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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왕’왕치산 "트럼프를 잘 몰랐다"

중앙일보 2018.09.29 00:01

그가 다시 돌아왔는가?

왕치산(王岐山) 중국 국가부주석 얘기입니다. 그는 미ㆍ중 무역전쟁의 와중에서도 전선 전면에 나서지 않았습니다. 
 

무역전쟁 전엔 '줄 잘 서라'며 심드렁
中 열세 확연해지자 트럼프 오판 인정

그가 전쟁터로 돌아오는 날 중국은 어떤 형태로든 미국과 전면적 해결을 모색할 것이라는 추측이 나돌곤 했지요. 그것이 전면전이든, 휴전이든, 아니면 유격전이든 말입니다. 
[사진 셔터스톡]

[사진 셔터스톡]

추석 연휴 직전이었죠.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2018년 9월 17일 2000억달러 규모의 중국산 제품 5745개 제품에 대한 10% 추가 관세 부과를 결정했는데요. 이 결정 바로 전 월스트리트의 사장단이 참석한 미ㆍ중 금융원탁회의가 열렸습니다. 무역전쟁의 출구전략을 모색하는 자리였습니다. 
그 자리에 왕치산이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왕 부주석과 이강 인민은행장이 중국 측 대표로 나왔고 미국 측에선 크리스 존슨 등 미국 중앙정보국(CIA)의 중국 분석가 같은 전문가 그룹을 비롯해 골드만삭스ㆍ블랙스톤 등 월스트리트의 투자은행의 수장들이 참석했습니다.          

 
다시 등판한 왕부주석은 어떤 얘기를 했을까요? 분위기는 어땠을까요? 세계 최대 경제대국이 정면으로 맞붙은 이번 전쟁이 격화되면서 그 현장이 궁금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사진 FT캡처]

[사진 FT캡처]

마침 파이낸셜타임스(FT) 베이징지국장 톰 미첼이 참석자들로부터 받은 디브리핑 내용을 소개했습니다. 제목이 의미심장합니다.

왕치산, 중국의 철인왕(哲人王)

로마의 철인황제(哲人皇帝)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에 대한 별칭을 살짝 비튼 타이틀입니다.  
왜 이런 타이틀을 붙였는지는 당시 대화 내용을 들어보면 수긍이 갑니다.  
 
회의를 무겁게 누른 주제는 하나였습니다. 미중관계와 어떻게 하면 1930년대 이래 최악의 무역전쟁을 끝낼 수 있는가였다고 합니다. 특히 왕치산은 트럼프 대통령과의 기싸움이 녹록치 않은 여정이 될 줄 미처 몰랐던 듯 트럼프를 이해하기 위한 작은 실마리라도 찾아낼 수 있을지 노심초사하는 모습으로 묘사됩니다.  

 
왕치산은 참석자들에게 이렇게 얘기합니다.  

영화 ‘쓰리 빌보드 아웃사이드 에빙, 미주리’를 보고 트럼프 대통령을 찍은 지지자들을 조금 이해하게 됐다.

[사진 쓰리 빌보드 홈페이지]

[사진 쓰리 빌보드 홈페이지]

‘쓰리 빌보드’는 제75회 골든 글로브 시상식에서 작품상과 각본상을 수상했습니다. 미주리의 시골마을에서 일어난 살인 사건을 둘러싸고 갈등을 벌이는 마을 주민들의 심리적 추이를 담은 영화입니다. 국내에서도 개봉됐습니다. 
 
범인을 잡지 못한 채 사건에 세상의 관심이 사라지자 피해자의 엄마는 동네 광고판에 도발적 광고 문구를 올립니다. "내 딸이 죽었는데 경찰 서장은 뭐하고 있는 건가"라는 내용이었지요. 조용한 마을의 평화를 바라는 이웃 주민들은 오히려 경찰을 두둔하고, 그녀의 힘겨운 싸움이 계속되는 영화입니다.
 
뚱딴지 같은 영화평에 곁들여 왕치산은 달래는 말투로 참석자들에게 말합니다. “미국이나 중국이나 상대를 압도하지 못하고 있다.”  

이런 스탠스는 지난 4월 왕치산을 만났던 업계 관계자나 외교관들이 전한 고압적인 태도와 크게 대비됩니다. 아시아 한 국가의 외교관의 얘기를 들어볼까요.  

