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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둥이 남편 떠받들던 어머니의 '헤라 콤플렉스'

중앙일보 2018.09.13 13:00
[더,오래] 윤경재의 나도 시인(17) 
앉은뱅이 소반. 시골집에서 어머니가 차려주시던 앉은뱅이 소반 위의 맑은 장국에는 어머니의 지혜가 담겨 있었다. [중앙포토]

앉은뱅이 소반. 시골집에서 어머니가 차려주시던 앉은뱅이 소반 위의 맑은 장국에는 어머니의 지혜가 담겨 있었다. [중앙포토]

 
앉은뱅이 소반
 
흰머리 숭숭하여 찾아온 맏아들에게
따스운 밥 한 그릇 봉분처럼 지어
차려낸 앉은뱅이 소반
쪽 달아난 다리에도
살림이 맵짜던 손끝 녹아 진수성찬
입 짧은 아버지 즐기시던 맑은장국
오늘도 밥상머리 차지하였다
 
뱁새 둥지에 탁란 하고 날아간 뻐꾸기
어쩌다 들려도 상한 깃털 하나 없을까
독상 차려 기름 동동 띄워 대접하셨지
곁상에 앉아 장국 무만 뒤적이던 무릎들
쥐 올라도 앙증맞게 코에만 침을 묻혔지
 
맑은 국물에 어리는 닮은꼴
내 얼굴
첫 숟갈 뜨면서 휘휘 저어버렸다
 
평생 소반 곁을 허리 굽어 지킨 뱁새
삼베 같은 주름살 헤아리다
두세 차례 숟가락질
입 안 가득 번진 옛 맛에
저 멀리 목이 멘 뻐꾸기 소리 들리며
짭조름 장국 증기 한 방울
눈에 섞이고 말았다
 
[해설] 어머니가 맑은장국 끓이며 담은 깊은 뜻
큰 아들이었던 시 속 화자는 집에도 자주 오지 않고 자식들에게 잔정을 주지 않는 아버지를 원망하며 자랐다. [사진 윤경재]

큰 아들이었던 시 속 화자는 집에도 자주 오지 않고 자식들에게 잔정을 주지 않는 아버지를 원망하며 자랐다. [사진 윤경재]

 
우리 부모님 세대는 정말 상상할 수 없을 만큼 힘든 시기를 보냈다. 일제강점기에 태어나 어린 꿈을 제대로 꾸지 못했다. 일제 강점기 정신적 혼란은 어떤 것이 정의인지 불의인지 뚜렷한 기준을 세울 수 없었다. 식민지 일제는 아주 교묘하게 다방면으로 민족정신을 훼손했다.
 
태평양전쟁 때에는 극에 달해 남녀노소를 징용해 위안부 등으로 전쟁터에 강제 동원했다. 열등 신민으로 민족 자존감을 송두리째 짓밟았다. 놋수저나 밥그릇까지 공출하는 악랄한 수탈은 온 백성을 먹고사는 문제에만 매달리게 하였다. 식민지 교육은 아주 열악해 도시에 살던 몇몇 사람만 배울 기회를 얻었다.
 
1945년 외세 도움으로 겨우 해방을 맞았다. 그러나 사회는 좌우 이념으로 갈라져 매우 혼란스러웠다. 1950년 6.25 남침 전쟁은 부모님 세대를 최악으로 몰고 갔다. 죽느냐 사느냐 생존 문제에 모든 걸 걸게 하였다. 한창 희망에 부풀 20대 초반 나이를 살육 전쟁과 가족 이별로 멍든 채 보낼 수밖에 없었다. 군대 징집 연령에 걸린 부모 세대는 제대로 된 가정을 꾸릴 수 없었다.
 
1953년 휴전 후 결혼이 갑자기 증가했고 그 결과 베이비붐 세대가 탄생했다. 대개 1955~1963년생을 들어 말한다. 부모 세대는 얼른 가난에서 벗어나는 일과 정치혼란 속에서도 하루하루 가족과 안전하게 지내는 게 인생 최대 목표였다.
 
