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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사업가,교육자 였던 '음식디미방' 쓴 만석꾼 며느리

중앙일보 2018.09.15 13:00
[더,오래] 송의호의 온고지신 우리문화(31)
「음식디미방」의 표지(오른쪽)와 본문 중 면병류편. 표지엔 '규곤시의방'으로 적혀 있다. [사진제공 영양군]

「음식디미방」의 표지(오른쪽)와 본문 중 면병류편. 표지엔 '규곤시의방'으로 적혀 있다. [사진제공 영양군]

 
『음식디미방』은 한글로 쓰인 가장 오래된 조리서다. 17세기 중엽 조상들이 무엇을 어떻게 만들어 먹었는지 식생활을 짐작할 수 있는 책이다. 책을 쓴 사람은 본명이 장계향(張桂香·1598∼1680)인 정부인 안동 장씨다. 경북 영덕의 재령 이씨 만석꾼 집 며느리가 된 뒤 일곱 아들을 하나같이 대학자로 키운 어머니다. 셋째 아들이 퇴계 이황의 학통을 정통으로 계승한 갈암 이현일이다. 갈암이 이조판서를 지내 안동 장씨는 정부인으로 불린다.
 
2013년 박대성 화백이 그린 정부인 안동 장씨 초상화. 대한민국 정부 표준영정 제91호로 지정되어 있다. [사진제공 영양군]

2013년 박대성 화백이 그린 정부인 안동 장씨 초상화. 대한민국 정부 표준영정 제91호로 지정되어 있다. [사진제공 영양군]

 
정부인 안동 장씨는 식품 전문가이자 교육자이면서 배고픈 유랑민을 구휼한 사회사업가다. 남편인 석계 이시명과 함께 영양군 석보면 두들마을을 처음 열었다. 입향조다. 소설가 이문열이 후손이다. 이곳에 문화체험교육원이 새로 문을 열어 상반기에만 전국에서 6000여 명이 찾았다.
 
출가외인임에도 혼자 된 친정아버지 재혼시켜 
경북 영양군 석보면 두들마을 '문화체험교육원'에 마련된 정부인 안동 장 씨의 유물전시관. '실기'를 새긴 목판과 글씨가 보인다. [사진 송의호]

경북 영양군 석보면 두들마을 '문화체험교육원'에 마련된 정부인 안동 장 씨의 유물전시관. '실기'를 새긴 목판과 글씨가 보인다. [사진 송의호]

 
영양군이 그를 재조명하면서 시대를 앞서간 일화가 알려지고 있다. 그중 하나가 시집간 딸이 혼자 된 아버지를 재혼시킨 이야기다. 아들 갈암이 ‘정부인안동장씨실기(貞夫人安東張氏實紀)’에 남겼다. 정부인의 아버지 경당(敬堂) 장흥효(張興孝)도 퇴계 학통을 이었다. 그 실기에 이렇게 적혀 있다.
 

…어머니께서는 우리 집으로 시집오신 뒤 해마다 한 번 친정으로 돌아가 부모님 안부를 살피셨다. 이미 시집을 왔다는 이유로 부모님 두 분만 계시는 친정 일에 소홀한 적이 없었다. 어머니께서 시집온 지 7년 뒤 외할머니가 세상을 떠나셨다….

 
부인을 잃은 경당은 예순 살에 대를 이을 아들이 없었다. 시집간 딸은 본래 무남독녀였다. 그러자 정부인은 남편 석계에게 부탁한다. 어머니 삼년상이 끝날 때까지만 친정에 머물면서 아버지를 봉양하고 중요한 일을 할 수 있도록 도와 달라는 것이다. 석계는 동의했다.
 
정부인은 1년 뒤 어머니 소상을 마치자 아버지가 두 번째 부인을 들이도록 주선했다. 용케 재혼이 성사된다. 정부인은 계모가 사내 동생 하나를 낳을 때까지 계모를 돕고 삼년상을 마친 뒤 시집으로 돌아왔다. 친정아버지는 예순 살을 훨씬 넘긴 나이에 아들 셋에 딸 하나를 두었다. 경당이 세상을 떠날 때 맏아들 나이가 겨우 여덟 살이었다. 시집간 무남독녀가 출가외인이란 관습을 뛰어넘어 사람 도리를 우선한 것이다. 안동 장씨 경당 가문은 이렇게 이어졌다.
 
친정아버지 세상 뜬 후 계모와 자식들 시댁으로 데려와
두들마을 문화체험교육원에 새로 들어선 정부인 안동 장 씨의 추모관인 '의현당' 최근에 새로 붙여진 당호다. [사진 송의호]

두들마을 문화체험교육원에 새로 들어선 정부인 안동 장 씨의 추모관인 '의현당' 최근에 새로 붙여진 당호다. [사진 송의호]

 
정부인은 다시 남편에게 아뢰어 친정 큰동생을 시댁으로 데려와 기르고 가르쳤다. 그 뒤에는 가난하게 사는 계모를 맞이해 왔다. 정부인은 나머지 아우들도 모두 데려와 따로 집을 지어 친정 식구들까지 살도록 보살폈다. 갈암은 “어머니는 아버지와 60년 가까이 사는 동안 손님을 대접하듯 공경했으며 무슨 일이든지 남편에게 미리 아뢰어 승낙을 받은 다음 실천하셨다”고 적었다.
 
사람의 도리를 실천하는 좋은 일도 남편이나 시집의 동의를 먼저 구한 것이다. 가화만사성(家和萬事成)이다. 그래서 갈암은 “세상 사람들이 아버지 의리를 훌륭하게 여기면서 어머니의 효성 또한 칭찬했다”고 덧붙였다. 정부인 안동 장씨의 처신은 400년이 지난 오늘에도 귀담아들을 부분이 적지 않다.
 
송의호 대구한의대 교수, 중앙일보 객원기자 yeeho1219@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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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의호 송의호 대구한의대 교수ㆍ중앙일보 객원기자 필진

[송의호의 온고지신 우리문화] 은퇴하면 많은 일이 기다리고 있다. 그중에는 문중 일도 있다. 회갑을 지나면 가장을 넘어 누구나 한 집안의 어른이자 문중을 이끄는 역할을 준다. 바쁜 현직에 매이느라 한동안 밀쳐 둔 우리 것, 우리 문화에 대한 관심을 가져 보려고 한다. 우리의 근본부터 전통문화, 관혼상제 등에 담긴 아름다운 정신, 잘못 알고 있는 상식 등을 그때그때 사례별로 정리할 예정이다. 또 영국의 신사, 일본의 사무라이에 견줄 만한 우리 문화의 정수인 선비의 정신세계와 그들의 삶을 한 사람씩 들여다보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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