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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낌들이 의인화돼 전면에 나선 김상혁·황혜경의 시

중앙일보 2018.09.21 00:01
2018년 제19회 중앙신인문학상 문학평론 당선작 

 
느낌의 곤란함에 대한 몇 가지 명제
- 김상혁과 황혜경의 시를 중심으로

 
1. 느낌은 어떻게 작동하는가

 
언어를 통해 전달하기에 가장 곤란한 대상 중 하나가 느낌(感)이다. 느낌을 전달하기 위해선 여러 난제가 해결되어야 한다. 먼저 전달하는 쪽에서 어떠한 느낌인지 특정할 수 있어야 하고, 또 그것을 정확한 언어로 표현할 수 있어야 한다. 하지만 어떤 느낌이건 대개 복합적이거나 미묘한 부분이 있어 하나의 대상으로 선명하게 분리하기 어렵고 우리가 알고 있는 몇 단어 중의 하나로 단순히 특정하기도 어렵다. 또 하나의 느낌으로 특정되더라도 그것은 온전히 그 단어 안에 갇히지 않는다. 이러한 것이 성공해도 수신자가 그 언어를 발신자와 동일한 것으로 경험하기란 거의 불가능하다. 어떠한 공통성에 기반한 언어라 하더라도 발신자와 수신자의 언어적 경험 사이에는 넘기 힘든 심연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특히 그 언어의 목적이 의미 전달이 아니라 느낌의 경험을 전달하고자 한다면 심연은 더욱 깊어진다. 불가능은 곳곳에 산재해 있다. 이 곤란함 앞에서 언어는 자꾸 뭉뚱그려진다.    
 이러한 측면에서 느낌은 언제나 ‘비(非)’와 ‘불(不)’이라는 곤란함의 수사를 동반한다. 느낌은 ‘무엇’이라고 한정할 수 있는 대상을 가지지 않으므로 비대상적이고 비정형적이고 비확정적이며, 시간의 지속성 측면에서 불연속적이며, 고정되어 있지 않으므로 제 스스로 불일치하고, 또 언제나 비가시적이다. 느낌은 어떤 식으로 표현되더라도 언어로서는 완전한 표현이 불가능한 무엇이다. 그것은 느낌으로 충만한 잠시의 순간일 때라도 마찬가지이다. 오히려 ‘뭐라 표현할 수 없어’서 느낌이라 부르고 마는 것이기도 하다. 느낌이 가진 비적(非的) 속성은 늘 언어의 불능(不能)과 함께한다.  
 느낌이 언어의 테두리에만 불일치한 것은 아니다. 주체와 관련해서도 그러하다. 느낌은 경험하는 주체의 바깥으로 삐져나온다. 주체가 하나의 괄호라면 느낌은 괄호의 안팎을 채우는 면(面)이다. 그것은 강도에 따라 괄호의 안팎을 넘나든다. 언어적·주체적 경계를 갖지 않으면서 느낌은 그것들의 경계를 넘고 또 흐트러뜨린다.  
 2000년대 초중반 이후 한국시에는 시적 주체를 다루는 하나의 경향이 생겼다. 분열로 인해 복수화(複數化)되거나 비인칭적인 성격을 띠거나 유령적인 겹쳐짐으로 나타나거나 혹은 그저 텅 빈 자리로만 형상화 되거나 등등 구체적인 표현은 달라도, 이는 주체의 해체·분열·분리를 넘어 (사회적 관계 속 ‘자리’의 상실이라는 신자유주의적 전망과 맞물려) 주체의 소멸에 가까운 축소로 이어지는 흐름이었다. 이를 주체의 미분화(未分化)라고 한다면, 황혜경과 김상혁의 시는 일종의 느낌의 적분(積分)이 미분된 주체들을 감싼다. 특히 시집 『느낌 氏가 오고 있다』(황혜경, 2013)와 『다만 이야기가 남았네』(김상혁, 2016/ ※본문에서 인용하는 시의 출처는 다음의 두 권이다. 황혜경의 『느낌 氏가 오고 있다』(문학과지성사, 2013), 김상혁의 『다만 이야기가 남았네』(문학동네, 2016)에서는 더 이상 주체가 문제되기보다는 주체의 관점에서 주변적이었던 (실은 애초부터 주변이 아니었던) 느낌들이 의인화·인칭화되어 전면에 나선다. 관계와 맥락에 따라 다변하거나 무화되기도 하는 미분된 주체의 시편들이 주체에 대한 문제제기였다면, 황혜경과 김상혁의 경우 느낌을 통해 관계와 맥락의 서브텍스트적 위치를 재조정한다. 황혜경과 김상혁의 시편들은 언어의 심연을 넘는 소통의 경로이면서도 경로 안에서 유실되어 온 느낌을 전경화(前景化)하면서, 느낌의 적분 속에서 주체의 미분을 붙잡는 특수한 케이스라고 할 수 있다. 주체와 언어의 돋을새김이 바탕의 느낌과 역전되거나 혹은 기존과 다른 관계를 구성한다.  
  비(非)와 불(不)로 밖에 표현되지 않던 느낌을 인칭·형상화하는 것은 느낌이 지닌 규정 불가능에 형태를 씌우는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비와 불의 속성과 다퉈 그것을 규정하려는 것이 목적이 아니다. 이는 다만 인지적 이해의 어려움에 따라 쉽게 외면당하고 주변부화 되었던 비와 불의 속성과 화해하기 위한 방법론, 즉 불가능과 비규정 등을 끌어안고 그것이 가진 곤란함과 함께하기 위한 것이다. 그러니 느낌의 비와 불의 속성에 대해서는 느낌이 무엇인지 규정하기보다, 그것이 구체화되어 있는 두 사람의 시편들을 통해 느낌은 어떻게 작동하는지 볼 수 있을 것이다. 느낌은 그것을 둘러싸고 있는 비와 불의 곤란함과 어떻게 함께하는가.  
 
