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아파트 거실에서 30년

중앙선데이 2018.09.15 02:00 601호 27면 지면보기
an die Musik: 나의 음악실
피아니스트 빌헬름 박하우스가 연주한 베토벤의 ‘황제’협주곡. 화려한 곡이지만 2악장은 꿈결처럼 아름답다.

피아니스트 빌헬름 박하우스가 연주한 베토벤의 ‘황제’협주곡. 화려한 곡이지만 2악장은 꿈결처럼 아름답다.

내가 음악을 듣는 공간은 아파트 거실이다. 본 칼럼에서 ‘나의 음악실’이라는 표현을 가끔 쓰지만, 그저 평범한 아파트의 거실일 뿐이다. 지인 중에는 널찍한 지하 공간을 따로 마련해 옥호까지 붙이고 혼자만의 음악감상실로 쓰는 분이 있다. 바(Bar)를 갖춘 감상실을 갖기 위해 집을 직접 설계해 지은 분도 있다. 용기와 능력이 부럽다.  
 
내 집은 다행히 이웃이 별로 없다. 기역자로 꺾인 동(棟)의 코너에 위치해 옆집이 없고 1층이라 아랫집도 없다. 유일한 이웃은 위층인데 운이 좋은 건지 예민하지 않다. 덕분에 아파트라는 공간에서는 실현하기 어려운 음량으로 음악을 듣는다.  
문제는 내부에서 발생하는 소리다. 부엌에서 물 쏟아지는 소리, 세탁기 돌아가는 소리를 클래식 음악과 같이 듣기는 쉽지 않다. 그런데 요즘에는 그것조차 익숙해졌는지 별로 거슬리지 않는다. 헤어드라이어의 맹렬한 소리를 뚫고 쇼팽의 야상곡을 듣는 신공(神功)을 나도 모르게 터득한 것 같다.  
 
이 음악실에서 처음 들은 음악이 기억난다. 20년 전 새 아파트에 입주해 오디오 연결을 마쳤을 때 가장 먼저 뽑아든 음반은 베토벤의 ‘합창’ 교향곡이었다. 볼륨을 높여 쿵쾅쿵쾅 울렸다. 새 집에 베토벤의 굳센 기운을 불어 넣고 모두 건강하게 지내자는 뜻이었다.  
 
아들은 내가 클래식에 입문할 무렵 세 살이었다. 어린 아이는 밤낮으로 음악 세례를 받았다. 덕분에 바이올린 소리가 들리면 바이올린 켜는 시늉을, 피아노 소리엔 건반 두드리는 시늉을 하며 춤을 췄다. 김덕수패 사물놀이를 들려주었더니 갑자기 방바닥에 엎드려 큰절을 해 나를 놀라게 했다. 지금 집으로 이사 올 무렵엔 카를로스 클라이버가 지휘하는 베토벤 5번 교향곡에 발바닥 장단을 맞추며 밥을 먹는 경지에 도달했다. 그 무렵 월트 디즈니의 음악 애니메이션 ‘환타지아’를 보여주었는데, 빨아들이듯 음악을 흡수했다. 소파에 비스듬히 기대 손가락을 쪽쪽 빨며 바흐의 ‘토카타와 푸가’, 스트라빈스키의 ‘봄의 제전’, 슈베르트의 ‘아베마리아’를 테이프가 늘어지도록 보고 또 봤다.  
 
아들은 대학에 들어가더니 팝핀(Poppin) 춤꾼으로 변신했다. 즐겨듣는 음악도 클래식과는 거리가 멀었다. 최근에는 M-net에서 주최하는 아이돌 경연대회에 열광했다. 내가 보기엔 얘들이 쟤들 같은데 다 다르단다. 물론 그렇겠지. 나는 서른 무렵 자발적으로 클래식 음악에 푹 빠져버렸다. 아들도 그 나이가 됐는데 나와 같은 길을 걸을까. 당연한 이야기지만, 그러지 않아도 상관없다.  
 
거실이 음악실이기 때문에 내 맘대로 음악을 들을 수는 없다. 특히 휴일 아침엔 시끄러운 음악을 고르지 않는다. 가족들 새벽 꿈자리에 들려주어도 좋을 음악을 조용하게 흐르도록 한다. 바흐의 교회 칸타타가 이런 시간에 좋다. ‘눈 뜨라고 부르는 소리 있어’(BWV 140)가 울리면 거실은 교회가 된다. 세습이니 비자금이니, 속세보다 한 술 더 뜨는 교회 다니며 눈과 귀를 더럽히느니 페터 슈라이어가 부르는 바흐 아리아를 듣는 편이 낫다.  
 
얼마 전 둘째인 딸이 여름방학을 마치고 대학 기숙사로 돌아갔다. 전날 짐을 싸놓은 딸은 달콤한 새벽잠에 빠져 있었다. 음반 서가를 잠시 훑다가 베토벤 피아노협주곡 5번 ‘황제’를 골랐다. 2악장의 꿈결 같은 선율과 3악장의 약동하는 기운을 잠든 딸과 함께 들었다. ‘편안히 자고, 힘 내거라.’  
 
물론, 휴일이라도 오전 내내 조용한 음악만 틀지는 않는다. 서서히 볼륨을 높이다가 늦잠들을 잔다 싶으면 거쉬인의 ‘랩소디 인 블루’ 같은 음반을 골라서 볼륨을 높인다. 가파르게 상승하며 찢어지는 클라리넷 소리가 들리면 대개 이불을 걷어차고 일어난다.  
 
글 최정동 기자 choi.jeongdong@joongang.co.kr

선데이 배너

공유하기

중앙일보 뉴스레터를 신청하세요!
광고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