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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상복 연애소설> 당신의 글, 영 아니네요. 68점입니다

중앙일보 2018.09.21 08:00

프롤로그 

중앙일보 더,오래가 9월21일부터 주 1회 특이한 연애소설 하나를 연재합니다. 뭐가 특이하냐고요? 소재가 글짓기라는 점이 그렇습니다. 남녀간 밀당의 매개체가 글쓰기라고 하면 고개를 갸우뚱할 독자도 있겠지만 소설로서 충분한 재미와 반전을 갖추고 있습니다. 글에 병적으로 집착하는 여자와 그를 여신으로 떠받드는 연하남의 곡절 많은 사랑이야기, '세상에 없던 연애'입니다. 세상에 없던 소설이라고 하면 과장광고일까요?
 
왜 이런 소설을 준비했느냐고요? 요즘 사람들이 글과 너무 멀어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모든 경험과 상상력은 이야기의 소재가 됩니다. 그래서 서점가에는 매일 새 책들이 쏟아져 나오지만 온갖 동영상이 득세하면서 글과 책을 가까이하는 사람은 날로 줄고 있습니다. 이 좋은 계절에 그들을 다시 우리의 친구로 만들기 위해 이정권 중앙일보 화백까지 동원했습니다. 그는 어떤 콘텐츠라도 위트와 아트로 풀어내는 데 남다른 재주를 가진 '쟁이'입니다. 한 폭의 삽화가 긴 글을 압도할 때도 자주 있을 겁니다. 
 
스마트 기기들이 사람의 말을 알아듣고 글로 받아적어도 그걸 표현하는 주체는 인간입니다. 요즘 인기 있다는 웹툰도 글은 몇 마디지만 그것 없이 그림 혼자서는 존립할 수 없습니다. 옷을 짓고, 농사를 짓고, 집도 짓습니다. 생활의 뿌리인 의식주에 관한 동사가 모두 같습니다. 글도 짓는 겁니다. '짓는다'는 인간 본연의 동사에 사랑과 연애도 버무려 볼 참입니다. 글짓기라는 희한한 소재를 어떻게 이야기로 풀어낼지 관심을 갖고 지켜봐 주세요.
 
[일러스트 이정권 기자]

[일러스트 이정권 기자]

트레일러

"초면에 괴팍한 제 성격 하나 알려드릴까요? 서점에서 제목이 그럴듯해 집어 든 책이 마음에 안 들면, 예컨대 중언부언하거나 글이 뒤죽박죽이면 저 멀리 엉뚱한 서가에 꽂아두고 나옵니다. 일단 보내신 글은 그 정도는 아니지만 제 눈엔 걸리는 게 좀 많네요. 점수로 매긴다면 68점입니다."
 
뭐, 이런 여자가 있나 싶었다. 마음을 진정하고 이메일을 읽고 또 읽었다. 뭔가 복잡하거나 헷갈릴 때 늘 그랬듯이 나는 그녀의 성격을 메모식으로 정리해 봤다.
 
1. 분명하다. 요점 정리를 잘하고 자신의 생각을 상대에게 분명하게 전한다.
 
2. 논리 정연하다. 그래서 상대를 꼼짝 못 하게 한다.
 
3. 스스로 말했듯 깐깐하고 괴팍한 면이 있다.
 
4. 타인에 대한 평가를 주저하지 않는다. 첫 글을 보고 70점도 안 된다고 판정할 정도로 오만하다.
 
이렇게 써놓고 몇 번을 읽어봤지만 혼란은 가시지 않았다. 외모는 완벽한 내 스타일이라 단박에 확 끌렸지만 이런 이상한 여자에게 계속 공을 들여야 하나 싶었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론 오기가 생겼다. 뭐가 그리 잘났는지 알아보고 싶어졌다. 사실 나는 아직 이 여자에 대해 아는 게 없다. 나이는 몇이고 무슨 일을 하는지, 도서관에는 왜 오는지 아무것도 모른다. 
 
***********
 
"나이가 몇이에요?"
 
그녀의 질문은 대체로 엉뚱했다. 글은 그렇게 조리 있게 쓰고 논리를 중시하면서 왜 말은 뜬금없이 막하는 걸까. 
 
"나이요? 서른여덟입니다."
 
그러자 그녀의 입꼬리가 슬며시 올라갔다.
 
-저건 또 무슨 싸인이지...
 
그녀는 자기보다 한참 아래라며 이제부터 말을 놓겠다고 선언했다. 
 
"야, 김천, 너 날 좋아하냐? 내가 유부녀인지 어쩐지도 모르면서."
 
그녀의 반말은 그렇게 시작됐다. 그것은 우리 사이가 오랫동안 그렇게 고착돼 온 것처럼 자연스러웠다.
 