2. 느낌에 관해 언어는 불충분하다

 
언어는 분류와 분리의 과정을 통해서 구성된다. 이것과 저것이 구분되고, 구획된 틀 안에서 의미 역시 분리되어 자리 잡는다. 하지만 언어의 구획 안에 나뉘어 안착하기에 느낌은 그보다 더 크거나 복잡하다. 느낌을 가두기에 언어는 불충분하다.  
 
 충격의 날들이 이어지고 말기를 살고 있는 것 같을 때 비극적 상상만으로 종일 울 수도 있고 모르는 사이에 슬픔이 아늑한 곳에 자리를 깔고 나면 알게 모르게 섞이고 자고 나면 섞이고 오가는 발들에 대해 생각하면 또 얽히고 점점 집을 나서기 힘들어지고  
 
[···]
 
지금 나는 이 복잡한 것을 그저 착잡하다, 라고
말해버려도 괜찮을까  
 
- 황혜경, '착잡하다' 부분
 
 시는 정의와 해석의 언어가 아니라 정황의 언어, 사이와 맥락의 언어이다. ‘착잡함’이라는 느낌을 전달하기 위해 황혜경에겐 5개의 연과 그보다 더 많은 단어들이 필요했다. 이 안에는 ‘비극적 상상’과 ‘울음’과 ‘아늑한 곳에 자리를’ 깐 슬픔과 오가는 발에 대한 생각 등등이 뒤섞여 있다. 그리고 전달의 여정에는 각각의 느낌들 뿐 아니라 다음의 세 변주가 함께 한다. 우선 시는 ① ‘착잡함’이라는 하나의 느낌을 전달하기 위한 것이다. 하지만 ② 보다 엄밀하게는 “이 복잡한 것을 그저 착잡하다, 라고/말해버려도 괜찮을까”라고 묻는 끝맺음에서 보듯 언어의 불충분성에 대한 메시지를 외적으로 드러낸다. 즉 그러한 때의 느낌이 ‘착잡하다’라는 하나의 단어 안에 들어가지 않는다는 것이다. ③ 그리고 실제로는 명시된 언어의 불충분성으로 인해 ‘착잡하다’라는 단어의 주변을 흘러넘치는 복잡 다변한 느낌이 ‘착잡함’이라는 뉘앙스와 함께 전달되는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분석적인 구분이 의미에 접근하는데 도움이 될 때라도, 각각의 파편이 시편 전체의 맥락에서 어떤 느낌을 구성하고 전달하고 있는가는 다른 문제로 남는다. ‘착잡함’이라는 단어를 둘러싼 맥락과 시 속에서 구축되고 있는 사건, 각 대상 간의 배치의 조합은 이 시가 전달하는 느낌이 ‘착잡함’의 언저리에 있는 어떤 것이 아닐 가능성을 내포한다. 혹여 그것이 ‘착잡함’이라는 느낌으로 귀결될 때라도 그것의 경로에 있던 규정 불가능한 느낌들은 해소되지 않는 것이다. 시가 지적하듯 “더 이상 밀고 나갈 힘이 없는 未知” 앞이더라도 그러하다. 이때 시는 이미 아는 느낌의 증폭자이면서, 아직 없는 느낌의 발명자가 된다.  
 그러니 언어의 불충분함이 언어의 무력함을 이야기하지 않는다. 불충분함에도 불구하고 그 불충분함에 기대어 쓰는 것이다. ‘착잡함’이라는 느낌의 비규정성이 「착잡하다」라는 시가 태어나는 ‘찢겨진 틈’(※니꼴라 부리요, 『관계의 미학』, 현지연 옮김, 미진사, 2011, 79쪽.)이 된다. 비와 불과 다투고 또 함께 하면서 ‘다른’ 언어가 나타난다. 불과 비 사이에 시가 있는 것이다.    
 
