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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땅의 여성을 그렸다, 진짜 나를 만나고 싶었다

중앙일보 2018.10.01 00:02 종합 20면 지면보기
3년 전 채색화를 시작한 윤석남 작가는 이번 개인전에서 자화상 연작을 처음 공개했다. ’우리 옛 여성들의 초상화가 거의 없어 안타깝다. 앞으로 우리 주변의 여성들을 맘껏 그려보고 싶다“고 했다. [사진 학고재]

3년 전 채색화를 시작한 윤석남 작가는 이번 개인전에서 자화상 연작을 처음 공개했다. ’우리 옛 여성들의 초상화가 거의 없어 안타깝다. 앞으로 우리 주변의 여성들을 맘껏 그려보고 싶다“고 했다. [사진 학고재]

마흔 살 되던 해에 붓을 들었다. 1979년, 시어머니와 남편, 딸과 함께 평범한 주부로 살던 때였다. 그리고 작품에 매달려온 40년, 그가 이제 만 여든을 앞두고 있다. 현재 그는 서울 삼청동 학고재 신관에서 개인전을 열고 있고, 오는 11월 해외에서 열릴 새 전시를 준비하고 있다. 이번엔 미국 워싱턴  DC의 스미소니언 뮤지엄 내셔널 포트레이트 갤러리에서 열릴 단체전이다. 세계적인 여성 작가들의 초상화 작품과 함께, 그 중에서도 메인 작품으로 소개되는 자리다. 2016년 영국 테이트 컬렉션이 그의 작품을 사들인 뒤 국제 무대에서 그에 대한 관심이 더욱 커지고 있다. 우리 미술계에서 ‘페미니즘의 대모’로 불려온 윤석남(79) 작가 얘기다.
 

‘페미니즘 대모’ 윤석남 개인전
마흔에 시작한 그림 어느덧 40년
역사 속 이름없는 여성들 불러내
불안한 내면 다룬 자화상 선보여

“파괴된 자연을 끌어안는 게 모성”
다음달 미 스미소니언 전시 참여

이번 개인전 ‘윤석남’도 그에겐 좀 특별하다. 주로 어머니를 주제로 작업해온 그가 자신의 이야기를 담고, 채색화 작품을 처음으로 공개한다는 점에서다. 그림을 그린다는 것은 그에게 어떤 의미일까. 전시장에서 그를 만났다.
 
◆내가 말하는 ‘모성’의 뜻=“이 얘기 꼭 드리고 싶은데요, 많은 분이 ‘모성’의 의미를 소극적으로 받아들이지 않았으면 해요. 모성의 뜻을 편협하게 해석하면 오히려 반(反) 여성적인 의미가 될 수 있거든요. 제가 얘기하고 싶은 모성은 물질문명으로 파괴되고 있는 자연의 힘을 복원하고, 사랑하고, 보듬는 힘을 뜻해요. 모순적인 우주의 삶 자체를 보듬을 수 있는 힘이요.”
윤석남, 자화상(2018, 한지 위에 분채, 142*49cm) [사진 학고재]

윤석남, 자화상(2018, 한지 위에 분채, 142*49cm) [사진 학고재]

 
◆자화상을 그린다는 것=“그동안 저는 제 얘기를 하는 게 어렵고 부담스러워 어머니를 주로 그렸어요. 사실 정말로 해보고 싶은 것은 제 주변의 가까운 친구 등  여성 20여 명의 초상화를 그리는 거예요. 그런데 막상 해보니 남을 그린다는 것은 굉장히 어렵더라고요, 그래서 이번 전시엔 역사 속 인물 이매창 초상화 하나 빼고는 제 자화상만 내놓았어요. 우리나라 전통화 중에 여성 초상화는 거의 없어요. 자신을 그린 여성도 없었고, 여성을 그려준 사람도 없었어요. 저는 그게 좀 억울하더라고요. 초상화는 그냥 초상화가 아니에요. 그 사람의 인생 역정을 표현하는 거죠. 그런 의미에서 언젠가는 제 친구들이 살아온 얘기를 제가 꼭 작품으로 남기고 싶어요.”
 
