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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상복 연애소설>그 여자, 뭐가 그리 잘났는지 궁금해졌다

중앙일보 2018.09.28 08:00 종합 23면 지면보기
[일러스트 이정권 기자]

[일러스트 이정권 기자]

제1화 

"야호~~"

 
다섯 번이나 들이댄 끝에 난 마침내 그녀의 이메일 주소를 얻는 데 성공했다. 핸드폰 번호는 거절당했지만 이 정도만 해도 대단한 수확이었다. 요즘 같은 시대에 이메일 주소야 길에 널린 돌멩이 같기도 하지만 꼭 필요한 주소는 결코 그렇지 않았다. 그런데 메일 주소가 특이했다. noname0230이었다. 뒤에 붙은 숫자의 의미는 알 수 없지만 영문 아이디는 no name이었다. 그녀에게 처음 이름을 물었을 때 이름이 없다, 무명씨라고 말한 걸 나는 똑똑히 기억하고 있다. 이름에 관해 무슨 곡절이 있는 것임에 틀림없었다. 그건 차차 물어보기로 하고, 나는 일단 메일부터 쓰기 시작했다. 그날 그녀는 도서관 내 자리에서는 일어서도 보이지 않는 곳에 앉아 있었다.
 
"혹시 제 이름을 기억하시나요? 저번에 커피자판기 앞에서 제가 바로 뒤에 서서 잠깐 말을 걸었는데 기억하세요? 그때 이름을 말했는데 혹시 알고 계시나요? 사람들을 처음 만나 김천이라고 하면 다들 이름이 아니라 고향부터 소개하시네요, 하면서 재미있어 한다고 했는데 기억하시나요? 처음 마주친 건 화장실 앞이었죠. 떨어뜨린 파우치를 제가 날쌔게 캐취했죠.
 
그쪽에선 전혀 눈치 채지 못했겠지만 저는 제헌절 하루 전인 7월16일 이곳에서 처음 무명씨를 만났습니다. 화장실에 가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났는데 환하게 빛나고 있는 건너편 자리를 발견했습니다. 뒷모습도 아주 우아했죠. 제 발걸음은 너무나 자연스럽게 그쪽으로 향했고 얼굴도 확인했습니다. 가슴은 마구 뛰었고 무척이나 설렜습니다. 앞으로도 그럴 것 같습니다. 주위까지 환하게 밝히는 자태에 나는 넋을 잃었습니다. 군계일학(群鷄一鶴)이란 이런 때를 위해 준비된 말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다음날부터 저는 매일 하루도 빠짐없이 도서관에 출근하고 있습니다. 오늘이 광복절 전날이니 거의 한 달이 다 됐군요.그동안 무명씨가 이곳 디지털도서관에 온 날은 정확히 열흘입니다. 7월16일 이후 저의 도서관 출입 목적은 무명씨 바라기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길지 않게 이 정도로 마무리하기로 했다. 다시 한번 읽어봤는데 상당히 만족스러웠다. 바로 전송키를 눌렀다. 그녀의 반응이 어떨지 또 다른 설렘이 시작됐다. 보낸 메일함을 열고 수신확인 키를 눌렀다. 그녀는 무엇에 그리 몰두하고 있는지 메일을 열어보지 않았다. 내 메일을 본 것은 전송한 지 거의 3시간만이었다. 약간 실망했다. 메일 주소를 알려줬으면 곧 뭐든 올 것이라고 예상할 수 있는데 그녀는 역시 나에게 별 관심이 없는 것 같았다. 답신은 내 메일을 열어본 지 35분 만에 왔다. 읽는 데는 1분도 안 걸렸겠지만 생각을 정리한 끝에 보냈을 거라며 기대에 부풀었다. 나도 바로 열지 않고 30분쯤 뜸을 들일까 고민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게 더 이상할 것 같았다. 첫 눈에 반한 여자에게 첫 메일을 보낸 뒤 답신을 고대하는 건 너무나 당연했기 때문이다.
 
"간단히 두 가지만 적습니다. 저는 누가 날 감시하듯 지켜보는 걸 매우 싫어합니다. 그걸 좋아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거라 확신합니다. 특히 여자라면요. 한 달간 절 스토킹한 것 같은데 기분이 매우 찜찜합니다. 스토킹 당하는 기분이 어떤 건지 몰랐다면 자신의 일방적인 감정에 쉽게 빠져드는 사람으로 여겨집니다. 앞으로는 절대 그런 일 없어야 합니다.
 