3.  느낌은 그러므로 늘 관계적이다

 
느낌은 전(前)언어적인 것이며 그것이 언어로 표현될 때라도 언어의 비(非)언어적인 잉여가 오히려 느낌의 대부분을 차지한다. 이러한 느낌의 흘러넘침 혹은 주체 이전의 존재감을 언어 안으로 포획하려는 것이 언어화 및 주체화, 즉 분리와 구분의 질서이다. 황혜경의 시에서 주체 역시 이러한 분리와 구분의 질서에 잘려 나가는 존재이다. 그러므로 시인은 “명확한 구분의 결과로 한 모”씩 잘려진 분리의 질서 앞에서 차라리 “부드럽게 무너질 수 있다는 것은 얼마나 매혹적인가”라고 말하며(「두부의 규모」), “모양의 질서가 사라”질 때에도 “함부로 칠하지 않기로” 하자고 말하는 것이다(「채색의 저편」). 그리고 그 이전에 느낌은 스스로의 분리 불가능성을 통해 그러한 구획을 흘러넘치고 있었다.  
 주체나 대상이나 그것이 의미를 가지게 되는 것은 그것과 연결된 외적 요소와의 관계 속에서다. 존재는 명사(名辭)적으로 완결되지 않는 동사(動詞)적인 생성이며, 이 생성은 관계 내에서만 작동한다. 느낌의 영향도 관계적이다. 느낌은 늘 “나로 인한 너의 감정”이고(「다음의 감정」), “한 사람 앞에 앉아 같은 표정을 짓는다면/알게 모르게 어떤 작용이 있었던 게 분명”한 것이다(「영향을 미치는 사람」). 관계의 면(面)을 채우는 느낌은 단절된 것을 넘어 흘러넘침으로써 관계한다. 느낌이 충만해지면 단일한 주체는 물러지며 물러난다. 느낌이 주체를 흐트러뜨리고 바깥으로 내몬다. 바깥에서 관계의 대상과 함께하는 것, 그러므로 느낌은 늘 ‘함께같이’의 지대이다.  
 
 두 사람이 네 사람의 장례를 함께 치르고
 나눠 갖고 난 후에 두 사람은
 정말 내가 당신 같고 당신이 나 같다, 라고 했대
 
 [···]  
 
 나는 함께같이 슬픈 것들과 같이
 나는 생각이 없는 사람보다
 슬픔을 모르는 사람을 나는 더 모르고 싶고
 
- 황혜경, 「슬픔을 모르는 사람」 부분  
 
  ‘나’와 ‘당신’이 느낌을 공유하는 곳이 ‘함께같이’의 지대이다. 그러므로 “내가 당신 같고 당신이 나 같다”라는 것은 ‘나’라는 주체와 ‘당신’이라는 타자가 어느 한쪽에 치우쳐 누군가의 동일성으로 환원되는 것을 뜻하지 않는다. 슬픔으로 차오른 공간 속에선 나의 경계와 당신의 경계가 지워지는 것이다. 비유하자면, 슬픔이라는 물속에 들어 있는 뚜껑이 열린 두 개의 빈 병 되는 것이다. 이 빈 병은 주체적 동일성 이전의 존재로서 느낌으로 차오른 (누구 아닌) 누군가이다. ‘함께같이’의 지대, ‘나’와 ‘당신’의 공동구역 안에서 ‘나’나 ‘당신’은 물러선다. 느낌의 차오름은 주체를 비인칭적이고 전(前)개체적으로 만든다. 김상혁의 시를 예로 들자면, 모욕을 당해 분노로 차오른 ‘그’는 “백인인지 흑인인지 얼마나 좋은 직업을 가졌는지/아침으로 무얼 먹었는지도” 모를뿐더러 그러한 정체성은 무의미해지는 것이다(「조와 점원」). 느낌의 경험은 ‘그’가 누구인지 알려주지 않는다. 작동하는 느낌 속에서 인칭은 사라진다.  
 하지만 여전히 ‘슬픔을 모르는 사람’, 타인과의 슬픔의 공유지대를 거부하는 무감(無感)의 사회가 있다. 시인은 그것이 유감(有感)이다. 다른 시에서 일컬은 것처럼 “괄호 속에 웅크리고 있는” 감정과 주체를 고집하는 것은 ‘병’을 유발할 뿐이다(「다음의 감정」). 그러한 병증을 또 함께 앓으면서도 무감한 사람을 ‘모르고 싶’다는 것은 무감에 대한 또 다른 벽을 만드는 것이 아니다. 시 전체의 질감으로 표현하는 유감은 ‘그’의 벽과 괄호를 두드린다. 그러니 장벽이 너무 두터워 침투가 어려워 보일 때라도 그것을 향해 있는 것, 벽을 감싸고 있는 느낌이 존재한다. 에두아르 글리상트가 쓴 것처럼 “태양의 가장자리에 나무줄기가 생겨나듯”(※Édouard Glissant, Poetics of Relation, trans. Besty Wing, The University of Michigan Press, 1997, p.209.), 관계는 아무 것도 포기하지 않는다.  
 
4. 느낌은 언어(주체) 이전이며 이후이다

 
황혜경(그리고 뒤에 보겠지만 김상혁)은 의인화·인칭화를 통해 느낌을 표현한다. 이때 느낌은 어떤 형상을 가지지만, 이것이 느낌을 주체나 대상으로 구현하기 위한 것은 아니다. 하나의 과정으로써 언어적 형상화는 실물적인 감각을 구성하지만 형상화 자체를 목적하지 않는다. 즉 느낌을 어떠한 주체로 환수하고 환원시키기 위한 것이 아닌 것이다. 오히려 이는 형상적 규정성을 거부하기 위하여, 경계 위를 넘나듦을 실감하기 위한 방법적 차용이다. 이러한 형상들은 보이지 않고 흔적도 남지 않는 흔적들, 흔적의 경로들에 대한 적시(摘示)이다. 형상화된 느낌은 느낌의 정황을 표현하고 언어의 경계를 넘고 다시 차오른다.
 
