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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 시조 백일장] 9월 수상작

중앙일보 2018.09.28 00:02 종합 29면 지면보기
<장원>
허기
-윤병석
 
모래 새를 파고드는 파도처럼 남은 자의
생존은 늘 허기진 그리움과 애틋함이
세포의 가름막마다
절절히 파고든다.
 
서성대던 바람이 꽃대에 스며들면
달맞이꽃 목에 걸린 저녁해가 힘겨워
가문 땅
한 줌 물기를
마저 빨아올린다.
 
◆윤병석
윤병석

윤병석

1964년 부산 출생. 부산대 법학과. 대학 시절 문학동인회에서 자유시 습작. 시조의 율격 통해 초심을 찾고자 기성 시인들의 시조 필사하며 시조 독학.

 
 
 

<차상>
팔공산에는
-이상식
 
팔공산에는 구석구석이 마구니 천지다.
바위가 무슨 부처냐, 그 앞에 꿇어앉아
없는 길 하나 내놓고 허둥대는 꼴이라니
 
팔자 들먹이지 마라, 그냥 된 게 아니다.
산다는 게 모두 천불 날 일 아니던가.
안 나는 종소리 듣고 놀란 척하는 것 좀 봐
 
세상에 빌어서 얻을 게 뭐 하나 있더냐.
굿판 벌여 봐야 애꿎은 산만 몸살이다.
등 하나 달면 된다지만 아무나 하는 거 아니다.
 
<차하>
유리창에 비
-김학주 
 
창문에 써 내려 가는 편지를 읽으며  
허와 실의 공간에서 외줄 타기를 해본다
저 펜은 닿는 곳마다  
눈물이 흐르는지.
 
시나브로 다가오는 어머니의 환영은
유리창에 중첩되어 점점 더 커져만 가고
투명한 편지지는 이내  
울음바다가 된다.  
 
<이달의 심사평>
한가위로 상징되는 결실의 가을이 성큼 다가왔지만 이달의 응모작품은 어느 때보다 편수와 질감 모두 기대에 미치지 못해 참으로 아쉬웠다. 그러나 그중에서도 오랜 숙성을 거친 사유와 자신만의 목소리를 내는 작품들이 무한한 가능성을 열어준 점은 무척 고무적이었다.
 
이달의 장원으로 절실한 생존본능을 식물적 상상력으로 형상화한 윤병석의 ‘허기’를 올린다. 첫수에서 “모래 새” “세포의 가름막”을 통해 인식된 생존의 “허기”는 둘째 수에서 달맞이꽃이라는 구체적 대상에 의해 “가문 땅”과 “한 줌 물기”로 선명한 이미지를 획득하게 된다. “파고든다” “스며든다” “빨아올린다”는 통일된 뿌리의 동적 심상들이 생존의 정서를 집약시키는 솜씨가 특히 돋보였다.
 
차상으로는 이상식의 ‘팔공산에는’을 선한다. 영험한 기도처로 알려진 대구의 명산 팔공산에서 치성을 드리는 세태를 신랄하고 냉소적인 어조로 비판하고 있는 시선이 흥미로웠다. “팔공산 구석구석이 마구니 천지다”라는 역설로 시작한 첫수 초장부터 풍자와 골계미까지 느껴지는 직접화법으로 처리한 것이 인상적이었다.
 
차하로는 김학주의 ‘유리창에 비’를 선한다. 비 내리는 유리창을 통해 “창문에 써 내려 가는 편지”를 읽어내는 화자의 눈을 따라가면 비를 “펜”으로, 유리창을 “투명한 편지지”로 치환하면서 어느덧 “어머니의 환영”과 “울음바다”에 이르게 된다. 단순한 포착이지만 결코 녹녹지 않은 내공이 느껴지는 감각이다.  
 
심사위원: 박권숙·최영효 (대표집필 박권숙)
 
 
<초대시조>
숲에서 듣다  
-정혜숙  
 
짧은 경적도 없이 가을이 도착했다  
햇살 잦아드는 반그늘의 숲속에  
출구를 찾아 헤매는  
어지러운 음절들  
 
산벚나무 궁리 끝에 남은 잎 마저 내려놓고  
울음 그치지 못하는 늙은 저, 화살나무  
한 줄기 바람 불어와  
눈물 잠시 말리는 사이…  
 
부족한 필력으로는 감당하지 못한다  
저무는 숲에 뒹구는 서러운 절명시
먼 데서 새가 한 마리  
곡비처럼 길게 운다   
 
◆정혜숙
정혜숙

정혜숙

1957년 전남 화순 출생. 2003년 중앙신인문학상 시조 등단. 오늘의시조시인상, 중앙시조대상 신인상 수상. 시조집 『앵남리 삽화』 『흰 그늘 아래』 『그 말을 추려 읽다』.

 
 
 
 
지난여름의 폭염에도 불구하고, 가을은 문득 우리 앞에 다가와 있다. 시인은 이를 “짧은 경적도 없이 가을이 도착했다”고 한다. 그걸 느끼는 순간 저물어가는 사물들의 안색이 궁금해진다. 환경적 요소로 작용하는 사물들도 결국엔 나의 분신과도 같이 유정(有情)한 것이리라. 그들을 보는 눈빛이 예사롭지 않은 것은 사물을 통해 나를 비춰볼 수 있기 때문이다.

 
화자는 숲속에서 “출구를 찾아 헤매는/ 어지러운 음절들”을 불러내고 이들의 안부를 듣는다. 이웃과 가족들이 있을 것이나 본원적인 고독감은 나를 둘러싼 자연물을 통해 감수성 있게 촉발된다. 그러므로 가을 숲속에서 자연물이 띄우는 “절명시”를 듣는 것은 단독자로서의 나를 불러내어 대면하는 일과 다름이 없다. 잎이 듬성해지기 시작한 산벚나무는 잎을 마저 지우고 묵상에 들었다. 그러나 “늙은 저, 화살나무”는 잎새를 매단 채 마지막 고비에 떨고 있다. 그와 더불어 새나 곤충이나 간에 숲에서 “서러운 절명시”를 남긴다. 그 모습을 오래 들여다보면서 존재의 축소를 함께 겪는 얼굴이 어둡다. 어떻게 보면, 나무나 생명체들이 알려주는 대로 인간도 해마다 한 번씩 자신만을 위한 제사를 지내고 있는지도 모른다.
 
사물이 가진 본성에 이입되어 그 느낌을 감당하고 전달하려는 노력이 “필력”을 넘어서는 곳에서 빛을 발하고 있다. 생사고락의 근원에 닿으려는 사색과 추구를 통해 원형적으로 심화될 수 있을 것이다.
 
염창권 시조시인
 
◆응모안내
매달 20일 무렵까지 우편(서울시 중구 서소문로 100번지 중앙일보 문화부중앙시조백일장 담당자 앞. 우편번호 04513)또는 e메일(won.minji@joongang.co.kr)로 접수할 수 있습니다. 02-751-53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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