나는 이 여자가 주사를 부리는 건지 호쾌한 건지 헷갈렸다. 하지만 이왕 시작됐으니 나도 술의 힘을 좀 빌리기로 했다.
 
"네, 좋아합니다. 아주 많이 좋아합니다. 그리고 내가 무명씨를 좋아하는 것과 무명씨의 결혼 여부는 전혀 다른 문제입니다."
 
나는 16년 전 방위병처럼 씩씩하게 대답했다.
 
“그리고 이제부터 누나라고 부르겠습니다.”
 
"어쭈 이 자식, 제법인데. 꼭 군인처럼 말하네.”
 
“네 장병장님! 밥은 잘 사주실 거죠?”
 
“아니, 내가 왜 장병장이야?"
 
“군대시절 그런 꼴통이 있었습니다.”
 
누나는 마침내 크게 웃으며 처음으로 나와 잔을 부딪쳤다. 
 
자신이 ‘방위병’ 하면 나는 ‘위하여’를 외치라고 했다.
 
나는 그렇게 다시 군대로 끌려가고 있었다.
 
********
 
“그럼 우리 더 취하기 전에 오늘 수업 좀 할까?”
 
“예? 수업? 무슨 수업요?”
 
그녀는 태연하게 가방에서 A4용지 두 장을 꺼내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그녀에게 맨 처음 보낸 메일 앞부분을 프린트해 온 것이었다.
 
[혹시 제 이름 기억하시나요? 저번에 커피자판기 앞에서 제가 바로 뒤에 서서 잠깐 말을 걸었는데 기억하세요? 그때 이름을 말했는데 혹시 알고 계시나요? 사람들을 처음 만나 김천이라고 하면 다들 이름이 아니라 고향부터 소개하시네요, 하면서 재미있어 한다고 했는데 기억하시나요? ]
 
“아, 이건 좀 너무 합니다. 오늘 같은 날에 무슨..."
 
"야, 방위! 오늘 같은 날이 어때서? 난 너무 좋은데, 김이병과 첫 데이트를 하면서 글공부라…안 그래, 넌?”
 
송년파티 날에 글공부가 말이 되느냐고 하극상이라도 벌일 참이었다. 그런데 첫 데이트 소리에 나는 바로 항복하고 말았다.
 
“내 첫 편지 받고 기분이 어땠어?“
 
내가 머뭇거리자 그녀는 한마디 더 했다.
 
“68점 말이야. 왜 내가 그렇게 박한 점수를 준 지 알아?”
 
그녀는 오늘 수업 주제는 '반복은 금물'이라고 했다. 같은 단어는 물론 가능한 한 비슷한 표현도 되풀이하지 말라는 것이었다. 
 
“그런데 너 인마, 이것 좀 봐. 첫 네 문장 중 세 개의 술어가 기억하느냐이고, 나머지 하나도 아느냐로, 결국 네 문장 술어가 다 같잖아. 야, 이것도 글이냐?”
 
그래서 그 다음은 읽고 싶지 않았지만 억지로 읽었다고 했다.
 
들어보니 맞는 말이었지만 기분은 좋을 수 없었다.
 
-오늘은 너무나 특별한 날 아닌가. 이런 날, 꼭 저렇게 해야 하나. 아, 이 여자, 정말 구제불능이구나.
 
******
 
"병장님, 그런데 몇 살인데 저한테 그렇게 반말을 하십니까?"
 
"야, 이등병, 넌 입은 있지만 말할 자유는 없어, 인마. 이게 아직도 인간인 줄 착각하고 있네. 넌 인간이 아니라 그냥 방위병이야, 방위병!"
 
나는 그 순간 이 여자가 여군을 다녀온 것이 틀림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네 알겠습니다. 저는 인간도 아닙니다. 병장님의 시종일 뿐입니다. 제겐 세 가지 소원이 있습니다. 하나도 시종, 둘째도 시종, 셋째도 병장님의 영원한 시종이 되고 싶습니다."
 
역할극 1막을 끝낸 뒤 우리는 다시 낄낄거리며 웃을 수 있었다. 술의 힘 때문인지 그녀의 마음속 응어리가 뭔지 몰라도 조금은 풀린 듯 보였다.
 
그러던 그녀의 표정이 다시 식으며 말수가 줄어들었다.
 
“오늘 좀 많이 드셨죠?”
 
“…”
 
“술 잘 못 드시면서 잘 먹는 척하신 거죠?”
 
“…” 
 
내 말에 대꾸도 않던 그녀가 작은 소리로 중얼거렸다.
 
"아버지 젊었을 때와 너무 닮았어요."


※ 9월 28일 금요일 오전 8시에 1화가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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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상복 심상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