 의성어와 의태어 사이에서 머뭇거리는 소리의 몸짓, 몸짓의 소리로 존재하게 되는 순간이 있다 남겨지는 것과는 다른 이야기로 버림받는 느낌이 노련하게 한층 더 가혹할 때 결국 고독한 종들은 말이 과다하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는 것을 분명히 느끼고 어떤 면을 맹신하며 밀착을 시도하게 된다 소모적으로
 
 안시리움이라는 식물에서 함께 온도를 느끼던 무렵이었다 시리지 않은 느낌으로 몸의 발성을 설득하면서 내가 아니면 안 된다고 네가 울고 절대 너는 안 된다고 내가 울었다 완성하고자 했던 관계는 포함하려는 문장 쪽에서 늘 발을 빼곤 했으므로 지금 나는 느낌 氏를 믿기로 결심한다 더 늙고 가망 없어질 때까지 추억에 관한 이야기는 하지 않을 것이므로 몸의 부위로 말고 허공의 부위로의 나는 느낌 氏만 절대적으로 믿기로 하고    
 
[···]
 
아기를 낳은 사람과 아기를 낳지 않은 사람으로 여자가 구분 될 때 아직 모르는 느낌에 대하여 침묵할 때 순서를 잃은 날짜들이 저마다 탯줄을 목에 감을 때 구름의 가장자리가 붉은 십자가에 잠깐 찔릴 때 느닷없이 손톱이 부러져 살이 드러날 때도 아픈 나도 느낌 氏를 만나는 것을 좋아한다 잎맥을 바라보다가 간결하거나 간절하다는 것을 알아차리던 그 느낌은 어떻게 표현될 수 있을까 그리하여 시간의 관다발은 기꺼이 내게도 양분의 통로가 되어주고 있음을 느끼기 위해 나는 느낌 氏를 만나러 가려고 길을 나서는데 느낌 氏가 더 일찍 먼저 이쪽으로 출발했다고 한다
 
-황혜경, '느낌 씨가 오고 있다', 부분  
 
  일견, 시의 외형은 버린 사람과 남겨진 사람에 대한 에피소드로 직조되어 있는 듯하다. 하지만 시의 내부를 채우고 있는 것은 언어 이전에 존재하는 소리(또는 실물)와 언어와의 관계, 그리고 느낌에 대한 것이다. 의성어와 의태어는 ‘소리와 몸짓’에 가장 가까운, 그래서 언어 이전의 것을 가장 많이 간직한 언어이다. 의성어는 소리와, 의태어는 몸짓과 한 순간 일치하는 듯하지만, 그것들 사이에는 넘을 수 없는 간극이 있다. 그러므로 이 사이에서의 ‘머뭇거림’은 소리/몸짓과 넘을 수 없는 틈을 둔 언어의 불충분함 때문에 발생한다. 혹은 어떠한 언어도 이미 과언(過言)이기 때문에 발생하는 틈이다. 그 틈을 메우는 것이 면(面)으로써의 느낌이다.  
 마찬가지로 “안시리움이라는 식물”에는 ‘안시리움’이라는 이름(언어)과 안시리움의 실물이 있고, 그 둘이 온전히 합치되는 것은 가끔의 기적 같은 일이다. 그런 때에 ‘함께 온도를 느끼’는 것이 가능하다. 아니, 느낌 안에서는 그것이 가능하다. 하지만 이내 언어와 몸짓의 소리가 완성하고자 했던 관계는 “문장 쪽에서 늘 발을 빼곤 했으므로” 실패한다. 구분의 선들이 존재의 목을 조르고, 존재를 점(點) 안에 가두고, 그러한 점이 붉은 십자가의 침(針)이 되어 구름의 면을 찌르고, 구분의 껍질 같은 손톱이 부러져 살이 드러난다. 불일치 속에서 느낌은 대개 상처이지만, 이러한 감각이 다시 느낌을 조성한다. 느낌은 관계에서의 면(面)이고, 언어와 관계하여 불충분한 느낌은 다시 언어를 요청한다. 다만 새로운 느낌씨의 도래를 기다리는 것이다.  
 ‘느낌씨’는 단일한 주체의 구성이나 고정된 언어 같은 분리와 고립에 대한 반(反)언어, 실은 언어의 이전이며 언어 이후에 도래하는 느낌의 구체화이다. 느낌에 대한 인칭화는 반(反)인칭화를 지향하고 동일한 의미로 느낌에 대한 언어화는 언제나 반(反)언어화를 지향한다. 개체적·주체적 인간화에 대한 반동은 전(前)개체적인 것으로써 느낌의 면(面)적 속성, 그러므로 주체 이전의 공동영역을 구성한다. 나의 몸의 부위가 아닌 허공의 부위, 그러니까 어떤 사이들을 점유하는 ‘느낌씨’에게 자리를 내어주는 것은 언어 이전이자 분리 이전, 주체로서의 몸 이전의 경로인 느낌과 만나는 것이다. 그러므로 위 시는 ‘내’가 그 관계 속에서 느낌에게 자리를 내어주기 직전의 시(詩)다. 느낌씨는 이전부터 있어왔지만 “더 일찍 먼저 이쪽으로 출발”한, 즉 이미 도래하고 있던 것이다.    
 “나의 1초 밖의 영원한 느낌氏”처럼, 언어든 주체든 특정의 대상 a가 아니라 a 바깥의 것을 회복하는 것이 관건이다. 그러므로 “느낌氏가 오고 있”는 시는 느낌의 충만함을 회복할 것을 지향한다. 이때 함께 오는 대항언어의 도래를 기다릴 뿐이다. 이러한 측면에서, 다시 언급하자면, 언어의 불충분함이 언어의 무력함을 의미하지 않는다. ‘느낌氏’의 회복은 언어 그 자체를 가두고 있는 언어적 회복을 의미하기도 한다. 불충분하지만 불충분한 언어의 틈을 안고 쓰는 것이 시-언어이고, 그 불충분함 바깥의 것을 회복하는 계기가 그 결핍과 틈에 있는 것이다. 언어의 불충분함에도 불구하고 “아직 모르는 느낌에 대”해서 침묵하지 않은 증거가 이 시의 전체인 것이다.  
 
