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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벽화' 대신 '사람' 사는 동피랑을 꿈꾸며

중앙선데이 2018.09.15 02:00 601호 34면 지면보기
일러스트레이터 밥장의 통영놀이 
너무 뜨거운 여름과 힘센 태풍을 보낸 통영에도 가을 바람이 불어온다. 한 손에 꿀빵, 한 손에 생선 담은 스티로폼 박스를 든 관광객으로 넘쳐나던 강구안은 다시 한적한 작은 포구로 되돌아온다. 올해 남은 마지막 대목인 추석이 올 때까지 강구안은 오롯이 가을과 통영사람들 차지다.  
 
강구안 뒤편 언덕인 동피랑에 오르면 포구가 한눈에 내려다보인다. 낮과 밤이 교대하는 ‘개와 늑대의 시간’이 길어질수록 배들과 바다와 동그란 섬들은 붉은 노을과 반짝이는 윤슬 속에 아련한 정취를 뿜어낸다. 그럴 때는 큰 창이 딸린 테이블에서 카페 라떼를 홀짝거리는 것보다 구판장 어르신이 커피·설탕·‘프림’을 황금 비율로 타준 다방 커피가 더욱 당긴다. 
 
동피랑은 동쪽 언덕이란 뜻으로, 조선시대 통제영이 있을 당시엔 망루였던 동포루(東砲樓)가 있었다. 간척사업을 하기 전이라 바다는 훨씬 가까웠다. 일제 강점기에 항구 노동자들이 모여들면서 이곳은 가난한 사람들이 사는 달동네가 되었다. 바다로 남편을 보낸 아내는 배가 돌아올 때면 동피랑 꼭대기에 올라 어떤 색 깃발이 나부끼는지 가는 눈을 뜨며 지켜보았다. 하얀 깃발이면 너나 할 것 없이 포구로 달려나갔다. 사고가 났다는 뜻이었으니까.  
 
2000년 대에 들어 통영시는 낙후된 달동네를 없애고 동포루를 되살려 공원을 만들 계획을 세웠다. 가난한 마을 사람들은 동네를 떠나야할 처지가 되었다. 그런데 한 시민단체가 나서서 ‘달동네도 아름답다’ ‘매끈한 관광지보다 삶이 남아있는 동네’를 꿈꾸며 공공미술 프로젝트를 시작했다. 2007년 벽화 공모전을 열어 골목 곳곳에 벽화를 그렸다. 그 뒤로 입소문을 타면서 동피랑은 벽화마을로 유명해졌다. 덕분에 동포루 복원에 필요한 꼭대기 집 3채만 헐렸고, 마을 사람들은 동피랑을 떠나지 않아도 되었다. 여기까지가 우리가 알고 있는 동피랑에 관한 어여쁜 도시 전설이다.    
 
그런데 이후 동피랑은 어떻게 되었을까?  
 
벽화를 보러 전국에서 관광객이 몰리다 보니 동네는 금세 관광지가 되었다. 월세는 하루가 다르게 치솟았다. 작가들이 머무는 공간과 주민 스스로 먹고사는 공판장도 만들었지만, 동네를 지키는 데는 역부족이었다. 결국 마을 사람들이 하나둘 떠나고 그 자리는 카페와 레스토랑, 기념품 가게로 채워졌다.  
 
다른 지자체들은 동피랑 벽화 마을 성공(?) 사례를 본받아 앞다투어 제2, 제3의 벽화마을을 만들었다. 삶이 남아 있는 동네를 꿈꾸며 시작되었지만 벽화는 어느새 명소 만들기 수단으로 바뀌었다.  
 
오는 10월 5일까지 동피랑 벽화축제가 열린다. 2년마다 한 번씩 열리는데, 올해는 작가·동아리·학교 등 전국에서 121개 팀이 신청했고 심사를 거쳐 74개 팀이 참가한다. 120여 개의 벽화 중 88개가 새로운 작품으로 바뀐다. 
 
하지만 축제가 계속되려면 벽화에 대한 태도도 바뀌어야 하지 않을까 싶다. 비전문가들에게 맡기는 방식에서 벗어나 국내외 최고 작가들을 감독으로 초청해 동피랑 전체를 하나의 오브제로 새롭게 해석해보면 어떨까. 아니, 좀 더 나아가 벽화를 모두 지우고 사람 사는 동네였던 동피랑을 다시 보여주면 어떨까.  
 
문제가 생기면 아예 전원을 끄거나 포맷을 새로 하는 게 가장 효과적일 수 있다. 초대작가로 참여하는 나는 벽화를 지우고 하얀 벽만 남길 생각이다. 사람이 살았던 동피랑, 벽화 없는 벽화 축제를 나혼자라도 꿈꿔보려고 한다. 
 
작가ㆍ일러스트레이터ㆍ여행가. 회사원을 때려치우고 그림으로 먹고산 지 10년이 훌쩍 넘었다. 『호주 40일』『밤의 인문학』 등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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