윤석남, 자화상(2018, 한지 위에 분채, 75*47cm). [사진 학고재]

윤석남, 자화상(2018, 한지 위에 분채, 75*47cm). [사진 학고재]

◆왜 채색화인가?=“이렇게 멋진 채색화를 그동안 어떻게 잊고 살았지? 2015년부터 채색화를 배우기 시작하며 든 생각이에요. 한지에 붓을 써 보니 이 붓만이 표현할 수 있는 선의 아름다움이 있어요. 정말 독특한 한국적 색의 아름다움도 있고요. 채색화의 또 다른 매력은 힘든 삶 가운데에서도 화폭에 꿈을 펼쳐 놓았다는 거예요. 물고기가 새랑 같이 날아다닐 정도로 상상력이 너무 자유로워요. 그런 꿈이 없었으면 우리가 살아남을 수 있었을까요? 저는 그런 생각을 하면서 채색화에 빠졌어요. 저는 오래 살고 싶어요. 이제 시작인 채색화, 더 잘 그려보고 싶어서요.”
 
윤석남 작가의 다섯번째 핑크룸 설치작품. [사진 이은주 기자]

윤석남 작가의 다섯번째 핑크룸 설치작품. [사진 이은주 기자]

◆부수고 싶었던 나의 ‘핑크룸’=“1996년에 설치작품으로 첫 핑크룸을 선보인 이래 이번 작품이 다섯 번째예요. 오십이 넘어 저도 제 얘기해야겠다고 생각하며 시작한 작품이죠. 이게 형광 핑크인데요, 이 색은 아름다운 것을 넘어서 날카롭고 불안해 보입니다. 그림 그리기 전에 저는 너무 불안했고, 사는 의미가 없다고 느꼈어요. 그때 제 모습을 여기에 형상화한 게 핑크룸이에요. 다리에 날카로운 발톱이 달린 핑크 의자, 화려하고 예쁘지만 불안해 보이죠? 그래서 그런지 아무도 앉지 않으려고 합니다(웃음).”
 
◆페미니즘 작가로 불린다는 것=“처음엔 안 하면 죽을 것 같아서 그렸지, ‘여성주의’ ‘페미니즘’ 그런 말은 잘 몰랐어요. 1985년 김인순, 김진숙과 ‘시월 모임’ 동인으로 활동하며 여성 문제를 생각하게 되었죠. 그때 비로소 내가 그토록 불안해하고 힘들어했던 게 좀 더 큰 맥락에서 이해됐어요. 당시 시어머니 모시며 살 때, 줄곧 내 안엔 내가 나를 쳐다보고 있는 느낌이 있었어요. 난 가짜야, 그런 느낌이 있었죠. 진짜 나를 대면하고 싶었어요. 그런데 왜 남편 그림은 안 그리냐고요? 시도한 적은 있는데, 그게 잘 안되더라고요. 하고 싶은 이야기가 따로 있으니까 그런가 보다 합니다(웃음). 하고 싶지 않은 얘기를 가짜로 할 순 없잖아요. 그래서 계속 여성 이야기를 하는 것 같아요. 정말 하고 싶은 이야기는 역사에서 스러져 간 한국 여성들 이야기입니다. 정말 이름 없는 숱한 여성들의 혼을 제 화폭으로 끄집어내고 싶습니다. 그러려면 실력을 더 키워야 할 것 같네요.”
 
1939년 만주에서 태어난 작가는 1954년 아버지를 여의고 홀어머니 밑에서 6남매와 함께 자랐다. 그림을 그리기 시작하며 박두진 시인에게 서예를 배우고, 이종무 화백으로부터 회화 교습을 받았다. 82년 첫 개인전을 연 뒤 지금까지 개인전을 23회 열었다. 정연심 홍익대 예술학과 교수는 “윤석남은 1980년대 여성에 대한 관습적 인식에 저항하며 여성의 시각으로 개인 서사를 통해 여성 이야기를 풀어낸 것”이라고 해석했다. 정 교수는 이어 “윤석남의 여성은 무뚝뚝하며 동시에 친근하다. 그것은 그냥 우리 주변에 있는 여성들에 대한 이야기”라고 말했다. 전시는 14일까지 계속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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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은주 기자 julee@joon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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