5. 주체의 물러남이 느낌의 충만함을 회복한다

 
‘비’(非)와 ‘불’(不)의 속성이 수식으로 붙는 느낌은 그것 자체의 해결 곤란함 때문에 지속적으로 소외되기도 했지만, 느낌을 무언가의 ‘하위’에 놓으면서 비와 불의 곤란함을 가리기도 했다. 느낌은 우선 언어와 의미에 속박되어 있었다. 느낌이 언어적으로 구성되면서 ‘비’와 ‘불’로 밖에 얘기될 수 없는 대개의 것은 버려졌던 것이다. 또한 느낌은 주체에게 종속된 것이었다. 즉 느낌이란, 늘 ‘누군가’의 느낌이었고 ‘누군가’의 배경에서 느낌은 ‘누군가’의 한때의 변화 상태에 대한 수식일 뿐이었다. 누군가에 기인한, 누군가에게 속한 하위의 것이라는 종속성은 특히 느낌의 전달에 있어 난맥의 이유가 된다.  
 
 만일 기쁨을 말한다면 그건 사람의 기쁨이겠지. 기쁜 사람이 매일 찾아가 두 팔로 나무를 안아주었다, 나무는 자라 숲이 되고, 숲은 끝없이 퍼져 해안까지 닿았다. 그렇대도 그것이 나무의 기쁨, 숲의, 바다의 기쁨은 아닌 것이다.
 
 먹는 기쁨, 보는 기쁨, 생각하는 기쁨.
 영혼의 기쁨 같은 건 없다.
 그렇대도 기쁜 영혼 같은 건 있었으면 좋겠다.
 
[···]
 
 그렇대도 기쁜 영혼이 돌아올 수 있는 기쁜 생활 같은 건 있었으면 좋겠다. 부모가 가방에 챙겨준 물건들이 하나둘 망가지는 동안 기쁜 아이는 자라 많은 아이들이 되었다, 그들이 끝없이 퍼져 바다 건너까지 닿았다, 거기서는 기쁜 나무를 심었으면 좋겠다.
 
- 김상혁, '기쁨의 왕' 부분
 
 먹을 때, 볼 때, 생각할 때 등등에 있어 느낌의 종류는 수천이 아니라 수만으로도 부족하다. 느낌에 대한 명명이 특정의 단어로 국한될 경우 경험의 전달은 거의 요원하다. 언어의 불가능성 속에서 느낌의 전달은 정황과 맥락, 시퀀스에 기대어진다. 이러저러할 때의 기쁨, 이러저러할 때의 슬픔 등. “하나의 이미지를 위해서는 둘이어야만 한다”고 고다르가 말했듯, 그것이 ‘기쁨’이나 ‘슬픔’이라는 단어로 환원될 때라도 정황은 느낌의 최소한이다. 관계가 만들어내는 정황이 느낌을 구성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 정황을 주체의 시각이 세계에 투사된 것으로 환원시키는 사유의 습성이 있다. 하지만 ‘누군가’에 예속된 기쁨은 세계와 무관한 그만의 것이다. 그것이 기쁨일 때라도 세계에는 폭력적인 방식으로 작동할 수 있다. 느낌을 주체의 본래적인 것으로 상정한다면, 주체/타자의 위계 속에서 느낌의 일방향적 투사만 남게 된다. 이 주체를 ‘사람’으로 번역해도 동일한 결론이 나온다. “사람의 기쁨이겠지”라고 하는 것은 시인의 세계 진단이나 시인의 바람이 아니다. 주체와 무관할 때, 느낌은 한 개체의 내부가 아니라 그것들 사이에서 발생하는 것이다. 그것이 주체와 연결될 때라도 정황 속에서 관계의 한 끄트머리를 주체가 잡고 있는 것뿐이다. 주체가 먼저인 것이 아니라 관계적 주체가 사후의 흔적으로 생성될 뿐이다.  
 주체가 물러나 있을 경우, 이전과 다른 결과를 예견할 수 있다. 주체가 자리를 비우고 그 자리를 주체도 타자도 아닌 것으로써 ‘나무’, ‘생활’, ‘바다’ 등등과 느낌을 공유하는 것이 기쁨이라는 사태이다. 어떤 주체/타자/대상의 것이 아닌 어떠어떠한 정황의 기쁨이다. 그 맥락 안에서 어떤 주체/타자의 것도 아닌, 단지 관계 내에서 함께 차오르는 어떤 느낌이 가능해진다. 즉 동일성이 물러날 경우에만 가능해지는 ‘함께같이’의 전유이다. 이는 자연을 위시한 세계와의 관계에서는 세계에 대한 인식적 투사가 물러난 자리를 느낌에 채울 때에 가능해지는 것이다. 주체가 스스로를 제 바깥에게 양도할 때, 한 개체의 내부가 아니라 사이에서 발생하는 느낌인 것이다.  
 이러한 측면에서 황혜경의 ‘느낌씨’가 인격화된 주체가 아닌 이유와 유사하게, 김상혁의 ‘기쁨의 왕’은 인칭이 아니라 하나의 사태이다. “사람의 기쁨”이 아니라 기쁨의 사태와 연결된 세계의 기쁨이 편재한다. 왕은 수직적 위계의 최상층에 있는 권력자를 뜻하지 않는다. 왕의 기쁨이 아니다. 기쁨의 왕은 기쁨이 전면적으로 채색된, 가진 게 그것뿐이라 왕이 된 것으로써의 편재성이다. 그 편재성이 왕의 본질일 따름이며 왕좌는 기쁨이 충만하여 주체가 사라지는 자리이다. 관계들이 만드는 사태에게 주체가 양보하는 것, 혹은 카프카의 표현으로 “세계와 너의 싸움에서 세계를 보좌”하는 것이다(※피에르 자위, 『드러내지 않기, 혹은 사라짐의 기술』, 이세진 옮김, 위고, 2017, 21쪽.). 주체가 물러나고 관계가 나선다. 거기서 언어와 주체가 만든 구획을 넘고 그때에야 “나무의 기쁨, 숲의, 바다의 기쁨”과 또 그러한 기쁨과 연결된 세계의 편재하는 기쁨이 이어져 나타난다.  
 
