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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스터 션샤인’ 애신·유진 마주치던 곳은 현재 새문안로

중앙선데이 2018.09.29 00:30 603호 24면 지면보기
한은화의 A-story
드라마 ‘미스터 션샤인’에서 고애신과 유진 초이가 자주 마주치던 다리 아랫길은 현재의 새문안로다. [사진 CJ E&M]

드라마 ‘미스터 션샤인’에서 고애신과 유진 초이가 자주 마주치던 다리 아랫길은 현재의 새문안로다. [사진 CJ E&M]

tvN 드라마 ‘미스터 션샤인’의 한 장면이다. 일본 유학을 마치고 10년 만에 귀국한 김희성(변요한 분)은 ‘글로리 빈관(호텔)’에 여장을 푼다. 그리고 호텔 프론트에 서 있는 주인장 쿠도 히나(김민정 분)에게 요청한다. “전망이 제일 좋은 방으로 하나 내어주시오.” 방 키를 건네며 쿠도 히나가 답한다. “303호예요. 전망이 매우 좋습니다.”

대한제국 다룬 드라마 속 건축
유진 초이가 머물던 글로리 호텔
3층이지만 당시 최고층은 2층

경운궁인 덕수궁·정동 일대는
고종이 근대국가 시동 걸던 곳

경운궁 중심으로 태평·소공로 내
극 중 구름다리는 황제 행차용

 
이 말, 반은 맞고 반은 틀렸다. 드라마의 주요 배경은 근대 한국의 출발점인 대한제국(1897~1910)이다. 노비였다가 미국인이 된 유진 초이(이병헌 분)가 조선에 다시 돌아온 1902년(광무 6년) 이후 경술국치(1910)까지 이야기가 활발히 전개된다. 그 시절 수도 한성에는 드라마 속 글로리 호텔 같은 양관(洋館)이 속속 지어지고 있었다. 그런데 최고 높이가 2층이었다. 꼬집어 말하자면 김희성의 방은 303호가 아니라, 203호여야 맞다. 덧붙여 기와집과 초가집이 대다수였던 터라 2층에서의 전망은 매우 좋았을 것이다.
 
역사적 사실에 기반을 둔 창작물임을 강조하지만, 드라마 ‘미스터 션샤인’이 그리고 있는 대한제국의 모습은 신선하다. 푸른 눈의 양인과 상투 튼 조선인이 함께 있는 개화기 조선의 모습을 담고 있어서다. 대한제국은 1대 황제인 고종이 꿈꾸던 자주독립 국가이자, 신문물을 받아들여 세계 속으로 나아가고자 했던 근대 국가의 출발점이기도 하다. 하지만 대한제국의 역사는 일제 식민사관의 영향으로, 혹은 망국(亡國) 프레임에 갇혀서 지워지고 잊혀졌다. 『덕수궁』의 저자이자, 근대 건축 전문가인 안창모 경기대 건축대학원 교수와 함께 그 기억을 쫓았다. 대한제국의 황궁이었던 덕수궁(당시 경운궁)과 외교타운이었던 정동 일대를 돌아봤다.
 
 
옛 경운궁은 지금 덕수궁 3배 크기
 
대한제국 시절 새문안로의 모습. 구름다리(운교)는 당시 고종 황제가 경운궁(현 덕수궁)에서 경희궁으로 가기 위해 만들었다. [사진 안창모 교수]

대한제국 시절 새문안로의 모습. 구름다리(운교)는 당시 고종 황제가 경운궁(현 덕수궁)에서 경희궁으로 가기 위해 만들었다. [사진 안창모 교수]

드라마에서 자주 등장하는 구름다리(운교)가 있다. 아래로 전차가 다니던, 고애신(김태리 분)과 유진 초이가 자주 마주치던 곳. 이 길은 오늘날의 ‘새문안로’다. 엽서 이미지로 전해지는 당시 운교의 모습은 드라마 속 다리와 빼닮았다. 안 교수는 “경운궁과 경희궁을 잇는 운교였는데 황제의 행차를 위해 만든 것”이라고 전했다.
 
경희궁 앞에 서서 새문안로 너머 정동을 바라보며 황제의 행차를 되짚어 보자. 고종은 왜, 어떻게 경운궁에서 경희궁을 잇는 운교까지 왔을까. 그 경로에는 아관파천으로 알려진 ‘고종의 길’이 있다. 10월 정식 개방하는 고종의 길은 지금껏 고종이 러시아 공사관으로 숨기 위한 비밀 통로처럼 알려졌다. 하지만 최근 학계에서 이 길을 새롭게 조명하고 있다. 대한제국 시절 주한 미국공사였던 알렌(1858~1932)이 그린 지도를 보면 당시 미국 공사관 뒤로 쭉 나 있는 이 길에는 ‘왕의 길(King’s Road)’라고 적혀 있다. 안 교수의 설명을 들어보자.
 
“경운궁이 좁아 외국 손님을 맞이할 때 필요한 관병식(군대의 위용을 보여주는 행사)을 할 수 없었다. 그래서 고종은 관병식 장소로 경희궁을 쓸 계획이었고, 내부적으로 움직일 수 있는 길을 냈다. 이 길이 아관파천의 부정적인 이미지와 맞물려 수치스런 비밀 통로처럼 알려졌지만, 사실이 아니다. 복원한 고종의 길은 러시아 공사관에서 끝날 게 아니라 경희궁까지 연결해야 완성됐다고 볼 수 있다.”
 