다른 하나는, 전 글 잘 쓰는 사람을 좋아합니다. 틀린 글, 못 쓴 글을 보면 참기 어렵습니다. 초면에 괴팍한 제 성격 하나 알려드릴까요? 서점에서 제목이 그럴 듯해 집어 든 책이 마음에 안 들면, 예컨대 중언부언하거나 글이 뒤죽박죽이면 저 멀리 엉뚱한 서가에 꽂아두고 나옵니다. 일단 보내신 글은 그 정도는 아니지만 제 눈엔 걸리는 게 좀 많네요. 점수로 매긴다면 69점 정도입니다."
 
뭐, 이런 여자가 있나 싶었다. 마음을 진정하고 읽고 또 읽었다. 스토킹이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않았지만 당사자는 그렇게 느낄 수 있겠구나 싶었다. 문제는 첫 편지 글에 황당하게 점수를 매기는 그 당돌함이었다. 뭔가 복잡한 문제와 마주칠 때 늘 그랬듯이 나는 그녀의 성격을 메모식으로 정리해 봤다.
 
1. 분명하다. 요점 정리를 잘하고 자신의 생각을 상대에게 분명하게 전한다.
 
2. 논리 정연하다. 그래서 상대를 꼼짝 못하게 한다.
 
3. 스스로 말했듯 깐깐하고 괴팍한 면이 있다.
 
4. 타인에 대한 평가를 주저하지 않는다. 첫 글을 보고 70점도 안 된다고 판정할 정도로 오만하다.
 
이렇게 써놓고 몇 번을 읽어봤지만 혼란은 가시지 않았다. 외모는 완벽한 내 스타일이라 단박에 확 끌렸지만 이런 이상한 여자에게 계속 공을 들여야 하나 싶었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론 오기가 생겼다. 뭐가 그리 잘났는지 알아보고 싶어졌다. 사실 나는 아직 이 여자에 대해 아는 게 없다. 나이는 몇이고 무슨 일을 하는지, 도서관에는 왜 오는지 아무 것도 모른다. 어떤 여자인지 더욱 궁금해졌기에 당장 해야 할 일은 답장 쓰기였다. 이 난감한 편지에 어떻게 답을 한다? 심리상담사를 하는 대학 선배에게 전화라도 걸어 조언을 듣고 싶을 지경이었다.
 
"먼저 죄송하다는 말씀을 드립니다. 몰래 지켜본 것이 불쾌하셨다고요? 다시 한번 죄송합니다. 그런데 스토킹이란 용어는 좀 곤란합니다. 정말 순수한 마음에서 그랬습니다. 무슨 폐를 끼친 것도 없지 않나요? 그래도 불쾌한 건 분명해 보이니 다시 한번 죄송하다는 말씀 드립니다. 그리고 제 메일을 읽고 평가까지 해 주시니 더욱 고맙습니다. 앞으로도 많은 지도편달 바랍니다."
 
이번에는 의외로 답장이 빨리 왔다.
 
"짧은 글에서 죄송하다는 말을 세 번씩 할 필요는 없습니다. 본인도 순수한 마음에서 그랬다, 스토킹이라는 단어는 과하다고 호소하고 있으니까요. 이번 글에서 가장 마음에 드는 단어는 지도편달입니다."
 
어, 이거 봐라. 초장부터 완전히 날 갖고 노는 형국이었다. 스토킹이라며 심하게 야단쳐 놓고는 죄송하다는 말은 여러 번 할 필요가 없다? 인사치레로 쓴 지도편달이란 단어가 제일 맘에 든다니, 나의 빨간펜 선생님이라도 되겠다는 건가. 기가 찰 노릇이었다.
 
첫 편지보다 더 기분이 나빴다. 학창시절 한때 문예반에서 글 좀 쓴다는 소리를 들었는데 69점에 지도편달이 어쩌고, 이건 거의 모욕 수준이었다. 화가 났지만 꾹꾹 누르면서 이렇게 짧게 물었다.
 
"혹시 선생님인가요? 국어선생님...."
 
그녀는 직업이 궁금한 건지 비아냥대는 건지 모르겠다며 자신은 지금 할 일이 많다며 당분간 메일을 사양하고 싶다고 했다.
 
-앗, 이건 아닌데...  
 
당혹스러웠다. 이제 막 소통을 시작했는데 벌써 끝장이라고? 나는 흥분을 가라앉혀야만 했다. 어디 화풀이할 데도 없을뿐더러 깐깐한 그녀를 막 대했다간 일이 더 꼬일 게 분명해 보였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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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상복 심상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