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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트북을 열며] 공무원이 민간 성금을 세금처럼 거머쥔다면

중앙일보 2018.09.17 00:31 종합 34면 지면보기
박태희 내셔널 기자

박태희 내셔널 기자

“당신은 대단히 행복한 나라에 살고 있다.”
 
한국인이 듣는다면 귀를 의심할 말이다. 더구나 복지 선진국 프랑스인의 입에서 나왔다면 제정신인가 싶을 게다.
 
2005년 프랑스에서 열린 학술회의에서 프랑스 재해의연금 관리 담당자가 국제위기관리학회장인 이재은 충북대 교수에게 실제 이렇게 말했다. 나라별 재해구호 방식을 비교하던 중 나온 얘기였다. 프랑스에서는 한때 국가적 재난 시 국민이 자발적으로 내는 의연금을 누구나 모집할 수 있게 했다. 그러자 전국에서 2000여 개 기관이 난립했다. 얼마를 모았는지, 어디에 썼는지 알 수 없는 지경이 됐다. 결국 모금액 기준 상위 50% 기관들이 자발적으로 모여 협회를 만들고 배분 창구를 일원화하면서 투명성과 효율성을 높였다. 이런 사례 발표에 “한국은 이미 민간단체(전국재해구호협회·재협)가 창구가 돼, 정부의 관리·감독하에 성금을 모으고 집행한다”고 하자 프랑스 교수가 이렇게 반응한 것이다.
 
최근 행안부가 20명으로 구성된 재협 배분위원회를 장관 추천 인사로 10명까지 채우려 나서 논란이 일고 있다(본지 2018년 9월 12일자 20면). 행안부는 재해구호법 개정안을 내면서 ‘목적어 없이 주어만 두 개 있는’ 희한한 문장을 넣었다. ‘배분위원장은 재해구호협회의 장이 되고…’라는 표현이다. 행안부가 보낸 사람으로 배분위를 채운 뒤 협회장 직마저 차지하려 한다는 비판도 그래서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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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의 성금을 모으고 집행하는 일에 정부가 눈독을 들인 역사는 오래됐다. 소방방재청 지휘를 받던 13년 전에도 방재청은 재협을 산하기관에 편입시키려 했다. 재협 사무총장 자리를 퇴임 공무원들이 가도록 법 개정에 나섰다가 무산된 적도 있다.
 
지난해 행안부로 소관 부처가 바뀌자마자 행안부는 재협을 공공기관으로 지정해 산하기관으로 두려 했다. ‘민간 성금을 공무원들이 세금처럼 주무르려 한다’는 비판 때문에 무산되자 이번에는 배분위원회 장악을 시도하고 있다. 시민단체 사이엔 “다른 부처에 비해 산하기관이 별로 없어, 퇴직 이후 갈 곳이 별로 없는 행안부 관리들이 자리 만들기에 나선 것”이라는 시각이 팽배하다.
 
재난은 언제 어디서 어떤 규모로 닥쳐올지 모른다. 성금 모금과 집행은 신속성이 생명이다. 미국·일본 등 선진국들이 이 일을 민간단체에 맡기는 이유다. 세금처럼 미리 정해진 목적에, 경직되게 활용해선 효율성이 떨어진다. 퇴임 공무원 자리보다, 긴급 구호가 필요한 사람의 입장에서 접근해야 하는 문제다.
 
성금을 세금처럼 관리들이 거머쥐는 때가 오면 우린 “당신은 대단히 불행한 나라에 살고 있다”는, 가뜩이나 익숙한 그 말을 또 듣게 될지 모른다.
 
박태희 내셔널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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