6. 느낌의 전체는 부분의 합과 다르다

 
느낌은 어떤 ‘느낌’이 한 단어로 지칭되는 하나의 항(項)일 때에도 그 바깥의 것과 관계하면서 그 사이를 메우는 사태이며 정황, 지대로써의 느낌이다. 닫힌 주체와 고정된 언어의 항에 균열을 일으키고 관계 속으로 열어젖히는 것이 느낌이 가진 곤란함(‘비’와 ‘불’의 속성)이다. 이것이 항들의 종합인 전체를 열린 회로로 만든다.  
 
 얼음산에서 발굴된 여왕님은 한때는 자신을 지키던 창에 기대어 졸고 있었습죠. 드레스 위로 벗어난 탐스러운 가슴을 몇 번씩 주무르고 나서야 우리는 삐걱거리는 옥좌에 늘어져 있던 그분을 바닥에 눕혔더랍니다.
 
 ······너희는 아는가, 후회하는 자가 아니라,
 영영 후회하는 상태에 사로잡힌 삶에 대해.
 나는 언제부턴가 나의 슬픔과 정원을 기계에 맡기었다.
 매일 밤 머릿속을 구르는 바퀴의 소음이
 성 밖으로 또 한 수레 셀비어를 실어나른다.
 
[·····]
 
 남자들은 여왕님을 마저 벗기지 않고 서로 눈치를 좀 봤습죠. 우리는 여럿인데 여왕님은 한 분뿐이니······ 염병할!
 무슨
 가슴이
 이리
 차갑담!  
- 김상혁, '여왕님의 애인은 누구인가'
 