당시 왕치산은 역사 교수 같았다. "역사의 밀물과 썰물에서 줄을 잘 서라"로 훈계했다. 미국 편에 서지 말라는 메시지였다.

옆자리의 외교관 동료는 한마디 더 거듭니다. “미국과 너무 밀착하지 말라는 경고로 해석됐다.”  
[사진 중앙포토] 영국 데이비드 리딩턴 내각사무처 장관

[사진 중앙포토] 영국 데이비드 리딩턴 내각사무처 장관

같은 시기 왕치산을 만났던 영국의 데이비드 리딩턴 내각사무처 장관은 시진핑 주석이 발표한 경제개혁에 대한 지지 의사를 표했다가 뜻밖에 왕치산으로부터 빈축을 사기도 했습니다. 왕 부주석은 영국의 아편전쟁을 칭하며 중국의 개혁은 중국식으로 한다고 경고했다고 합니다. 

"너희들이 좋다, 나쁘다를 얘기할 게 아니다"라는 생각이었겠지요.

[사진 셔터스톡]

[사진 셔터스톡]

한 달 뒤 무역전쟁의 전운이 짙어지고 있을 때에도 미국 업계 관계자들 앞에서 왕치산은 심드렁한 표정이었다고 합니다. 참석자의 전언을 들어볼까요.  

“그는 철인왕이었다. 우리는 그의 학생들이었다. 흡사 ‘당신들이 우리에 대해 알고 있는 것보다 더 많은 걸 우리는 알고 있다’는 식이었다. 심지어 트럼프 행정부와 줄이 닿는 인사들에게조차 질문 하나 하지 않더라. 다 알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중앙포토]

[중앙포토]

무역전쟁을 거는 미국의 속내와 역량, 그리고 한계에 대해 계산 다 끝났다는 자신감이 배어 있던 당시의 왕치산을 '철인왕'이라고 비틀어 묘사한 겁니다.  

현실은 냉엄했습니다. 

무역전쟁의 포성이 울리자 미ㆍ중의 성적은 확연히 갈렸습니다. 미국의 다우지수와 S&P500지수는 사상 최고 기록을 갈아치우고 있는 반면 상하이 지수는 곤두박질쳤습니다. 달러는 강세, 위안화는 약세를 면치 못하고 있습니다. 트럼프 대통령은 공세의 고삐를 당기며 시진핑 주석을 압박하고 있습니다.

[사진 셔터스톡]

[사진 셔터스톡]

 
톰 미첼의 촌평 한 줄이 이어집니다.    

왕치산과 시진핑, 그리고 (무역전쟁을 지휘하고 있는 최전방의) 류허 부총리는 곧 알게 됐다. 그들이 제대로 모르고 있었다는 것을. 특히 트럼프를….

무역전쟁 전후로 변화된 왕치산 부주석의 말투와 질문 태도 변화는 물밑에서 각축을 벌이고 있는 치열한 수싸움의 한 단면을 드러냅니다. 경제와 외교 관련 대미 사령탑인 왕치산 부주석의 등판은 이번 사태의 변곡점을 예고합니다.
 
정중동으로 은인자중 하던 왕 부주석은 왜 공식적인 미ㆍ중 경제회의 석상에 모습을 드러낸 걸까요. 여전히 트럼프 대통령과 치열하게 머리 싸움을 벌이겠다는 의사 표현일까요. 공식 일정인 금융원탁회의 시점에 맞춰 부랴부랴 월스트리트의 옛 친구들과 자리를 만드는 모양새로 볼 때 얼마나 그가 절박한 상황인지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습니다.  

관건은 퇴각의 모양새가 될 겁니다.
미국의 목표는 불공정 무역관행을 중단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중국으로부터 약탈당하고 있다고 규정한 지적재산권 보호와 금융시장 개방입니다. 단번에 오를 수 있는 산이 아닙니다. 중국의 반격도 만만치는 않을 겁니다. 

'우아한 퇴각'이 중국의 전략일 수도 있습니다.   

'특급 소방수' 왕치산은 정말 전선 사령관 자리로 복귀한 것일까요? 아직 예단할 수 없습니다. 그만큼 중국의 고민이 깊다는 얘기입니다.
 
차이나랩 정용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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