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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이의 기적

중앙선데이 2018.09.15 02:00 601호 29면 지면보기
카카오의 공연사업 진출이 화제다. 지난 1일 흡수합병된 자회사 카카오M이 2016년 론칭한 티켓판매 서비스 ‘멜론 티켓’이 점차 연극·뮤지컬까지 영역을 확장하고 있고, 최근 배우 조재현 소유의 대학로 수현재 빌딩을 운영하는 오픈리뷰와 ‘네이밍 스폰서십’ 계약을 맺고 공연계 인지도 확보에 나섰다. 직접 제작사를 설립해 공연 제작에까지 손대기 시작했다.  
 
공연 관계자들의 반응은 대체로 긍정적이다. 현재 공연 예매시장의 약 70%를 점유중인 인터파크 독주 체제가 깨지면 공연 생태계가 긍정적인 방향으로 재정비될 것으로 기대하는 것이다. 카카오톡의 거대 플랫폼을 기반으로 모바일 티켓 시스템이 도입되면 또 다른 의미의 지각변동이 일어날 것이라는 전망도 나온다. 종이 티켓이 사라져 더 이상 공연장에서 줄을 설 필요가 없게 된다는 얘기다.  
 
‘공연장에 좀 느긋하게 가도 될까’라는 생각도 잠시, 공연 팬들은 “종이 티켓을 왜 없애냐”고 아우성이다. 자주 보는 영화 티켓과 달리 몇 달 전부터 계획을 세워 예매를 하고 거금을 들여 하루 저녁을 온전히 투자하는 공연 관람에서 ‘티켓’의 의미는 각별하다. “종이 티켓을 하나하나 티켓북에 모으는 게 추억이 된다” “기꺼이 줄을 서 종이 티켓을 받겠다” “차라리 더 예쁜 티켓을 만들어 달라”는 반응이 나오는 이유다.  
 
하긴 공연 담당 기자로서 수많은 공연을 보면서 티켓을 소홀히 하게 되었지만, 대학시절 친구들과 보러간 이승철 콘서트 티켓은 아직도 버리지 못하고 서랍 속 낡은 지갑 안에 잠들어 있다. 어쩌다 다른 물건을 찾다 우연히 튀어나오면, 그날의 설렘까지 어렴풋이 살아나는 것 같다. 함께 보러 갔던 친구들은 잘 지내는지 궁금해져 ‘내일쯤 연락 한번 해봐야지’ 싶기도 하다.  
 
『나미야 잡화점의 기적』은 전세계 1000만부를 돌파한 베스트셀러다. 히가시노 게이고 팬이라 2012년 국내 출간되자마자 읽었지만, 지금도 베스트셀러 순위에 머물고 있는걸 보며 솔직히 ‘왜?’라는 의문도 들었던 게 사실이다. 그런데 최근 개막한 동명 연극(사진)을 보며 무릎을 쳤다. 30년의 세월을 관통해 고민 상담을 나누는 ‘기적’의 실체인 손편지가 무대에서 팔랑팔랑 소리를 낼 때, 마음에 한줄기 바람이 불어왔다.  
 
얼마 전 대청소를 하다 아이의 8년 전 초등학교 일기장을 발견했다. 하교 스쿨버스에서 깜빡 잠이 들어 회사에 있던 엄마가 택시를 타고 데리러 와서 미안했던 마음, 주말에 엄마를 졸라 함께 쿠키를 반죽하고 예쁘게 모양틀을 찍던 사소한 기억들이 또박또박 눌러쓴 글씨 속에 꿈틀꿈틀 살아났다. 조금은 젊었던 8년 전의 내 모습도 보였다. 담임선생님이 꼼꼼히 달아준 공감 멘트엔 기어이 눈물샘이 터져버렸다. 그건 마치 8년 전의 내가 지금의 나에게 보낸 편지 같았다. 잘하고 있다고, 좀더 힘내보자고.  
 
누군가를 위로하거나 작은 용기를 주려고 시작한 나미야 할아버지의 상담 편지가 만일 전자우편이었다면 어땠을까. 30년 후를 사는 좀도둑들이 차마 고민을 적지 못하고 보낸 새하얀 종이에 저들의 인생관을 바꾸는 답장을 써줄 수 있었던 건 ‘손편지의 기적’ 아니었을까. 과거의 나와 지금의 나를 이어주는 것도 편리한 전자 우편이나 전자 티켓 따위가 아닐꺼다. 그건 빛바랜 편지지나 일기장 속의 나, 혹은 그 옛날 분명히 내 손에 꼭 쥐고 있었던 작은 종이 티켓일 게다. 종이가 없어지는 세상에서 종이가 선물하는 기적을 생각해본다.  
 
글 유주현 기자 yjjoo@joongang.co.kr  사진 달컴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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