  위 시는 어조에 있어서 크게 두 가지 항으로 구성되어 있다. 여왕의 목소리로 구성된 항과 남자들의 표현으로 구성된 항이 그것인데 이 둘은 전혀 다른 어조의 충돌 속에서 다른 느낌의 창출을 기다린다. 먼저 여왕의 느낌이 아닌, 느낌의 여왕의 목소리는 주체 이전, 언어 이전의 느낌을 가능하게 하는 주체의 물러남을 보인다. 즉 여왕은 “후회하는 자가 아니라 영영 후회하는 상태에 사로잡힌 삶” 속에 있다. 이러한 사태는 ‘여왕’의 주체적 고정성을 흩뜨리며 오래된 얼음산에 있던 여왕의 존재를 과거의 것이 아니라 현재와 미래적인 것으로 만든다. 여왕이 ‘후회하는 자’였다면, 그러한 정체성을 만들게 된 인과나 후회의 이유 같은 것이 중요해졌을 것이다. 하지만 느낌의 상태는 그러한 과거의 유산이 아닌 시간 속에서 현전하는 사태이다. 그리고 이 ‘후회하는 상태’, ‘이별하는 상태’는 시간의 마모성, 혹은 덧없음과 같은 느낌의 보편성을 만들어낸다.  
 이는 특정 대상, 상황, 인물, 사건을 구축하기 위한 서사가 아니라, 그 각각의 사이에 있는 느낌의 (보이지 않지만 분명히 실존하는) 현존을 전시하기 때문에 가능해지는 것이다. 이는 주체와 언어, 무엇보다 그것에 의한 대상화에 가려진 느낌의 공동성, 편재성을 향한 지향이지 각각의 것들을 새롭게 범주화하기 위한 것이 아니다. 모두에게 공유될 수 있고, 그럼으로써 각각이 그 느낌에 동화되기를 기다리는 뼈대의 한 부분이다.  
 하지만 이러한 부분은 시의 구성의 한 항일 따름이며 이 부분의 구성 역시 전체의 맥락과 관련된 한에서 의미를 지닌다. 즉 그러한 여왕의 사태에 무심한 남자들의 어조로 구성된 항과의 관계 속에서 사태는 다른 전체를 향해 열려진다. 시는 부분들의 집합이 아니라, 부분의 합을 넘어선 전체로써 전달된다. 모든 관계는 그 항들에 외재적이고 질 들뢰즈, 『경험주의와 주체성』, 한정헌·정유경 옮김, 난장, 2012, 197쪽.  
, 이 전체도 언제든 하나의 항이다. 시의 전체 혹은 느낌의 전체란 완결되지 않는 한에서의 전체이며, 그런 한에서 늘 전체주의에 반대하는 전체이다. 뼈대는 열려 있고, 뼈대-이야기의 전달은 그 사이를 미리 작가의 목적이나 의지로 채우지 않고 고정시키지 않는다. 그것은 열려 있는 만큼, 어떤 새롭거나 다른 느낌의 자리를 마련하는 것으로써의 전체다.  
 정황에는 여지가 있지만, 그 여지에 확고함이란 없다. 여지는 다만 만연할 뿐이다. 시편의 전체란 하나의 단어나 하나의 행, 연이 아니라, 그 시를 구성하는 배치와 행간을 포함한다. 이야기는 마르고 닳아서 뼈대 같은 이야기만 남더라도 다음의 느낌, 혹은 다음의 이야기를 위한 부식토로 남겨진다. 느낌은 정황 안에서 재창조로 번지고 그것의 표기로는 불충분한 다른 느낌이 발명되길 기다리는 것이 시의 행보이다. 그러므로 이야기의 전달을 믿지만 이전의 것과 동일하기를 믿을 수는 없는 것이 시가 고투하는 지점이다. 전체로써의 하나의 항은 그 내부적 항과 마찬가지로 열려 있다. 이야기에 내재한 외재의 영역은 늘 남아 있다. 그러므로 닫힌 주체나 고정된 언어라기보다 열려 있는 단서이자 정황으로써의 이야기만 남을 경우, 어떤 발신자-주체의 의도 전달에 목적을 두지 않는 한에서 이야기는 실패하지 않는다. 선제조건이 없으므로 또한 완결을 상정하지 않으므로 실패는 없다. 이야기는 (느낌의 곤란함을 안은 채 열린) 이야기를 통해 (닫힌) 이야기에 저항한다. 이야기는 관계를 구성하는 최소한의 경로로써, 그 지대를 채우는 느낌이 무엇이 될지는 아직 알지 못한다. 혹은 황혜경의 표현에 따라, 이미 어떤 느낌씨가 도래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7. 느낌의 곤란함과 함께하기  

 
느낌은 보이지 않지만 분명히 경험되는 것이다. 또 느낌은 특정한 언어로 완전히 포획하기 불가능하지만 그 불가능을 통해 존재한다. 느낌은 관계를 채우는 적분으로 구성되지만, 언어와 관련해서 이는 그 분리 불가능한 것으로부터 삐져나옴으로써 제 존재를 드러낸다. 비규정적이고 불충분한 그것을 상상하게 하는 힘은 역설적으로 그 불가능성으로부터 비롯된다. 그러니 여전히 언어는 불충분함에도 불구하고, 분리와 구분으로 “조각난 팔과 다리, 터지고 일그러진 얼굴에 대한 말이 꼭 필요”한 것처럼(김상혁, 「어떤」). 언어가 비와 불의 곤란함 끝내 놓지 않는 것이 필요하다. “즐겁다, 라고 말해버리고 나면 즐겁지 않을 것 같”아서(황혜경, 「두려움의 근거」), ‘즐겁다’라는 단어와 그렇지 않을 것 같음 사이의 미묘함을, “삶과 유령 사이에 있”는(김상혁, 「나의 여름 속을 걷는 사람에게」) 불가능성을 상상하게 하는 것도 언어를 경유해서 가능해지는 지점이다. 이는 제 스스로의 가능 세계를 위해 불가능의 세계를 지워온 언어와 주체의 습관적 지향과 상식을 위반하고 그 바깥에서 느낌의 불가능한 공동 구역을 환기함으로써 가능해진다. 혹은 이러한 불일치의 장소로부터 느낌과 언어와 주체의 새로운 영역이 확장된다.  
 2000년대 이후 한국시의 시적 흐름에서 주체의 미분화는 타자와 함께하기 위한 지향이면서, 사회 체제 내에서 위태로워진 존재들의 사회적 자리의 소실에 대한 진단이었다. 또한 역설적으로 또한 이전 세대 동안 비대해진 주체의 자의식으로 인해 오히려 고립된 개인들에 대한 독해이기도 했다. 황혜경과 김상혁의 ‘느낌’의 전면화는 이러한 지향 및 진단과 함께하면서도 주체의 위치를 중점화하는 것이 아니라, 바깥들을 사유함으로써 각각의 관련성을 문제시하며 다른 각도의 시적 접근을 한다. ‘느낌’을 인칭으로 대상화시킬 수밖에 없었지만, 그것은 그 대상과 대상을 만든 경계를 넘어서기 위한 것이다. 직접적인 터치(touch, 마음을 울리다, 라는 의미를 포함하여)가 부재한 고립된 개인들의 세계에서, 주체의 물러남은 느낌이 보유하고 있던 모든 것을 느낌에게 되돌려주려는 표기이다. 즉 주체에 부역하는 사자(使者)로서의 ‘느낌씨’가 아니라, 느낌이 가진 비와 불과 다투지 않고 그것의 곤란함과 함께하기인 것이다. 그러므로 이런 말을 할 수 있을 것이다. 느낌의 왕이시여, 나의 바깥이 나의 전부입니다. 
문학평론 당선 소감
과메기는 원래 청어로 만들어졌다. 청어 포획량이 줄고 가격이 올라가면서 꽁치가 과메기의 주재료가 되었다. 그래서 청어 과메기를 두고 사람들이 흔히 하는 착각이 있다. 청어 과메기가 원조이고 더 비싸니, 으레 청어 과메기가 더 맛있을 거라는 생각이다. 하지만 꽁치 과메기가 맛이 없었다면, 단순히 덜 비싼 게 전부였다면, 꽁치가 대중적으로 소비되지 못했을 것이다. ‘원조’와 ‘가격’이 맛에 대한 판단에 있어 하나의 좌표가 될 수 있겠지만 그게 기준이 될 필요는 없다. 꽁치에는 꽁치의 맛이 있다.  

