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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피 터져도 던진 동원이, 지금도 사랑받으니 행복

중앙선데이 2018.09.15 00:02 601호 22면 지면보기
[스포츠 다큐 - 죽은 철인의 사회] 김정자 여사가 말하는 ‘내 아들 최동원’
부산 사직구장 앞에 있는 최동원기념사업회 에서 만난 김정자 여사는 ’아무리 힘들어도 여기만 오면 몸과 마음이 회복됩니다. 하늘에 있는 동원이랑 얘기도 많이 하고, 떠오르는 생각을 적어놓기도 합니다“라며 노트를 펼쳐보였다. [송봉근 기자]

부산 사직구장 앞에 있는 최동원기념사업회 에서 만난 김정자 여사는 ’아무리 힘들어도 여기만 오면 몸과 마음이 회복됩니다. 하늘에 있는 동원이랑 얘기도 많이 하고, 떠오르는 생각을 적어놓기도 합니다“라며 노트를 펼쳐보였다. [송봉근 기자]

2017 프로야구 롯데 자이언츠의 홈 개막전이 열린 4월 4일 부산 사직야구장. 한밤중 야구장 광장 서쪽에 있는 ‘무쇠팔 최동원’ 동상을 어루만지는 한 할머니의 흐릿한 사진이 인터넷에 올라왔다. 그는 고(故) 최동원의 어머니 김정자(83) 여사였다.
 
시속 155㎞ 강속구와 폭포수 커브, ‘칠 테면 쳐 보라’ 식의 정면승부, 안경 속 도도한 눈빛으로 타자를 압도하던 카리스마. 팬들의 ‘기억’ 속 최동원이다. ‘기록’은 더 무섭다. 1984년 페넌트레이스 27승, 삼성과의 한국시리즈 혼자 4승(1패), 아직도 깨지지 않고 있는 시즌 최다 탈삼진(223개)…. 그러나 ‘기회’는 그의 편이 아니었다. 81년 메이저리그 토론토 블루제이스와 계약을 했지만 나라에서 보내주지 않았고, 선수협의회 주도 인물로 찍혀 88년 삼성으로 트레이드됐으며, 고향 팀 롯데에서 지도자를 하고 싶다는 소망도 이뤄지지 않았다.
 
9월 14일은 최동원이 대장암과 싸우다 53년간 산 세상을 떠난 지 7주기가 되는 날이다. 7년 전 10월 부산 용호동 자택에서 김 여사와 인터뷰를 한 적이 있다. 전화로 다시 뵙고 싶다고 했더니 잠시 망설이다 “사직구장 앞에 있는 최동원기념사업회 사무실에서 보입시더”라고 승낙을 했다.
 
지난 11일, 최동원의 생전 사진과 기념구·트로피로 장식된 기념사업회 사무실을 찾았다. 초등학교 교사 출신인 김 여사는 요즘도 어르신들에게 한글을 가르치고, 장애 아동을 보살피는 등 바쁘게 산다.
 
 
혼자서 타자 9명 상대 … 얼마나 힘들었을까
 
생전 최동원의 다이내믹한 투구 모습. [중앙포토]

생전 최동원의 다이내믹한 투구 모습. [중앙포토]

작년 4월 그 사진 하나로 ‘국민 어머니’가 됐는데요.
“그날 날씨가 좀 쌀쌀했어요. 롯데가 5-1로 이기고 있어서 6회말에 자리를 뜨면서 동상에 들렀지요. 평소에도 물수건 두 개를 갖고 다니면서 동원이 몸도 싹 닦아주고 주위 바닥도 닦고 그랬거든요. 누가 관중석 꼭대기에서 그 장면을 찍었나 봐요.”
 
롯데와는 앙금이 완전히 풀렸습니까.
“앙금 그런 게 어딨습니까. 조금도 서운하다든가 그런 생각 없습니다. 살아서는 못 돌아왔지만 먼 곳으로 떠난 뒤 (동상으로) 돌아왔잖아요.”
 
