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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바보’ 소설가에게 무슨 일이 생겼나

중앙선데이 2018.09.15 02:00 601호 16면 지면보기
석영중의 맵핑 도스토옙스키 <34> 제네바: 남자가 통곡할 때
2011년 방영된 러시아 TV 미니시리즈 8부작 ‘도스토옙스키’ 중 도스토옙스키가 갓 태어난 딸을 안고 경이로워하는 표정을 짓고 있다.

2011년 방영된 러시아 TV 미니시리즈 8부작 ‘도스토옙스키’ 중 도스토옙스키가 갓 태어난 딸을 안고 경이로워하는 표정을 짓고 있다.

도스토옙스키가 제네바에서 쓴 편지는 이 “역겨운 공화국”의 “어리석고 따분하고 야만적인” 사람들에 대한 불평으로 가득 차 있다. 그는 워낙 스위스를 좋아하지 않았지만 특히 제네바는 싫어하다 못해 증오했다. 제네바에서 그는 평생 흘릴 눈물을 다 쏟았다. 나도 공연히 마음이 무거워져서 점찍어둔 장소만 휘익 한 번 둘러보고 도망치듯 도시를 떠났다.  
 
도스토옙스키 부부는 1867년 8월 13일 바젤을 거쳐 제네바에 도착했다. 처음에는 론 강이 보이는 건물에 방을 얻었다가 12월 중순에 몽블랑 거리 16번지의 조금 더 넓은 셋집으로 이사했다. 제네바 중앙역에서 남쪽으로 10분 정도 걸어가면 외벽에 “도스토옙스키가 1868년에 이곳에 살면서 집필했다”는 내용의 현판이 붙은 특색 없는 건물이 나타난다. 눈여겨보지 않으면 그냥 지나칠 수도 있는 모양새다. 부부는 이 건물에서 여섯 달 동안 살면서 인생 최고의 환희가 최악의 고통으로 바뀌는 것을 체험했다.  
 
시베리아의 혹한도 견뎌낸 작가는 어쩌다 불어오는 스위스의 강풍은 못 견뎌 했다. “날씨 변화가 남편의 신경을 압박해서 간질 발작이 현저히 빈번해졌다.” 1868년 1월부터 ‘러시아 통보’지에 연재될 예정인 『백치』 집필은 마음먹은 대로 진행되지 않아 그의 애간장을 태웠다. 하루에도 수십 가지 플롯이 머릿속에 떠올랐다가 사라졌다.  
 
산파가 예비 아빠를 ‘격리’한 이유    
도스토옙스키 부부는 제네바 몽블랑 거리 16번지의 건물 한 켠에 셋집을 얻었다. 이곳에서 거주한 6개월 동안 이들 부부는 천국과 지옥을 오갔다. 작은 사진은 기념 현판.

도스토옙스키 부부는 제네바 몽블랑 거리 16번지의 건물 한 켠에 셋집을 얻었다. 이곳에서 거주한 6개월 동안 이들 부부는 천국과 지옥을 오갔다. 작은 사진은 기념 현판.

그러나 당시 부부를 진짜로 사로잡은 것은 기대감이었다. 안나 부인이 첫 아이를 가진 것이다! “곧 닥쳐올 이 일에 우리의 생각과 꿈이 집중되었다. 우리 둘은 벌써부터 미래의 아기에 대한 사랑으로 충만했다.” 더 넓은 셋집으로 이사한 것도 곧 태어날 아기 때문이었다.  
 
도스토옙스키의 흥분과 감격은 상상을 초월한다. 몇 가지 에피소드만 예로 들어보자. 제네바에서 처음 송금을 받은 그는 우선 제일 좋다는 산부인과를 찾아가서 산파를 소개받았다. 산파는 도스토옙스키의 셋집에서 꽤 멀리 떨어진 산동네에 살았는데, 매일 저녁 자기네 동네에서 도스토옙스키가 어슬렁거리는 것을 보고 의아하게 생각했다.  
 
사정은 이랬다. 길눈이 무척 어두웠던 도스토옙스키는 산파를 부르러가야 하는 위급한 시간에 갈팡질팡할까봐 지리를 익혀두기 위해 하루도 안 빼먹고 그녀의 집 근처까지 걸어갔다 온 것이다. 실제로 그의 눈물겨운 준비는 결실을 보았다. 어두컴컴한 새벽녘에 그는 한달음에 달려가 산파를 데려왔다.  
 
출산 당일 상황도 전기 작가들이 반드시 언급하는 유명한 스토리다. 산고는 이틀간 지속되었다. 부인을 가장 힘들게 한 것은 실질적인 진통보다 남편에 대한 걱정이었다. 도스토옙스키는 산고를 겪는 부인을 바라보면서 자기가 더 괴로워했다. “그의 얼굴에는 절망과 고통이 어려 있었다. 때때로 흐느끼는 모습도 보였다.”  
 
