설치해 외국 자본을 끌어들이고 세금을 면제하는 등 정부의 개입과 규제를 극도로 제한하는 정책. 3호는 교육에 경쟁원리를 도입해 과학기술 실력을 단시일에 끌어올리려는 노력이었다. 이런 정책들이 상호 작용해 수십 년간 연평균 10%대 경제 성장이 폭발했다.
 
국제 관계에서도 덩샤오핑은 카터·레이건·부시 등 미국 대통령을 출신 정당을 가리지 않고 만나 친분을 쌓았다. 당시 유일 강대국이었던 미국을 설득하지 않고는 달러를 벌어들일 방법이 없었기 때문이다. 90년대 초 클린턴 대통령이 정치범 석방, 노동수용소 등 인권 문제를 이유로 중국에 제공하던 관세 특혜를 철회하려 했다. 덩샤오핑은 김정일을 북핵 문제에서 미국에 협조하도록 압박해 클린턴의 환심을 사 난관을 헤쳐 나갔다(벤저민 양, 『덩샤오핑 평전』). 한마디로 부민강국의 목표 앞에 이념·체면·동맹·과거사를 다 부차적으로 여기는 외교술이었다. 중국의 착한 공산주의자는 이렇게 살다 갔다. 현명한 독자들은 벌써 알아챘으리라. 이 글이 김정은을 위해서 씌었다는 것을.  <중국 선전에서>
 
전영기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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