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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훈의 퍼스펙티브] 한국도 포퓰리즘 청정지역 아니다

중앙일보 2018.09.20 00:03 종합 26면 지면보기
포퓰리즘 해부
여야 구분 없는 정치인들의 무책임한 질주는 마침내 현대판 그리스 비극으로 이어졌다. 평생을 고집스레 성실하게 살아온 77세의 디미트리스크리스툴라스는 민주주의 전당이라는 아테네 국회의사당 앞에서 권총을 자기 머리에 갖다 댄 채 절규하였다. “35년 동안 연금을 부었지만, 국가는 나의 모든 생존의 길을 막아버렸다…. 쓰레기통을 뒤지며 연명하는 것을 거부하는 나는 자살 이외에 존엄성을 지킬 방법을 알지 못한다.”

지구촌 휩쓰는 포퓰리즘은
시민의 분노를 자양분으로 삼아
트럼프·에르도안 등 포퓰리스트
‘국민’ 앞세워 정치 엘리트 공격

국내 불만이 대북 적대감 만날 때
이성적 남북 문제 해법 공격하는
반북 포퓰리즘 등장할 수 있어

여야는 상호주의·유연성 갖추고
초당파적 대북 접근 견지해야

 
약사 출신의 평범한 은퇴자의 자살은 무책임한 정치, 방만한 국가 재정의 붕괴, 긴축을 강요당한 연금 생활자의 집단 자살로 이어진 2010년대 그리스 비극의 시작이었다. 무책임하고 무능한 정치가 잉태했던 이 비극은 결국 그리스 포퓰리즘 정치의 폭발로 이어졌다. 기존 정치 엘리트의 실패를 공격하면서 은행 국유화, 유럽연합(EU)과의 각서 파기 같은 파격적 공약을 내건 시리자는 2015년 1월 36%의 득표율로 의회를 장악하였다.
 
굳이 그리스 사례를 꼽지 않더라도 오늘날 포퓰리즘은 전 세계 민주정치를 위협하고 있다. 포퓰리즘이 1930년대 대공황 수준의 청년 실업과 파탄 나버린 국가 재정으로 고통받는 남부 유럽만을 강타한 것이 아니다. 포퓰리즘은 영국을 EU로부터 떼어 놓으며 EU를 혼란 속으로 몰아넣었다. 마침내는 미국 백악관을 장악하고 글로벌 무역 전쟁을 불러오는 중이다.
 
세계가 포퓰리즘으로 물들고 있는 지금, 우리는 포퓰리즘 청정국가로 잘 버텨낼 수 있을까? 우리는 포퓰리즘 유혹을 물리치고 다원주의와 법치, 자유와 관용이 살아 숨 쉬는 민주정치를 지켜낼 수 있을까? 지난 정부의 대통령에 대한 탄핵이 절차와 제도를 거쳐 이뤄지면서 세계적으로 한국 민주주의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어왔지만, 과연 우리는 포퓰리즘 청정국가로서 충분히 건강한가?
 
 
분노는 포퓰리즘의 자양분
 
[그래픽=김영옥 기자 yesok@joongang.co.kr]

[그래픽=김영옥 기자 yesok@joongang.co.kr]

포퓰리즘은 그 뿌리나 증상이 다양한 만큼 1.포퓰리즘의 경제 사회적, 정치적 배경을 검토하고, 2.포퓰리즘이 민주정치를 위협하는 양상들을 미국의 트럼프와 기타 사례를 통해서 검토하며, 3.한국에서 포퓰리즘이 민주정치를 공격할 만한 약한 고리로서 반북 포퓰리즘의 잠재적 위험을 살펴보려 한다.
 
미국의 트럼프, 베네수엘라의 차베스, 터키의 에르도안, 이들의 공통점은 무엇일까? 이들 정치인의 공통점을 추적하면 복잡하고 다양하게 나타나는 포퓰리즘 정치의 본질이 드러난다. 트럼프 대통령을 지지하는 백인 노동자 계급, 차베스 대통령을 지지했던 노동자, 도시 빈민의 열망 이면에는 분노가 자리 잡고 있었다. 심화하는 경제 격차에 대한 분노, 희망이 사라지고 출구도 막혀버린 삶에 대한 분노, 그리고 이를 정치적으로 동원하는 정치인들이 만날 때 포퓰리즘이 시작된다. 따라서 포퓰리즘의 첫 번째 요소는 분노이다.
 