그래도 아들 생각하면 아쉽고 안타까운 마음이 있을 텐데요.
“이겼을 때는 그냥 좋기만 했는데. 먼 곳 떠나고 나서 생각해 보니까 너무너무 스트레스 많이 받았겠다 싶어요. 던지는 사람은 하나인데, 타자 아홉 명을 전부 상대해야 하니까 얼마나 신경을 많이 썼겠노 싶어서 너무 죄스럽더라고요. ‘동원아 미안하다. 엄마가 너무 아는 게 없어서. 니가 그만큼 고생한 거를 엄마는 몰랐구나. 고맙다. 수고했다’ 하고 울면서 사죄를 했어요.”
 
경남고 시절 최동원에게 ‘회포 좀 풀자’고 달려든 여학생들도 있었다면서요.
“하루는 동원이가 집에 뛰어들어오면서 ‘어무이, 문 잠그소’라면서 도망가더라고요. 그 뒤로 여학생 세 명이 동원이 책가방을 들고 들어와요. ‘너거들이 우리 아이 책가방은 와 들고 있노’ 했더니 ‘오빠한테 회포나 풀자면서 책가방을 잡았는데 그냥 달아났어요’ 그래요. ‘회포 푸는 게 뭔데’ 했더니 양과자점에서 빵 먹으면서 얘기하는 거랍니다. 좋게 타일러서 돌려보냈지요.”
 
아드님이 선수협 창설에 앞장서는 바람에 불이익을 많이 당했는데요.
“어려운 선수를 돕는 상조회 같은 걸 하자는 거였는데 당시 구단들이 ‘노조를 한다’ 하면서 방해를 심하게 했지요. 선수협의회가 지금은 당연하게 인정되는 시대지만 무슨 일이든지 처음 시작이 힘들잖아요. 지금은 탄탄하게 자리 잡았으니까 동원이가 굉장히 좋아할 것 같습니다.”
 
선배들의 희생 덕에 프로야구 선수들의 위상이 높아졌지만 음주운전·폭행·도박 등 일탈 행위를 하는 일부 선수들이 있다고 하자 김 여사는 “참 안타깝죠”라고 짧게 말했다.
 
 
투혼·헌신·도전이 ‘최동원 정신’
 
지난해 4월 인터넷을 달궜던 ‘최동원 동상을 닦는 어머니’ 사진. [중앙포토]

지난해 4월 인터넷을 달궜던 ‘최동원 동상을 닦는 어머니’ 사진. [중앙포토]

최동원기념사업회는 고인을 사랑하고 추모하는 사람들의 자발적인 모임이다. 식당업을 하는 강진수 사무총장은 “형님과는 살아생전 한 번도 뵌 적 없어요. 돌아가시고 난 뒤에 ‘부산이 낳은 야구 영웅인데 너무나 일찍 외롭게 갔다. 박물관을 만들어 기념하자’는 분위기가 일어났어요. 목돈이 없으니 월 100만원씩 10년간 내겠다고 기자한테 얘기하는 바람에 빼도박도 못하게 됐죠”라며 웃었다.
 
최동원 동상은 기념사업회 초대 이사장인 권기우 변호사가 사비를 털고, 롯데 자이언츠가 낸 1억원으로 힘을 받아 2013년 건립됐다. 2016년 시작한 최동원야구교실은 형편이 어려운 아이들을 뽑아 매주말 무료로 야구를 가르친다.
 
‘한국의 사이영상’으로 불리는 최동원상(상금 2000만원)은 부산은행이 후원한다. 2014년 양현종(KIA)을 시작으로 유희관(두산)-장원준(두산)-양현종이 받았다. 올해부터 외국인 투수도 대상에 포함하는데 린드블럼(두산)이 유력한 수상 후보다. 린드블럼은 롯데 시절 별명이 ‘린동원’이었다. 최동원처럼 묵묵히 많은 이닝을 책임진다는 의미였다.
 
최동원기념사업회사무총장 강진수씨. [송봉근 기자]

최동원기념사업회사무총장 강진수씨. [송봉근 기자]

죽어서 더 사랑받는 최동원의 매력은 무엇일까. 강병철 최동원기념사업회 사무국장은 “프로에서 가장 많은 돈을 받는 선수가 약자인 후배를 위해 앞장섰잖아요. 가장 높은 곳에서 제일 아래를 챙긴 정신을 팬들이 좋아하는 것 같아요”라고 말했다. 강 총장은 “불세출의 야구 영웅이 시대 상황에 막혀 뜻을 더 펴지 못하고 갔다는 게 팬들의 가슴에 남은 것 같아요. 투혼·헌신·도전이 ‘최동원 정신’이라고 봅니다”고 말했다. 그는 “사직구장 구석에 있는 동상을 광장 정면으로 옮겨 ‘만남과 기억의 장소’로 만들었으면 좋겠어요”라고 덧붙였다.
 
