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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계 조작의 유혹③] 20년 전 IMF 외환위기의 시작은…부실한 외환보유 ‘기록’이었다

중앙일보 2018.09.14 06:01
1997년11월21일의 IMF 구제금융 요청 발표 사실을 보도한 이튿날 중앙일보 1면.

1997년11월21일의 IMF 구제금융 요청 발표 사실을 보도한 이튿날 중앙일보 1면.

 
 외환위기를 코 앞에 둔 지난 1997년 10월 한국 정부는 “외환보유액이 305억 달러 수준”이라고 발표했습니다. 그러나 실상은 달랐지요. 실제 가용 외환보유액은 그보다 적은 225억 달러에 불과했습니다. 
 
 외국에서 빌린 외화를 갚을 수 없는 상황에 이르자 한국 정부는 국제통화기금(IMF)에 구제금융을 신청합니다. 그리고 IMF와 구제금융 합의가 이뤄진 12월, 한국의 가용외환보유액은 89억 달러로 곤두박질쳤지요. 그해 10월 발표치(305억 달러)의 3분의 1 수준입니다. 
 
 이후 기업들의 줄도산부터 금 모으기 운동까지, 한국 경제는 혹독한 시련을 치르게 되지요. (※이 일을 계기로 한국 정부는 외환보유액을 ‘가용 기준’으로 전면 수정하게 됩니다.)
 
현재도 MF 홈페이지는 한국 외환위기쯤인 96~97년 특별회계공표기준과 지표 공시기준이 마련됐다고 밝히고 있다. [IMF 홈페이지]

현재도 MF 홈페이지는 한국 외환위기쯤인 96~97년 특별회계공표기준과 지표 공시기준이 마련됐다고 밝히고 있다. [IMF 홈페이지]

 
 한국 외환위기를 전후로 IMF는 국가 통계에 대한 ‘특별회계공표기준(SDSS)’과 ‘일반공시기준(GDDS)’을 잇따라 마련합니다. 회원국이 발표하는 통계 기준을 통일시키려는 목적이지요. 
 
 지금도 IMF 공식 홈페이지는 “통계 체계가 덜 발전된(less developed statistical systems) 국가의 자료 개선 등을 위한 수단으로 활용하라며 이들 제도를 마련했다”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홈페이지상에서 IMF는 ‘한국’을 대놓고 언급하진 않는데요. 홈페이지가 명시한 ‘제도 마련 시점(1997년)’을 살펴보면, 같은 시기 터진 한국 외환위기가 제도의 시발점이라는 사실을 유추해볼 수 있습니다.
 
 지난 1998년 한국 해양수산부 회의실에서 한일어업협정을 두고 협상 중이던 박규석 당시 차관보(왼쪽)와 나카스 이사오 일본 수산청장(오른쪽).

지난 1998년 한국 해양수산부 회의실에서 한일어업협정을 두고 협상 중이던 박규석 당시 차관보(왼쪽)와 나카스 이사오 일본 수산청장(오른쪽).

 
 비슷한 즈음에 한국 정부는 ‘또 다시’ 부실한 통계 관리에 따른 난관에 직면합니다. 같은 해인 97년 일본 정부는 한국의 정권 교체와 외환위기를 틈 타, 한·일 어업협정을 일방적으로 파기한 바 있는데요. 이 때문에 양국은 새로운 한·일 어업협정에 대한 논의에 들어가야 했습니다.
 
 상황은 순조롭지 않았습니다. 당시 한국 정부가 ‘협상 근거’로 내세울 어장별 어획량 통계를 정확하게 구비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특히 쌍끌이조업·복어채낚기·갈치채낚기 등에 대한 어업 통계 자료가 상당수 누락됐지요. 
 
 정확한 통계 자료를 갖춰야 수역을 구분하고 어획량을 정할 수 있는데, 결국 일본 협상단에 망신을 산 꼴이 됐습니다. 한국 정부는 뒤늦게 관련 자료를 준비하게 됩니다.
 
99년 한일어업협정을 맡았던 김선길 당시 해양수산부 장관.

99년 한일어업협정을 맡았던 김선길 당시 해양수산부 장관.

 
 협상 내용 역시 부실했습니다. 협상 발효 이후 한국 정부가 쌍끌이 어획량을 외끌이 어획량에 포함시킨 사실이 밝혀진 것입니다. 그래서 일본 수역에서의 한국 어선 쌍끌이 어획쿼터가 누락되었지요. 논란 끝에 김선길 해양수산부 당시 장관이 책임을 지고 사퇴합니다.
 