결국 도스토옙스키의 존재 자체가 분만을 더욱 힘들게 한다는 결론에 도달한 산파는 그를 옆방에 ‘격리’시켰다. 부인은 진통 중에도 짬짬이 산파에게 남편을 좀 보살펴달라고 부탁했다. 얼마 전에 발작을 겪은 그가 또다시 발작을 일으킬까봐 겁이 났던 것이다. 옆방의 도스토옙스키는 산파가 들어오는 것도 모르고 무릎을 꿇고 기도를 드리거나 두 손으로 머리를 감싼 채 극심한 고뇌 속에 잠겨 있었다. 산파는 이런 남편은 처음 본다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마침내 1868년 2월 22일 새벽 5시, 무려 서른세 시간의 진통 끝에 딸이 태어났다. 부인도 남편도 그저 아기가 무사히 태어난 것만 좋아서 처음 10분 동안은 아들인지 딸인지 묻지도 않았다. 딸의 이름은 도스토옙스키가 가장 사랑하는 질녀의 이름을 따서 소냐라 짓기로 했다.  
 
“못생긴 사람을 닮으면서 예쁠 수는 있답니다!”  
러시아 미니시리즈 ‘도스토옙스키’(2011) 중 딸을 유모차에 태워 산책하는 장면

러시아 미니시리즈 ‘도스토옙스키’(2011) 중 딸을 유모차에 태워 산책하는 장면

도스토옙스키는 너무 기뻐 거의 실성한 사람 같았다. 훗날 『악령』에서 작중 인물 샤토프가 아기의 탄생 앞에서 부르짖는 환희의 송가는 도스토옙스키의 체험을 고스란히 반영한다. 아기는 “끔찍이도 연약하지만 자기도 또한 삶에 대한 어떤 온전한 권리가 있다는 듯 열심히 자기의 존재를 알리면서 소리치는 생명체”였다. 아기의 탄생은 “새로운 존재의 출현이라는 신비, 설명할 수 없는 위대한 신비”이자 “위대한 기쁨”이었다. “두 인간이 있었는데, 갑자기 세 번째 인간이, 더할 나위 없이 완전무결한 새로운 정신이 생겨난 겁니다. 이건 인간의 손으로는 어쩔 수 없는 거에요.” “세상에 이보다 더 높은 건 아무것도 없어요!”
 
갓난아기는 중년의 대문호를 순식간에 세상에서 가장 자상한 아빠로 만들어버렸다. “그는 아기를 안고 얼러 재웠고 아기의 울음소리가 들리기만 해도 하던 일을 팽개치고 아기에게 달려갔다. 잠에서 깨거나 집으로 돌아오면 제일 먼저 묻는 말이 ‘소냐는? 안 아파? 잘 잤어? 먹었어?’였다. 표도르 미하일로비치는 몇 시간이고 아기 요람 옆에 앉아서 노래를 불러주거나 소곤거리곤 했다.”  
 
도스토옙스키가 유럽에 머물던 시절 가장 가까웠던 시인 아폴론 마이코프.

도스토옙스키가 유럽에 머물던 시절 가장 가까웠던 시인 아폴론 마이코프.

그는 진정한 ‘딸 바보’였다. 마이코프에게 보낸 편지에서 태어난 지 한 달 밖에 안 된 딸이 자신을 꼭 빼닮았다고 우겼다. “내 표정, 내 골상, 심지어 이마에 난 내 주름살까지 닮았답니다. 누워있는 모습이 꼭 소설 쓰는 자세 같다니까요.” 유머 감각도 잃지 않았다. “저를 닮았으니 예쁘지는 않을 거라 생각하시겠지요. 하지만 못생긴 사람을 닮으면서도 예쁠 수는 있답니다!”  
 
생후 석 달이 지나자 “녀석이 나를 알아보고 벌써부터 좋아하기 시작했어요. 내가 가까이 가기만 해도 방실방실 웃는답니다”라고 감격해 했다. 이 시기 집필한 『백치』 2부는 그의 환희를 그대로 보여준다. “아이가 처음으로 웃는 것을 본 어머니의 기쁨이란 죄인이 진심을 털어놓고 신 앞에 기도를 드리는 것을 저 하늘에서 하느님이 내려다보시고 크게 기뻐하는 것과 똑같은 일이에요.”  
 
딸의 죽음에 이웃과 친지가 보인 모습은
주택가 한가운데 있는 공동묘지에 마련된 딸 소냐의 무덤. ‘소피, 표도르와 안나 도스토옙스키의 딸’이라는 프랑스어 문구와 러시아 십자가가 새겨져 있다.

주택가 한가운데 있는 공동묘지에 마련된 딸 소냐의 무덤. ‘소피, 표도르와 안나 도스토옙스키의 딸’이라는 프랑스어 문구와 러시아 십자가가 새겨져 있다.