김 여사는 “동원이는 지 몸을 아낀 적이 없었어요. 던지고 또 던지고, 코피가 터져도 팀이 원하면 던졌지요. 가고 나서 팬들의 사랑을 더 많이 받게 되니 저는 너무 행복합니다”고 말했다. 프로야구 명예의전당이 빨리 건립돼서 집에 보관하고 있는 유품이 제자리를 찾아가는 게 마지막 소원이라며, 그걸 위해 열심히 일하고 건강 관리도 한다고 어머니는 말했다.
 
할아버지·아버지·동생들 … 3대가 함께 만든 ‘무쇠팔 최동원’
최동원 부친 최윤식과 함께

최동원 부친 최윤식과 함께

‘무쇠팔 최동원’은 최씨 집안 3대가 만든 명품이었다. 부산시 사하구 괴정동의 집 뒤에는 꽤 큰 텃밭이 있었다. 그곳에 전용연습장을 만들었다. 할아버지가 자갈치시장에서 텐트 천과 그물망 재료를 사 왔고, 아버지가 천을 잘라 스트라이크 존을 만들었다. 아버지가 “인코너 슈트” “아웃코너 커브” 식으로 말하면 최동원은 그곳으로 던져야 했다. 30개 정도 던지면 동생들이 달려가 공을 주운 뒤 빗물받이 홈통에 넣었다. 공은 데구루루 굴러 마운드로 모였다.
 
부친인 고(故) 최윤식(사진 왼쪽)씨의 정성과 열정은 대단했다. 그는 늘 일본 TV를 보며 변화구 던지는 법을 연구했다. 개인연습이 끝난 뒤 아들의 어깨와 등을 정성껏 마사지했다. 잠자리를 펴 주면서는 어깨가 닿는 쪽 이불이 평평한지, 솜이 뭉친 곳은 없는지도 체크했다.
 
중학생 시절 최동원을 큰 감나무 위에 올라가게 한 뒤 밑에서 아버지가 지키고 서 있었다. 아들이 힘들어서 중간에서 매미처럼 붙어 있자 아버지는 불호령을 내렸다. “그 정도도 힘들다면 운동하면서 어려우면 언제든 그만두려고 할 것 아니냐.” 아들은 죽을 힘을 다해 나무 꼭대기까지 올라갔다 내려왔다. 팔과 다리 피부가 벗겨져 시뻘겋게 됐다. 그날 밤 아버지는 빈 방에서 울고 있었다. 김정자 여사는 “애 앞에서는 절대 내색 안 했지만 아버지는 남몰래 많이 울었어요. 동원이도 아버지 말씀이라면 한 번도 어긴 적이 없었어요”라고 말했다.
 
한국전쟁 때 다리를 다친 최윤식씨는 한쪽 다리에 의족을 하고 있었다. 김 여사는 의족에 얽힌 이야기도 들려줬다. “하루는 방송국 녹화를 마치고 동원이가 커피를 좋아하는 아버지를 위해 지하 커피숍으로 안내했어요. 계단을 내려가다가 아버지 발이 미끄러지면서 의족이 풀려버렸어요. 의족이 계단 아래로 우당탕탕 떨어지니까 커피숍 손님들이 기겁을 했대요. 동원이가 급히 뛰어내려가 의족을 가슴에 품고, 아버지를 업고 올라왔어요. 근처 담뱃가게에 아버지를 모셔 놓고 백방으로 뛰어다니면서 의족을 수선해 와서 채워 드렸답니다. 그날 밤 부자(父子)가 각자 방에 들어가 나오지를 않는 겁니다. 한참 뒤에 아버지가 불러서 갔죠. ‘내가 자식은 잘못 키우지는 안했는갑다’ 하시데요. 아버지 마음, 아들 마음이 느껴져서 가슴이 터질 것만 같았어요.”
 
정영재 스포츠선임기자 jerry@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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