운교가 알려주는 또 다른 한 가지는 경운궁의 크기다. 경운궁은 시내 한복판에 있는 도심 궁궐이다. 원래 월산대군의 집이었으나, 임진왜란으로 경복궁·창덕궁·창경궁이 불타자 선조가 이 집을 행궁으로 삼으면서 경운궁이 됐다. 그러다가 아관파천 후 고종이 경운궁을 황궁으로 삼으면서 재정비되기 시작했다. 경운궁의 역사는 증축과 재건의 역사다. 서쪽으로 정동, 북쪽으로 옛 경기여고 터, 남쪽으로 서울시의회 별관까지 궁역은 구불구불 뻗어나간다. 도심 속에서 주변 상황을 살피며 교류하며 확장했다는 점에서 기존 고궁과 성격이 다르다. 안 교수는 “경운궁은 지금의 3배 크기였다”며 “대한제국 정부는 궁역의 확대를 위해 정동 일대 가옥에 전매를 금지하기도 했다”고 설명했다. 이런 와중에 지금의 구부러진 ‘덕수궁 돌담길’이 탄생했다. 경운궁을 넓혀가는 중에 정부는 남쪽에 있던 독일 공사관 부지(서울시의회 별관)를 매입했다. 경운궁으로 합칠 계획이었으나, 정동에 있는 각국 공사관들의 요청으로 길을 남겨두게 된다. 대신 경운궁의 내부를 좀 더 넓히면서 궁의 담장이 불룩하게 나오게 됐다.
 
정동은 1883년 미국 공사관이 들어서면서 외교타운으로 첫발을 내딛는다. 이어서 독일·영국·러시아·프랑스 공사관 등이 속속 자리 잡는다. 원래 정동 일대는 기와집이 즐비했다. 각국의 공사관들은 한옥에 터를 잡았다가, 미국 공사관을 제외하고 모두 양관을 짓는다. 드라마 속 미국 공사관으로 나오는 한옥은 지금도 미국 대사관저 안에 있다. ‘ㄱ자’ 한옥으로, 서울에 세워진 최초의 외국공사관 건물이라는 가치를 인정받아 시도유형문화재 132호로 지정됐다. 외국 재산의 건축물이 한국의 문화재로 지정된 유일한 사례다. 현재 한미역사사료관으로 쓰고 있고, 미국 대사관저로는 그 뒤편에 건축가 조자용씨가 1976년 지은 한옥(하비브 하우스)을 사용하고 있다.
 
 
글로리 호텔의 모델이 된 손탁 호텔
 
드라마 속 글로리 호텔의 모델이 된 손탁 호텔. 글로리 호텔은 3층 건물로 묘사되지만 대한제국 시절 건물의 최고 높이는 2층이었다. [사진 안창모 교수]

드라마 속 글로리 호텔의 모델이 된 손탁 호텔. 글로리 호텔은 3층 건물로 묘사되지만 대한제국 시절 건물의 최고 높이는 2층이었다. [사진 안창모 교수]

드라마 속 글로리 호텔과 가장 유사한 곳은 정동에 있는 손탁 호텔이었다. 지금의 이화여고 100주년 기념관 자리가 호텔 터였다. 외교타운의 한복판에서 손탁 호텔은 대한제국의 영빈관으로 쓰였다. 프랑스 태생의 독일인 앙투아네트 손탁이 운영했는데 대한제국 정부의 지원을 받아 건축했다. 한국어를 비롯한 외국어 능통자였던 손탁은 고종 황제의 신임을 받고 밀사로 활약하기도 했다. 국적만 다를 뿐 드라마 속 쿠도 히나와 비슷하다. 안 교수는 “고종의 즉위 40주년을 맞은 1902년 해외 귀빈들을 초청해 국제 행사를 크게 하려 했고, 이를 위한 호텔로 계획됐지만 당시 콜레라가 돌면서 행사가 미뤄지고 축소되고 말았다”며 “이후 손탁에게 소유권이 넘어갔는데 그 과정이 명확히 밝혀지지 않았다”고 덧붙였다.
 
드라마에서 유진 초이와 김희성이 호텔 테라스에서 만나고 있다. [사진 CJ E&M]

드라마에서 유진 초이와 김희성이 호텔 테라스에서 만나고 있다. [사진 CJ E&M]

외국 공사관을 제외하고, 대한제국 시절 지어진 양옥은 신문물을 받아들여 근대국가를 건설하려던 고종 황제의 의지의 산물이었다. 10년에 걸쳐 공사한 경운궁 석조전도 마찬가지다. 황제는 경운궁을 중심으로 가로 정비 사업에도 나서 오늘날의 태평로·소공로·을지로 등을 내기도 했다. 일종의 방사형 도로 계획이었다. 서울시청 광장이 오늘날 교통의 요지가 된 까닭이다.
 
하지만 고종이 일본의 압력으로 황위를 순종에게 강제 이양한 뒤, 경운궁의 이름은 오늘날의 덕수궁으로 바뀌었다. 덕수(德壽), 태황제가 된 고종의 장수를 기원한다는 이름만 남았고, 고종이 경운궁을 토대로 계획했던 근대 도시의 꿈은 잊혀지고 말았다. 만약 고종 황제가 꿈꿨던 근대 도시가 현대로 이어졌다면 어땠을까. 안 교수는 “대한제국의 이야기를 일제의 식민사관으로 답습할 게 아니라, 학자들이 제대로 연구해 그 의미를 평가하고 교훈으로 남겨야 한다”고 강조했다.
 
한은화 기자 onhwa@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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