 
 이런 이야기는 아버지께 들었다. 그리고 평론과 당선을 생각하면 이런 기억부터 떠오르는 것이다. 맥락은 비문학, 기름 냄새, 판단의 기준 등 여러 층위로 확장될 수 있을 것이다. 적지 않은 책을 읽어왔다고 생각하지만, 그것을 소화하는 토대에는 부모님께 보고 듣고 배운 저런 기억들이 있다.    
 
 부모님께 먼저 감사의 인사를 전한다. 그리고 문학에 있어 줄기가 되어주신 고(故) 장시기 선생님과, 김춘식, 박형준 선생님께, 부족한 글을 두고 고심하셨을 심진경, 조재룡 심사위윈님께, 마지막으로 늘 내게 예민한 감각이 되어주는 경(鯨)에게, 마음을 담아 감사의 마음을 전한다.
 
◇정기석=1982년 포항 출생. 동국대 국문과 박사과정 수료

문학평론 심사평
이번 2018 중앙신인문학상 문학평론 부문에 응모한 작품은 총 26편이다. 이번 응모작들은 모두 어느 정도 고른 수준을 갖추고 있었으나 그럼에도 월등히 돋보이는 작품은 눈에 띄지 않았다. 비평 대상의 선정에서도 이제 막 책 한두 권 정도를 낸 신인 작가들의 작품에 편중된 경향을 보였다. 무엇보다 아쉬웠던 것은 텍스트뿐만 아니라 텍스트를 둘러싼 사회적 조건이나 환경, 문학사적 맥락에 대한 총체적인 비평적 시야를 갖춘 응모작을 찾기 힘들었다는 점이다. 비평이란 물론 텍스트에 대한 정밀한 분석이 기본이지만, 그것이 의미 있는 비평적 성과로 이어지기 위해서는 텍스트가 놓여 있는 자리를 두루 살피는 안목과 감각이 필요하다.  

 
 본심에 올라온 작품은 ‘공간과 시간에서 떠도는 주체들’, ‘잔여된 자를 바라보기’, ‘일상의 형식, 은폐된 진실과 마주하기’, ‘느낌의 곤란함에 대한 몇 가지 명제’, 이렇게 네 편이다. 이 중 처음 두 편은 신해옥과 김금희에 대한 작가론인데, 이 두 글은 작품을 관통하는 주제의식 내지는 시대의식에 대한 이해가 부족해서 아쉬움을 남겼다. 마지막까지 고민했던 것은 뒤의 두 편이다. 이 글들은 모두 자기 나름의 비평적 자의식과 해석적 언어를 갖추고 있었다. 우리는 그중 김상혁과 황혜경의 시를 다룬 ‘느낌의 곤란함에 대한 몇 가지 명제’를 당선작으로 결정했다. 당선작은 언어의 ‘불능성’과 재현의 한계를 ‘느낌’의 작동방식에 대한 고민을 통해 드러낸 글이다. 다소 소박하다 해도 우리는 문학에 대한 본질적인 접근을 향해 돌진하는 이 응모자의 기본기를 믿어보기로 했다. 당선을 축하한다.
 
◇예·본심 심사위원=심진경·조재룡(대표집필 심진경)  
 
문학평론 본심 진출작(4편)

-박수호 '잔여된 자를 바라보기-김금희론'  

-이혜리 '공간과 시간에서 떠도는 주체들-신해욱론'  

-정기석 '느낌의 곤란함에 대한 몇 가지 명제-김상혁과 황혜경의 시를 중심으로'

-황금하 '일상의 형식, 은폐된 진실과 마주하기-최정화, 김금희 소설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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