그러나 무슨 운명의 장난인지 그들의 소박한 황홀경은 오래가지 못했다. 5월 초의 어느 날 유모차에 실려 산책길에 나섰던 아기는 그만 감기에 걸렸다. 갑자기 불어 닥친 돌풍 때문이었다. 의사는 곧 나을 거라 장담했지만 어린 생명은 속절없이 숨을 멈췄다. “귀여운 우리 딸이 죽은 모습을 보았을 때 우리를 엄습했던 그 절망감을 나는 글로 표현할 재간이 없다.” 도스토옙스키의 슬픔은 통렬했다. “그렇게 격렬한 절망의 모습을 나는 다시는 보지 못했다.”  
 
부부는 아기들을 위한 장지가 따로 마련된 플랭팔레 공동묘지에 소냐를 묻었다. 무덤가에 삼나무를 심고 매일같이 무덤을 찾아와 부둥켜안고 울었다. “맹세코, 그 조막만한 내 피붙이가 다시 살아날 수만 있다면 나는 십자가의 수난도 기꺼이 당하겠습니다!” 몇 년 뒤 무덤을 다시 찾아온 도스토옙스키는 삼나무가 무성하게 자란 것을 보고는 가지 하나를 꺾어 부인에게 가져다주었다.  
 
일부 주변 사람들은 슬픔의 도가니에 빠진 도스토옙스키를 더욱 힘들게 했다. 소냐가 죽었을 때 이웃이 보여준 몰인정한 행동에 부부는 넌덜머리를 냈다. “이웃들은 우리 딸의 죽음을 알면서도 사람을 보내 큰소리로 울지 말아달라고 부탁했다. 신경에 거슬린다는 것이었다.” 러시아에 있는 친척들과 의붓아들도 그의 절망을 증폭시켰다. 그들은 아이의 탄생을 마뜩찮게 여겼다. 딸은 상속 지분이 적으니 그나마 다행이라는 태도도 보였다. 도스토옙스키는 그들이 소냐의 죽음을 내심 반겨할 것이라고까지 추정했던 것 같다. 마이코프에게 아기의 죽음을 비밀로 해달라는 편지를 써 보냈다. “그 사람들은 내 아기를 불쌍히 여기지 않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정반대일 것 같습니다. 그 생각만으로도 나는 서러워 죽을 것 같습니다. 그 불쌍한 어린 것이 무슨 죄가 있나요?”  
 
소설을 써야했기에 그 모든 걸 견뎌냈다
어떤 부부는 공통의 상실 앞에서 일심동체가 되고 또 어떤 부부는 오히려 완전히 갈라선다. 다행히 도스토옙스키 부부는 전자에 해당된다. “이틀 동안 우리는 단 한순간도 떨어지지 않았다.” 영혼을 갈기갈기 찢어놓는 듯한 상실의 시간에 그는 비로소 그때까지 마음속에 쌓여있는 모든 설움을 부인에게 다 털어놓았다. 이전에도 이후에도 없는 전격적인 ‘신세한탄’이었다. 젊은 시절 문단 동료들에게 당했던 수모, ‘처형극’, 유형, 실패한 첫 결혼, 빈곤, 도박중독, 간질, 천식 . 이 모든 고초를 다 겪으면서도 씩씩하게 살아왔다. 가정을 이루고 자식을 갖는 것이 “위대하고도 유일한 인간적인 행복”이라 믿으며 살아왔다. 착한 배우자를 만나 이제 겨우 행복을 찾았다고 생각했더니 신은 그것마저 빼앗아 가버렸다. “그는 아낙네처럼 통곡하며 울었다.”  


부인은 “불행한 남편에 대해 가슴 가득 연민을 느꼈고 그토록 비극적인 그의 인생이 너무 불쌍해서 그와 함께 목 놓아 울었다.” “우리가 함께 겪은 절절한 고통과 마음을 나눈 대화를 통해 나는 그의 병든 마음속 저 깊은 곳까지 헤아리게 되었고 우리는 더욱더 긴밀하게 결합 된 것 같았다.”  
마이코프는 도스토옙스키에게 “이 모든 것을 다 견뎌내면서 어떻게 소설을 쓸 수 있는지”라고 물었다. 어쩌면 소설을 써야했기에 이 모든 것을 다 견뎌냈는지도 모른다. 『백치』 연재는 몇 달 동안 중단되었다가 다시 시작되었다. 소설을 압도하는 절망의 분위기는 아기의 죽음과 무관치 않을 것 같다. 『백치』는 세상의 고통을 덜어줄 수 없는 무기력한 그리스도의 형상으로 마무리된다. 딸을 앗아간 신을 향해 그가 할 수 있는 최고의 문학적인 저항이었는지도 모른다.  
 
고려대 노문과 교수. 『도스토예프스키, 돈을 위해 펜을 들다』,『자유, 도스토예프스키에게 배운다』등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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