 부실한 통계 관리에 따른 논란은 이뿐만이 아닙니다. 앞서 83년 한국의 (합계)출산율이 인구 적정 유지선인 2.1명 이하로 떨어진 바 있는데요. 이런 사실을 간과했던 정부는 이후에도 96년까지 무려 13년 간이나 출산 억제 정책을 지속했습니다.
 
 이들 사례의 공통점은 무엇일까요. ‘부실한 통계 관리가 정책 실패로 이어졌다’는 점입니다. 통계 관리 및 활용을 부실하게 한 바람에, 국운이 걸린 상황을 맞이했을 때 제대로 대응하지 못한 것이지요.
 

“베트남전 적군 사망자 연 30만 명” 과장 보고한 미군
 
 해외로 눈을 돌려볼까요. 잘못된 통계 활용은 인명 피해로 이어지기도 합니다. 베트남전(1960~75년) 당시 미국 정부의 사례입니다.
 
 하버드대 비즈니스 스쿨을 나와 포드사 최고경영자(CEO) 출신인 로버트 맥나마라 당시 미국 국방장관(1916~2009년)은 전세의 유불리를 파악하기 위해 ‘사망한 적군 수’를 지표로 활용했지요. 그는 ‘걸어다니는 컴퓨터’라는 별명이 있을 정도로 통계 수치를 중요하게 여긴 관료입니다.
 
 맥나라마는 당시 중앙정보국(CIA)에 특별전담반을 설치해 베트남전 폭격기의 출격 횟수, 월별 투하 폭탄 종류, 폭탄 투하의 위치와 수량을 분석해냈습니다. 이른바 ‘전쟁의 계량화’를 통해 베트남전 승리하겠다는 의도였지요.
 
이로 인해 일선 부대들이 “적군 사망자가 늘었다”며 자신들의 성과를 부풀리기 시작했습니다. 어느새 ‘적군 사망자가 한해 30만 명에 달한다’는 보고까지 수뇌부에 올라왔지요. 미군 수뇌부는 승리감에 도취하기 시작했습니다.
 
73년 닉 우트의 퓰리처상 수상작 ‘베트남-전쟁의 테러’.

73년 닉 우트의 퓰리처상 수상작 ‘베트남-전쟁의 테러’.

 
 하지만 실제 상황은 불리했지요. 계량적 접근과 부풀려진 보고에 몰두했던 미군이 정글과 논이라는 베트남군에게 유리했던 지형적 ‘변수’를 간과했던 것입니다.
 
 패전이 확실시되자, 맥나마라 장관은 적지않은 충격을 받았습니다. 만약 전쟁에 질 가능성이 컸다면 일찌감치 군대를 철수시켜, 인명 피해를 줄일 수 있었는데 말이지요. 결국 미국 정부는 5만8000명의 전사자를 낸 채 군대를 철수합니다.
 
 이처럼 표면적으로 나타난 수치에 의존한 채 임의로 판단하는 행위를 일컫는 ‘맥나마라의 오류’라는 말까지 생겨났습니다.
 
지난 1961년 미국을 방문한 박정희 전 한국 대통령과 만난 로버트 맥나마라 미국 국방부 장관. [중앙포토]

지난 1961년 미국을 방문한 박정희 전 한국 대통령과 만난 로버트 맥나마라 미국 국방부 장관. [중앙포토]

 
 최근 한국에선 통계청장 교체 논란이 뜨거웠습니다. 청와대가 지난달 26일 임기가 1년 가량 남았던 황수경 통계청장을 면직하고, 강신욱 한국보건사회연구원 사회보장연구실장을 후임 청장으로 임명한 것과 관련해 “청와대가 정책 기조(소득 주도 성장)에 맞지 않는 통계 결과를 낸 황 청장에 대한 문책성 인사를 단행한 것”이라는 의혹이 나온 것이지요. 
 
 그러나 인사 교체의 사유가 무엇이든, 통계기관의 장(長)이 누구든, 한 가지 사실은 분명합니다. 국가 통계를 ‘있는 그대로’ 보존, 관리하지 않는다면 정책적 실패로 이어진다는 것입니다.
 
[통계 조작의 유혹] 시리즈는 인공위성 야간 불빛을 활용해 독재 정권의 통계 조작을 밝혀낸 루이스 마르티네즈 미국 시카고대 교수 인터뷰로 이어집니다.
 조진형 기자 enish@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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