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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경호의 시선] 작은 봉우리 하나 넘었을 뿐인데 …

중앙일보 2018.09.28 00:35 종합 36면 지면보기
서경호 논설위원

서경호 논설위원

‘봉우리…/지금은 그냥 아주 작은 동산일 뿐이지만/그래도 그때 난 그보다 더 큰 다른 산이 있다고는 생각지를 않았어/나한테는 그게 전부였거든’
 

인터넷은행 규제완화는 ‘아주 작은 동산’이지만 상징적 의미
시범사업 늘리고 지방에 규제권한 넘겨 핵심규제에 집중을

김민기가 작사·작곡한 1980년대 노래 ‘봉우리’의 한 대목이다. 노래의 주인공은 ‘일단 무조건 올라보는 거야…지금 힘든 것은 아무것도 아냐’ 하면서 애써 저 앞에 보이는 봉우리를 힘겹게 오르지만 ‘하나 내가 오른 곳은 그저 고갯마루였을 뿐/길은 다시 다른 봉우리로’ 이어진다. 가수 양희은이 부른 노래가 많이 알려졌지만 중저음의 허스키한 목소리로 나직하게 읊조리는 김민기의 노래도 좋다. 84년 LA 올림픽에서 메달을 따지 못하고 일찍 귀국한 선수들을 위로하기 위해 만든 노래였다고 한다. 추석 연휴 직전인 20일 국회를 힘겹고 통과한 문재인 정부의 규제혁신 1호 법안인 인터넷전문은행특례법을 보면서 문득 이 노래를 떠올렸다. 그만큼 힘들고 어려운 과정이었기 때문일 게다. 소관 부처인 금융위원회 고위관계자도 막판까지 마음을 놓지 못했다.
 
인터넷전문은행의 은산분리 규제 완화는 김민기의 노랫말처럼 ‘그냥 아주 작은 동산’에 불과할 수 있다. 반대론자의 숱한 주장 가운데 인터넷전문은행의 고용 창출 효과가 크지 않다는 지적은 영 틀린 말은 아니다. 지점 없는 인터넷은행이 전국 지점망을 거느린 기존 은행처럼 일자리를 만들 수는 없는 일이다. 금융위가 일자리 숫자보다는 국민 편익과 핀테크 등 새로운 산업 생태계의 창출에 중점을 두고 국회를 설득한 것도 이런 이유다. 그렇다고 일자리 창출을 위해선 차라리 기존 은행 허가를 더 내주는 게 낫다는 어느 반대론자의 주장은 지나쳤다. 이를테면 고용유발계수가 가장 높다고 해서 기존 농어업에 마냥 투자할 수는 없는 일 아닌가. 은산분리 규제는 우리 사회에서 오랫동안 찬반 논쟁이 맞붙으면서 규제 개혁의 상징처럼 돼버렸다. 비록 ‘아주 작은 동산’에 올랐을 뿐이지만 그 의미는 작지 않다고 본다.
 
[일러스트=김회룡 aseokim@joongang.co.kr]

[일러스트=김회룡 aseokim@joongang.co.kr]

또 다른 ‘봉우리’에 오르기 위해 복기(復棋)할 부분이 있다. 은산분리 규제처럼 오래된 이슈는 전문가 그룹의 진영논리가 실용적인 해법을 도출하는 데 걸림돌이 됐다. 지금 봉착한 문제를 어떻게 해결하느냐가 아니라 기존 찬반 입장을 어떻게 강화하느냐에 더 골몰했다. 반대 진영의 한 교수는 최근의 금융감독 강화 흐름을 고려할 때 은산분리 규제를 어느 정도 완화할 필요가 있다고 했지만 “내 이름은 기사에서 빼달라”며 실명 인용은 부담스러워했다. 어느 입장에 서느냐 만이 중요할 뿐, 진영 논리와 다른 목소리는 나오기 힘든 분위기였다. 과거에만 얽매이면 한 발짝도 앞으로 나아갈 수 없다.
 
인터넷은행 규제 완화의 일등공신은 문재인 대통령이다. 난마처럼 얽히고설킨 ‘고르디우스의 매듭’을 단칼에 끊어냈다. 대통령이 영국 자동차 산업의 발전을 막은 ‘붉은 깃발’ 같은 낡은 규제라며 날 선 비판을 날렸고, 여당 지도부도 나섰다. 여당 일부 의원은 여전히 반대했지만 법안은 가까스로 국회를 통과했다. 규제 개혁을 향한 대통령의 굳은 의지는 중요하지만 모든 교통정리를 대통령이 나설 수도 없는 일이다. 체계적인 해법이 필요하다.
 
정부가 어제 발표한 규제혁신 방안에서 입국장 면세점을 ‘시범사업’으로 허용했다. 이제까지 논란이 됐던 규제 현안을 이처럼 시범사업으로라도 우선 시작했으면 한다. 제한된 공간에서 한시적으로 일단 해보고 부작용이 있는지, 대응책은 마련할 수 있는지 등을 시간을 갖고 따져보자는 것이다. 지난주 규제샌드박스 관련법이 국회를 통과한 만큼 여건은 마련됐다. 여론과 정치권의 비난이 두려워 소극적으로 규제 개혁에 임할 수밖에 없는 공무원 입장에서도 시범사업은 안전판이 될 수 있다.
 
중앙정부의 규제 권한을 지방정부로 대폭 넘겨 지방정부 간에 규제 개혁을 향한 선의의 경쟁이 벌어지게 할 수는 없을까. 지방일괄이양법을 제정해 굵직한 중앙정부 업무를 지방으로 통째로 넘긴 일본과 프랑스의 사례가 있다. 문 대통령이 이미 ‘연방제 수준의 지방분권’을 여러 차례 공언한 만큼, 우리도 못 할 이유는 없다.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바뀌지 않는다.
 
어제 정부는 외환 규제 완화와 함께 현장의 요구를 반영해 ‘작지만 절실한’ 규제 혁신안을 여럿 내놨다. 가려운 곳을 긁어주는 효과는 있겠지만 국민이 규제 개혁을 피부로 느끼기엔 많이 부족하다. 노동·환경·수도권 규제 같은 핵심에 다가서지 못하기 때문이다. 청와대가 노동계의 숙원을 해결해준 것처럼 그 정도의 관심과 노력을 이런 핵심규제를 푸는 데 기울여야 한다. SK텔레콤·현대자동차·네이버·카카오 같은 대기업이 규제에 막혀 해외에서 신사업을 벌이는 걸 언제까지 지켜만 볼 것인가. 기업 투자 없이는 소득주도 성장이 아니라 그 어떤 아름다운 이름을 붙여도 성공하기 힘들다. 노래 ‘봉우리’는 이렇게 끝난다. ‘봉우리란 그저 넘어가는 고갯마루일 뿐이라구/하여, 친구여 우리가 오를 봉우리는/바로 지금 여긴지도 몰라…’ 
 
서경호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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