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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시평] 트럼프가 남북 제동 건다면 문 대통령의 선택은

중앙선데이 2018.09.29 00:30 603호 35면 지면보기
존 에버라드 전 평양 주재 영국대사

존 에버라드 전 평양 주재 영국대사

평양 남북 정상회담은 장관(壯觀)이었다. 그걸 통해 실제 성취한 게 있다면 무엇일까.
 

화려한 평양 회담으로 김정은도
상당한 정치자본 투입, 결과 내야
부패 등 경제 환경에 제재란 암초
남북 진전보다 한참 늦은 비핵화
미, 남북관계 압박 수단 삼을 수도

우선 남북 정상회담이 남북 프로세스에 심리적 추동력을 불어넣었다는 점이다. 백두산 방문, 남한 대통령의 북한 주민들을 상대로 한 첫 연설, 두 정상의 힘찬 포옹 등의 상징은 강렬했다.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의 서울 답방은 강력한 모멘텀이 될 것이다.
 
더불어 구체적이고 자세한 합의가 없다곤 하나 적어도 한 가지 합의 문서는 중요하다. 바로 군사 분야다. 일촉즉발의 긴장감이 감도는 군사분계선(DMZ)에서의 사고 가능성을 줄여주긴 할 것이다. 이는 신뢰 구축 조치론 요긴하다.
 
마지막으로 두 지도자가 공개적으로 약속했다는 점이다. 문재인 대통령이 남북 관계 개선에 얼마나 많은 정치적 자본을 투입했는지, 이게 잘못될 경우 그가 얼마나 타격을 입을지 독자들은 잘 알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김 위원장도 상당한 ‘자본’을 투입했다. 북한 주민들이 거의 생중계로 지켜보는 가운데 문 대통령을 안았고 높임말을 사용했다. ‘미제의 주구’가 아닌 국가원수로 인정했다는 의미다. 앞서 싱가포르에선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정상회담을 했다. 김 위원장이 북한 주민들에게 나은 삶을 위한 변화가 진행 중이란 신호를 보내고 있는 것이다. 이제 그로선 결과를 내놓아야 한다. 이유야 다르지만 문 대통령만큼이나 그도 경제 관계 진척을 간절히 바란다고 볼 수 있다.
 
그러므로 약간의 진전이 있다고 말할 수는 있겠다. 그러나 두 정상이 딱히 설명하지 않은 암초들이 산재해있다.
 
첫 번째 암초는 경제협력 사업을 이행하는 데 어려움이다. 극히 소수의 외국 기업인만 북한에서 성공했다. 환경은 매우 나쁘다(toxic). 만연한 부패, 신뢰할 수 없는 법률 체계, ‘모든 외국인은 부자이며 멍청하다’는 다수 북한 관료들의 자세까지. 한 외국 기업인은 북한의 파트너에게 선물·식사 대접을 하느라 막대한 돈을 쓴 후 계약을 하러 방북했더니 딴 사람들이 나와 자신들이 인허가권자라고 말하더라고 토로했다. 다시 물량공세를 해야 한다는 뜻이었다. 또 다른 기업인은 북한에 공장을 지었는데 비자를 받지 못해 결국 공장이 북한에 넘어갔다고 했다. 농업 생산을 돕던 기업의 경우 수확 직전 북한군이 문제의 땅에서 훈련을 하겠다고 해서 훈련이 끝난 후 가봤더니 농작물이 모두 사라졌다고 전했다. 남한 기업인들은 다를까. 의심스럽다.
 
둘째는 제재다. 민간 기업들이 결정할 사업은 물론이고 이미 합의한 광범위한 경제 협력을 이행하기도 지난할 것이다. 제재를 관장하는 유엔 관련 위원회(1718 위원회)에 제재 면제를 요구할 순 있으나 받아들여질지 미지수다. 위원회의 일원인 미국이 비판적으로 들여다볼 것이다.
 
셋째는 북·미 간 한반도 비핵화 프로세스 문제다. 김 위원장은 TV를 통해 “조선반도를 핵무기도 핵 위협도 없는 평화의 땅으로 만들기 위해 적극 노력해 나가기로 확약했다”고 말했다. 공개적으로 비핵화를 언급한 건 환영할만하나 문구가 문제다. 미국의 핵우산 철폐도 의미한다는 북한의 오랜 입장을 반영한 것으로 보여서다. 미국의 비핵화와는 분명한 거리가 있다. 문 대통령이 이런 문구에 서명한 건 미국을 돕기보단 복잡하게 할 가능성이 있다. 김 위원장의 의도는 여전히 불투명하다. 핵실험장의 입구를 부수고 미사일 시험장을 폐기하고 영변 핵시설을 해체할 수 있다는 의사를 밝힌 건 환영할 만하나 본질과는 한참 먼 조치다. 비축해놓은 핵무기와 이동 발사가 가능한 미사일 말이다. 비핵화 진전은 남북 관계 진전에 필적하지 못한다.
 
어쩌면 이로 인해 남북 관계와 북·미 대화 사이에 이종(異種)의 연계가 있을 수 있다. 트럼프 대통령 등이 말하는 ‘최대 압박’을 위해선 제재에 중국이 참여해야 하고 러시아가 방해하지 말아야 하는데 둘 다 여의치 않다. 그렇다면 남은 건 군사력인데 대단히 어려운 선택지다. 그러나 남북 관계 진전으로 트럼프 대통령에겐 새로운 수단이 주어지고 있다. 진정한 비핵화 없이는 더이상 남북 관계 개선을 진척시킬 수 없다고 주장하며 ‘몸값’ 지불을 요구하는 것이다. 북한은 이미 이 가능성을 눈치챈 듯하다. 대외선전 사이트인 ‘아리랑 메아리’를 통해 “최근 미국이 좋게 발전하고 있는 북남 관계 개선 분위기에 제동을 걸어보기 위해 음으로 양으로 책동하고 있다”고 주장한 바 있다.
 
그렇다면 다음엔 어떤 일이 벌어질까. 1차 북·미 정상회담에선 첫 회담이란 막대한 상징성으로 실체의 빈곤을 가렸었다. 2차 회담에선 가능하지 않다. 트럼프 대통령은 공언했던 대로 ‘엄청난 진전(tremendous progress)’을 보여줘야 한다. 이는 김 위원장이 정상회담에서 또는 회담 전에라도 그럴듯한 선언을 해야 한다는 뜻이다. 얼마나 많은 핵무기가 있는지, 어디에 있는지 등에 대해서 말이다. 그걸 안 하면 김 위원장이 핵무기를 내놓을 의도가 없다는 강한 증거가 될 것이다. 트럼프 대통령도 이런 견해를 갖게 된다면 북·미 외교 프로세스는 끝장날 것이다.
 
아마 그쯤 되면 미국이 판문점 또는 평양선언의 적어도 경제 부분은 중지하라고 요구할 것 같다. 북한으로선 남북 프로세스에 대한 흥미를 잃을만한 일이다. 이게 문 대통령으로 하여금 그와 미국과의 관계, 또는 그와 북한과의 관계 사이에서 선택하도록 강요할 수 있다. 나는 그가 어느 쪽을 택할지 궁금하다.
 
존 에버라드 전 평양 주재 영국 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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