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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충격에도 깨진다, 은퇴한 남편은 '유리병'

중앙일보 2018.09.29 09:00
[더,오래] 박영재의 은퇴와 Jobs(29)
방승호(55) 씨는 건설회사에서 30여 년간 근무했다. 플랜트 건설 분야 전문가로 젊어서는 수많은 해외 현장서 일했고, 당연히 임원으로 승진을 기대하고 있었다. 하지만 2년 후배가 승진했고, 건설 경기 악화로 구조조정이 시작되면서 원치 않게 퇴직을 하게 됐다.
 
그동안 방씨에게 회사 일이 삶의 전부였다. 항상 지방과 해외 현장에 있었다. 첫아들이 3살 때 해외 현장에서 돌아왔는데, 너무 오랜만에 본 아빠가 낯설어 엄마 뒤로 숨었을 때의 충격은 말로 표현할 수 없다. 이렇게 헌신했던 회사였는데, 하루아침에 자신을 외면하는 회사의 모습에 엄청난 배신감을 느꼈다.
 
주변 지인들은 방 씨의 경력과 실력이면 어느 회사에 가도 인정받을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차라리 조금이라도 젊어 퇴직하는 것이 잘된 일이라고 위로를 했으며, 본인도 크게 걱정하지 않았다.


구직활동 열심히 했지만 오라는 곳 없어
고용센터에 비치된 구인 광고를 살펴보고 인터넷도 살펴보면서 여기저기 이력서를 제출했지만 결과는 비참했다. 많은 이력서를 제출했지만 연락이 온 곳은 세 곳에 불과했다. 송봉근 기자

고용센터에 비치된 구인 광고를 살펴보고 인터넷도 살펴보면서 여기저기 이력서를 제출했지만 결과는 비참했다. 많은 이력서를 제출했지만 연락이 온 곳은 세 곳에 불과했다. 송봉근 기자

 
집에서 쉬면서 등산도 하고 아내와 여행도 다니면서 마음을 추스르고 있는데, 실업급여 생각이 났다. 고용센터를 방문해 알아보니, 2주에 한 번꼴로 구직활동을 한 증빙을 제출해야 실업급여가 지급된다. 떡 본 김에 제사 지낸다고 이를 계기로 적극적으로 구직활동을 시작했다.
 
고용센터에 비치된 구인 광고를 살펴보고, 인터넷도 살펴보면서 여기저기 이력서를 제출했지만 결과는 비참했다. 그 많은 이력서를 제출했지만 연락이 온 곳은 세 곳에 불과했다. 그중 하나는 방 씨가 전에 있던 회사에 하청업체로 등록하는 역할을 원했다. 자존심이 상했다.
 
그러던 중 전 직장 동료로부터 작은 회사 한 곳을 소개받았다. 너무 규모가 작아 처음엔 망설였다. 그래도 소개해준 동료 입장도 있고 해 마지못해 지원했으나 이곳에서 마저 탈락했다.
 
방 씨는 점점 두려워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화가 났다. 전 직장에 대해 서운한 마음과 더불어 남아있는 동료들이 갑자기 미워지기 시작했다. 정작 실력이 있는 자신은 퇴직하고, 실력없이 아부만 잘하는 동료만 승승장구하는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그러면서 부쩍 작은 일에도 짜증을 내기 시작했다. 30여 년 간의 습관이 무서운 것이 요즘도 새벽이면 눈이 떠지는데, 잠도 안 와 우두커니 앉아 있는 본인의 모습이 또 싫어지는 것이다.
 
아내와의 관계도 소원해지기 시작했다. 아이들은 집에서 자기들 방에 틀어박혀 있어 대화와 소통이 끊긴지 오래다. 자기만 외톨이가 된 모습에 또다시 짜증이 난다.
 
퇴직은 직장이 생활의 전부였던 반퇴세대에게 많은 스트레스를 준다. 평생 하던 일이 없어지면서 내가 쓸모없는 잉여인간이 된 것 같은 생각이 들게 한다. [중앙포토]

퇴직은 직장이 생활의 전부였던 반퇴세대에게 많은 스트레스를 준다. 평생 하던 일이 없어지면서 내가 쓸모없는 잉여인간이 된 것 같은 생각이 들게 한다. [중앙포토]

 
직장이 생활의 전부였던 반퇴세대에게 퇴직은 많은 스트레스를 준다. 평생 하던 일이 없어지면서 내가 사회에서 버림받은 것 같은 느낌이 들고, 쓸모없는 잉여인간이 된 것 같다는 생각도 갖게 된다.
 
