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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밀 1만t 쌓였는데 안 팔려 “올 수확분 다 버리게 생겼다”

중앙일보 2018.09.21 00:32 종합 19면 지면보기
우리밀 농민 홍향순씨가 창고에 쌓인 밀을 가리키며 답답함을 호소하고 있다. [프리랜서 장정필]

우리밀 농민 홍향순씨가 창고에 쌓인 밀을 가리키며 답답함을 호소하고 있다. [프리랜서 장정필]

“추석이 돌아와도 명절 쇨 돈도 없어. 밀값을 줘야 명절을 쇠쟤. 수매는 허도 못 허고, 밀은 저렇게 가마니에 담아져 있고….”
 

4배 비싼 우리밀, 경쟁력 없는데
정부 장려해놓고 판매·수매 뒷짐
연 4만t 생산하는데 “재고만 쌓여”

“군대·학교 납품, 공공비축 해달라”
19일 청와대 앞서 시위 벌이기도

지난 11일 광주광역시 남구 화장동의 한 우리밀(국산밀) 농가. 홍향순(57·여)씨가 100평(330㎡) 규모의 창고 안에 쌓인 우리밀을 보며 한숨을 쉬었다. 지난 6월 수확한 밀 40t 일부가 톤백(1t짜리 가마니)에 담긴 채 방치돼 있어서다.
 
30년간 우리밀을 재배해 온 홍씨는 현재 논 6만 평을 빌려 벼와 우리밀을 이모작(二毛作)하고 있다. 해마다 벼 수확이 끝나는 10월에 우리밀을 파종해 이듬해 6~7월에 거둔다. 하지만 홍씨는 “올해는 생산비도 못 건지고 빚만 잔뜩 졌다”고 푸념했다. 그동안 계약 재배를 해 왔는데 판로가 막혀 수매가 이뤄지지 않아서다.
 
전북 고창군 부안면에서 밀농사를 짓는 김재국(48)씨는 “올해처럼 한 톨도 못 판 적은 처음”이라고 했다. 급기야 ‘전량 폐기’를 고심하고 있다. 김씨는 “다음 달부터 나락을 베야 하는데 벼를 둘 데가 없어 창고에 쌓아 둔 밀은 버릴 수밖에 없다”고 했다.
 
국내 우리밀 재배 농가들이 시름에 잠겼다. 팔 곳이 없어 애써 수확한 밀을 창고에 묵히거나 폐기까지 검토하고 있다. “이대로 방치하면 우리밀 생산 기반이 붕괴될 것”이라는 우려가 나온다.
 
우리밀농협이 팔지 못한 작년산 밀 1200t. [프리랜서 장정필]

우리밀농협이 팔지 못한 작년산 밀 1200t. [프리랜서 장정필]

정부는 지난 2008년 “우리밀 자급률을 2020년 5.1%, 2022년 9.9%까지 확대하겠다”고 발표했다. 그 결과 우리밀 자급률은 2008년 0.2%에서 2016년 1.6%로 8배 늘었다. 지난해에는 경기 불황 여파로 다시 0.9%로 떨어졌다.
 
현재 국내 밀 시장은 수입밀이 99% 독점하는 구조다. 수입밀은 연간 420만t(식용 200만t, 사료용 220만t)이 국내로 들어온다. 우리밀 생산량은 지난해 기준 3만7000t 수준이다. 우리밀은 농약을 거의 쓰지 않아 ‘안전한 먹거리’라는 평가를 받지만, 가격 경쟁력에서 크게 밀린다. 우리밀 가격은 관세가 면제되는 수입밀보다 4배가량 비싸다. 지난해 밀의 원곡 가격(40㎏ 기준)은 수입밀이 1만2000원, 우리밀은 4만원이었다. 올해 우리밀 값은 3만9000원이다.
 
우리밀 수매 단체들도 직격탄을 맞았다. 국내 수매 단체 중 규모가 제일 큰 한국우리밀농업협동조합도 예외가 아니다. 전국 밀 농가 2036곳과 계약 재배를 하는 곳이다. 하지만 최근 경기 악화로 우리밀농협에만 2016~2017년산 우리밀 6810t이 재고로 남아 있다. 올해 수매량(4500t)까지 포함해 1만1310t을 처리하지 못해 발만 동동 구르고 있다.
 
김태완(53) 우리밀농협 상무는 “밀이 안 나가니 지난해 수매 대금 85억원 중 16억원을 조합원(농민)들한테 못 주고 있다”며 “자금 압박이 심하다”고 털어놨다. 국산밀산업협회에 따르면 올해 우리밀 전체 수매 예상량은 2만3700t이다. 재고량은 2016년산부터 1만8000t이 창고에 쌓여 있다. 국산밀산업협회는 우리밀 수매 단체를 회원사로 둔 농림축산식품부 산하 사단법인이다. 재고가 넘치자 우리밀 수매 단체들은 올해 수매량을 대폭 줄이거나 일부 단체는 아예 수매를 포기했다.
 
우리밀 업계에선 ▶재고 물량에 대한 상시적인 주정 원료 처리 ▶국산밀의 공공비축 제도 도입 ▶군대·학교 급식 등 대형 소비처 공급 등을 요구하고 있다. 국산밀산업협회 회원 등 300여 명은 지난 19일 청와대 앞에서 시위를 벌였다. 하지만 정부가 구체적 해법을 내놓지 않아 속앓이만 하고 있다. 그나마 이개호 농식품부 장관에 기대를 거는 분위기다. 더불어민주당 의원인 이 장관은 지난해 12월 ‘국산밀산업 육성법’ 제정안을 대표 발의했다. 이 법안에는 공공비축밀 제도 등이 담겼다. 천익출(71) 우리밀농협 조합장은 “9월이면 우리밀 파종 규모와 내년도 수매 계획이 나와야 하는데 정부가 뒷짐만 지고 있다”고 했다.
 
광주광역시=김준희 기자 kim.junhee@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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