이 분노는 먼저 기성 정치 엘리트에게 향한다. 분노한 시민들은 경제 양극화와 빈곤의 심화와 같은 문제의 일차 주범으로 기성 정치의 실패를 꼽는다. 시민의 삶에서 희망은 사라지고 많은 젊은이와 빈곤층이 절벽에 서 있지만, 의회와 행정부를 장악한 정치 엘리트는 당파 싸움에 여념이 없다고 보는 것이다.
 
그리스의 분노한 시민들은 국가 재정이 파탄 지경에 이른 데에는 공무원 연금, 교사 연금을 무분별하게 늘려온 보수와 진보 정치의 근시안적인 싸움이 있었다고 본다. 시민들의 삶은 절벽에 서 있는데 정치 엘리트는 여전히 높은 연봉과 막대한 특권을 손에 쥔 채 당파 싸움만 일삼는다는 분노가 포퓰리즘의 두 번째 요소다.
 
 
‘국민의 이름으로’ 반대자 탄압
 
셋째, 경제·사회적 분노와 정치 엘리트에 대한 분노는 이를 정치적으로 이용하는 포퓰리스트 지도자를 중심으로 결속한다. 트럼프·에르도안·후지모리·차베스 등 포퓰리스트 지도자들은 종종 부패하고 도덕성이 망가진 엘리트들에게 대항해서 순수하고 완벽한 시민들이 정치를 직접 바로잡아야 한다고 부추긴다.
 
한편으로 시민의 순수함과 고상함을 강조하지만, 이들의 정치 전략은 민주주의에 대한 중대 위협을 가하면서 힘을 얻는다. 예를 들어 2016년 미국 대통령 선거 기간에 트럼프 후보는 “그녀를 감옥으로 보내자(Lock her up)”라는 선동적인 구호를 구사하곤 하였다. 상대 후보인 민주당의 힐러리 클린턴 후보가 금융산업과 결탁한 부패한 후보이고, 이메일 스캔들에서도 보듯이 애국심도 의심스러우니, 선거가 자신들의 승리로 끝나면 그녀를 감옥으로 보내자는 선동을 서슴지 않았다. 이는 정치적 반대자에 대한 탄압과 억압을 “위대한 국민의 이름으로” 행하자는 섬뜩한 구호이다. 달리 말해 민주주의 심장이라고 할 다원주의에 대한 끔찍한 종지부인 셈이다.
 
포퓰리스트 지도자들이 민주정치를 위협하는 방식은 다양하다. 『민주주의는 어떻게 죽어가는가(How Democracies Die)』라는 충격적 제목의 저서에서 하버드 대학 레비츠키·지블라트 두 교수는 포퓰리스트 지도자들이 민주주의를 공격하는 세 가지 전략을 요약해서 보여준다.
 
 
포퓰리스트는 사법부와 언론 장악 노려
 
첫째, 포퓰리스트 지도자들은 사법부의 포획을 시도한다는 것이다. 러시아 정보기관의 2016년 미국 대선 개입 의혹 사건을 수사하던 코미 미 연방수사국(FBI) 국장과 트럼프 대통령의 갈등에서 보듯, 포퓰리스트 지도자는 판사, 수사기관, 공직윤리 담당기관에 대한 압박을 예사로 삼는다. 트럼프 대통령은 코미가 이끄는 FBI 수사가 조여 오자, 그에게 암묵적 압력을 시도하였다. 하지만 압력이 실패하자 코미를 전격적으로 해임함으로써 미국 전체를 경악과 충격으로 몰아넣었다.
 
그뿐만 아니라 잠재적 테러 위협이 많은 국가에서 미국으로의 여행을 대폭 제한하라는 대통령의 여행 금지 조치를 제임스 로바트 제9항소법원 판사가 무효로 하자, 트럼프 대통령은 로바트 판사에게 공개적인 모욕과 비판을 가한 사건 역시 사법부 포획 시도의 사례였다.
 
둘째, 포퓰리스트 지도자들은 주류 미디어뿐 아니라 자신들의 선동 정치를 가로막는 시민단체·이익단체에 대한 직접적 위협을 수시로 행사한다. 트럼프 대통령은 자신의 기이한 행동과 대통령으로서의 부적절한 언행을 신랄하게 비판해온 뉴욕타임스와 CNN방송에 대해 가짜 뉴스를 양산하는 엉터리라는 비난을 기회 있을 때마다 퍼붓는다.
 
