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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현상의 시시각각] 이젠 전월세가 문제다

중앙일보 2018.09.14 00:26 종합 34면 지면보기
이현상 논설위원

이현상 논설위원

“집은 살 때보다 팔 때가 중요한 거 아닌가?”
 
무주택 전세로 지내는 대기업 임원 A씨를 만나 집을 안 사는 이유를 물었더니 ‘소신 있는’ 답이 돌아왔다. 천정부지 집값이 언제까지 가겠느냐는 것이다. 연봉 많기로 소문난 대기업 임원이 돈이 없어 집을 안 산 건 아닐 것이다. 나름의 판단에 따른 합리적 선택이리라. 이유야 어떻든 결과적으로 이 임원은 문재인 정부의 주택정책을 믿고 따른 셈이다.
 
박근혜 정부는 집값은 내려가고 전세가는 오르자 ‘빚 내서 집 사라’는 대책을 내놨다. 이를 믿고 ‘과감히 질렀던’ 사람은 지금 쏠쏠한 보상을 받았다. 현 정부는 반대 신호를 보내고 있다. 미덥진 못하지만 만약 대책이 성공해 집값이 하향 안정된다 치자. A씨는 어떤 보상을 받을까. 집을 싸게 살 기회? 혹은 집값 불안 없이 느긋하게 전세를 계속 사는 것? 합리적으로는 후자의 보상을 택할 가능성이 더 크다. 집값 오를 가능성도 적은데 세금 부담까지 높아졌으니 집을 왜 사겠는가.
 
그러나 이런 합리적 기대는 무위에 그칠 가능성이 크다. 보유와 전세가 얽힌 집값 구조 때문이다. 전세는 집값이 계속 오른다는 전제로 성립된 우리나라만의 독특한 제도다. 집주인은 오르는 집을 확보하기 위해 세입자의 목돈을 이용하고, 대신 세입자는 보유보다 싼 비용으로 주거 문제를 해결한다. 집값이 장기 안정화되면 집값과 전세금은 수렴할 수밖에 없다. 아예 전세가 사라지고 월세로 재편될 가능성도 크다.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집값 하락기 때 경험했던 상황이다.  
 
전월세가 불안해지면 세입자들은 단번에 잠재적 매매 수요자로 바뀐다. 집값 불안과 전월세 불안의 악순환이 반복된다. 물론 대한민국 상위 1%인 대기업 임원의 사정을 걱정하는 것은 아니다. 대다수 중산층과 서민층에게도 닥치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서울시 가구의 57%, 전국 가구의 42%가 전월세를 살고 있다. 임대시장이 불안해지면 서민층과 청년층, 주거 취약층이 그 고통을 고스란히 떠안게 된다.
 
지금 정부가 펼치는 주택정책은 ‘건전한 실수요자’의 내 집 마련 꿈에 맞춰져 있다. 이를 방해하는 세력이 투기꾼과 다주택자들이라는 인식으로 강도 높은 규제를 펼치고 있다. 전세 안정화를 꾀한다며 활성화에 나서던 임대주택사업자 정책은 하루아침에 방향을 바꿨다. 다주택자의 투기 수단이라는 지적 때문이다. 취지를 이해 못할 바는 아니다. 그러나 이런 정책이 영 미덥지 않은 것은 ‘손 따라 두는 바둑’이라는 느낌 때문이다.
 
주거안정이 꼭 내 집 마련으로만 가능한 것은 아니다. 자가 주거율이 70~80%에 이르는 영국과 아일랜드는 1980년 이후 추세적으로 집값 폭등을 하다 글로벌 금융위기로 큰 타격을 받았다. 반면에 자가 주거율이 40%에 불과하고 민간 임대가 50% 가까운 독일은 선진국 중 가장 안정적인 집값 추이를 보인다. 자가 소유에 대한 중산층의 열망이 집값 인상 심리전에 휘말릴 가능성이 크고, 오히려 임대시장 안정화가 집값 안정 수단이 될 수 있다는 이야기다.
 
보유세 인상을 주 내용으로 하는 9·13 대책이 효과를 거두기 위해서도 전월세 안정책은 필요하다. 세금 부담이 세입자에게 전가될 경우 정책은 무위로 돌아간다. 살고 싶은 지역에 대한 지속적인 공급 확대, 서민과 중산층을 위한 공공임대 확충은 기본이다. 선진국처럼 세입자에게 계약 갱신 청구권을 주거나 임대료 상승에 일정한 제한을 두는 등의 방안도 진지하게 검토해 봐야 한다. 집값 안정이라는 당면 목표에 매달려 주거 안정이라는 근본 목표를 놓치고 있는 건 아닌지 걱정스럽다. 전월세 안정이 없으면 ‘집은 사는(買) 것이 아니라 사는(住) 것’이라는 구호는 그저 빈말일 뿐이다. 
 
이현상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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