많은 은퇴자가 은퇴증후군에 시달리고 있다. 직장이라는 의지처가 없어지면서 나타나는 극도의 상실감으로 인해 갑자기 건강이 나빠지고 질병이 생기는 현상을 말한다. 은퇴 충격으로 우울감과 무기력증, 감정변화는 물론 소화불량이나 두통 등 다양한 증세로 나타난다. 명함도 사라지고 갈 곳도 없어진 소외감과 고립감은 신체적·정신적 건강을 해치기도 하고, 또 이때의 스트레스를 가족들에게 표출하기도 한다.
 
또 ‘번아웃증후군(Burnout Syndrome)’을 겪기도 한다. 이는 의욕적으로 일에 몰두하던 사람이 일이 없어지면서 극도의 신체적· 정신적 피로감을 호소하며 무기력해지는 것을 말한다. 쉽게 짜증을 내고, 기력이 없고, 만성적으로 감기·요통·두통과 같은 질환을 겪기도 한다. 감정의 소진이 심해 우울하다고 표현하기 힘들 정도의 에너지 고갈 상태를 보인다.
 
은퇴한 남편이 있는 부인에게는 ‘은퇴남편증후군(Retired Husband Syndrome)’이 나타나기도 한다. 남편의 은퇴 시기가 다가올수록 아내의 스트레스 강도가 높아져 몸이 아프고 신경이 예민해지는 것이다.
 
가장 극심해지는 시기는 남편이 은퇴한 직후다. 남편이 안방에 앉아 이것저것 참견하면서 잔소리를 하기 시작하면 부인은 스트레스를 받게 되면서 발진, 두통, 우울증을 비롯한 다양한 증세가 나타나는 것을 말한다.
 
이 용어는 일찍부터 고령화가 시작된 일본에서 만들어졌다. 1991년 한 일본인 정신과 의사가 은퇴한 남편을 둔 부인에게서 이러한 현상이 생기는 것을 보고 한 학술지에 은퇴남편증후군(Retired Husband Syndrome)이라고 발표하면서 일반화한 용어이다. 은퇴남편증후군 역시 은퇴 남편의 잔소리와 짜증에서 기인하고 있다.


집에만 있지 말고 밖으로 나와 사람들과 어울려야
서울교통공사 퇴직자가 기관사를 꿈꾸는 청년들에게 기술을 전수하고 있다. 취업난이 극심해지면서 기관사 지망생이 늘어나자 퇴직자들의 강의 기회도 늘어나고 있다. [중앙포토]

서울교통공사 퇴직자가 기관사를 꿈꾸는 청년들에게 기술을 전수하고 있다. 취업난이 극심해지면서 기관사 지망생이 늘어나자 퇴직자들의 강의 기회도 늘어나고 있다. [중앙포토]

 
중장년 반퇴세대가 은퇴증후군이나 번아웃증후군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집 안에만 있을 것이 아니고 밖으로 나와 다른 사람들과 어울려야 한다. 앞의 사례자의 경우 구직활동을 하면서 고용센터나 중장년일자리희망센터 등에서 실시하는 ‘재기 프로그램’, ‘재도약 프로그램’, ‘생애경력설계서비스’ 등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이들 프로그램은 짧게는 6시간 길게는 30시간 동안 교육을 진행한다. 재취업과 관련된 구직시장이해, 이력서 작성방법, 자기소개서 작성방법, 면접법 등을 주로 교육하지만 이 과정에서 변화관리, 화 다스리는 법 등 중장년 퇴직자에게 유용한 다양한 프로그램이 준비되어 있다.
 
전문 강사와 재취업 전문가들로부터 현실적이고 구체적인 도움을 받을 수 있기 때문에 심리적 안정감을 얻는 데 큰 도움이 된다. 또 비슷한 또래의 비슷한 처지에 있는 다른 사람과 교류하면서 자연스럽게 혼자라는 고립감에서 벗어날 수 있고, 또 다양한 현실적인 정보를 얻을 수도 있다.
 
은퇴한 남편이 옆에 있는 부인은 남편의 상태는 지금 얇은 유리병이라는 사실을 명심하자. 남편의 겉모습은 변화가 없겠지만 속마음은 너무나 아프고 여리다. 조금만 충격을 줘도 깨져 버리는 약한 존재임을 알고, 같은 곳을 보면서 진심으로 응원하고 격려하는 노력이 필요하다.
 
박영재 한국은퇴생활연구소 대표 tzang1@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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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영재 박영재 한국은퇴생활연구소 대표 필진

[박영재의 은퇴와 Jobs] 잘나가는 광고인이었다가 IMF때 35세에 강제로 잘려 일찌감치 백수생활을 경험했다. 이른 나이에 험한 꼴을 당한 뒤 월급쟁이에 염증을 느끼고 PC방 창업, 보험설계사 등 자영업 세계를 전전했다. 지금은 저술과 강의를 통해 은퇴의 노하우와 정보를 제공한다. 좋아하는, 평생 할 수 있는 일, 평생 현역으로 사는 방법을 모색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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