셋째, 포퓰리스트 지도자들은 민주정치의 기본 절차와 상식을 허무는 것도 주저하지 않는다. 예를 들면 트럼프 대통령은 자신이 명령한 불법 이민자에 대한 단속 활동에 비협조적인 도시들에 대해 연방정부의 지원금을 당장 삭감하겠다고 위협한 바 있다. 이러한 위협은 연방정부와 지방정부 간 업무 분장에 관한 미국 헌법과 관습을 전면적으로 공격하는 것이었다.
 
한마디로 말하자면 포퓰리즘은 민주주의라는 몸체가 취약해지면 어김없이 등장하는 바이러스와 같다. 민주주의를 숙주로 해서 자라나지만, 그 민주주의를 곳곳에서 갉아먹으며 본체의 건강을 위협하는 치명적 바이러스인 셈이다.
 
지금까지 한국 정치에서 포퓰리즘이라는 말은 주로 팽창하기 시작하는 복지 예산을 비판할 때 주로 사용되어왔다. 복지비의 증가 속도가 너무 빠르다거나 혹은 복지 예산은 그 본연의 역할을 제대로 하는가 비판하면서 보수는 진보 정부에 대해 복지 포퓰리즘의 딱지를 붙여왔다.
 
하지만 우리가 지금까지 위에서 살펴본바 같이, 포퓰리즘은 사실 정부의 선심성·방만 예산보다는 훨씬 심각하고 다양한 증세를 동반하는 민주주의에 대한 근본적 공격이다. 현대의 그리스 비극에서 보듯 선심성 예산이 포퓰리즘이라는 재앙으로 가는 디딤돌일 수 있지만, 이는 포퓰리즘의 작은 부분에 지나지 않는다.
 
 
쉬운 해법 내놓는 반북 포퓰리즘 경계해야
 
보다 치명적인 것은 우리 사회의 경제·사회적 추락과 이질적인 북한 사회에 대한 적대감이 만날 때다. 청년 실업과 노년 빈곤의 피폐함이 넘쳐 흐를 때 잠재적 포퓰리스트들은 “순수한 우리 국민과, 우리의 지원을 받으면서도 위협을 일삼는 그들”을 구분하고 분노와 적대감을 과장하려 것이다. 정부의 대북·비핵화 정책에 대한 비판과, 정치적으로 포장된 적대감은 구분되어야 한다.
 
트럼프가 동원하는 백인 노동자들이 관용·공존이라는 오랜 민주적 습성을 벗어던지고 소수자와 여성에 대한 공격을 서슴지 않듯, 우리 사회의 약자들이 경제적 분노(르쌍티망)의 대상으로 북한을 지목할 가능성이 없다고 할 수 없다. 자유와 인권이 무너진 망가진 체제이면서도, 우리에게 실존적 위협을 가하는 북한이라는 존재는 분노의 대상으로 동원될 위험을 안고 있다.
 
이러한 대북 분노는 비핵화와 경제 협력, 민족 문제와 동북아 권력관계가 복잡하게 꼬여있는 남북문제를 자신은 단번에 해결할 수 있다는 비현실적 주장으로 이어질 수 있다. 현실에는 존재하지 않는 마법의 해법이 분노한 사람들의 지지를 모으는 순간, 반북 포퓰리즘은 기성 정치엘리트들을 (보수와 진보를 두루 막론하고) 북핵 문제와 남북문제를 악화시켜 온 장본인으로 몰아갈 것이다. 반북 포퓰리즘은 또 남북문제를 어떻게든 대화와 제재, 강온 전략의 조합으로 풀어가야 한다는 이성적 목소리를 공격하고 억압하려 할 것이다. 한 마디로 북한 핵이 평화와 공존을 위협하는 오래된 폭탄이라면 홀연히 나타날 수 있는 반북 포퓰리즘은 미래의 위험이다.
 
정부와 보수 야당이 대화와 제재의 병행, 엄격한 상호주의와 유연성을 두루 포용하는 초당파적 대북 접근을 견지해야만 대북 적대감이 포퓰리즘에게 이용당하는 위험을 막을 수 있다.  
 
장훈 본사 칼럼니스트·중앙대 정치국제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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