시 속 화자는 55년생으로 전후 베이비붐 첫 세대다. 그의 아버지는 6.25 남침 전쟁에 참전했다가 겨우 살아남았다. 나이가 차 결혼은 했으나 시골에서 농사나 짓고 살 마음이 없었다. 일자리를 찾아 안 해본 일이 없을 정도로 온 나라를 헤매고 다녔다. 그래서 그의 어머니는 거의 혼자 세 아이를 도맡아 기를 수밖에 없었다. 다행히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은 작은 과수원과 땅에서 소출이 있어 생활을 어렵게나마 꾸려나갈 수 있었다.
 
그의 아버지는 가끔 시골집에 들러 생활비 조금이랑 아이들에게 용돈이나 집어주고 며칠 묵고 곧 떠났다. 그럼에도 어머니는 아이들에게 그런 아버님의 공치사만 했지 불평불만을 한 마디도 꺼내지 않았다. 오히려 어머니는 오랜만에 들러준 남편을 신주 모시듯 대접했다.
 
사춘기 큰아들 눈에는 어머니의 그런 행동이 가당치 않아 보였다. 잔정을 주지 않는 아버지가 미웠고 커 갈수록 원수처럼 느껴졌다. 자기는 커서 아버지처럼 무책임하고, 부인과 가족을 사랑할 줄 모르는 사람이 되지 않겠다고 굳게 다짐했다.
 
가끔 집에 들른 아버지를 원망했던 사춘기 소년 
어머니는 아버지께 올리던 소반을 버리지 않고 아들이 오는 날에만 꺼내 썼다. 그리고 아버지가 즐겨 드시던 맑은 장국을 끓여주셨는데, 모두 아버지를 떠올리게 하는 장치였다. [사진 윤경재]

어머니는 아버지께 올리던 소반을 버리지 않고 아들이 오는 날에만 꺼내 썼다. 그리고 아버지가 즐겨 드시던 맑은 장국을 끓여주셨는데, 모두 아버지를 떠올리게 하는 장치였다. [사진 윤경재]

 
교육열이 높은 어머니 성화에 그는 일찍 서울로 유학을 와 중고등학교를 마쳤다. 그래서 아버지를 만난 건 고작 서너 번뿐이었다. 대학교 시절 그의 아버지는 병으로 일찍 돌아가셨다. 그렇게 아들은 아버지와 사사로운 정마저 나룰 기회조차 얻지 못했다.
 
남보다 늦은 결혼을 하고 가정을 꾸려 홀로 계신 어머니를 서울로 모시려고 했으나 극구 사양했다. 시골 과수원에 할 일도 많고 지내기 편하다는 게 이유였다. 그 시절 여인네들이 흔히 신조처럼 따지는 삼종지도를 마다한 것이다. 어려서는 아버지를 하늘처럼 따르고, 결혼해서는 남편을, 늙어서는 아들에게 일생을 맡긴다는 게 여인의 삼종지도가 아닌가.
 
큰아들은 그때 비로소 어머니가 바람둥이 남편일망정 신주 모시듯 행동하신 게 단지 옛 관습에 눌려 그렇게 한 것이 아니었나 생각했다. 어머니는 자신의 자존감을 허물기 싫었던 것이다. 자신이 가꾸고 지켜야 할 삶과 가족을 여봐란듯이 이끌고자 한 것이다.
 
이런 태도는 심리학에서 말하는 ‘헤라 콤플렉스’에 가깝다. 그리스 신들의 제왕이며 바람둥이인 제우스 곁에서 갖은 시기심과 심리적 갈등을 겪으면서도 헤어지지 않고 부인의 역할을 지켜냈던 헤라. 그는 누구의 왕비라는 명예 때문이 아니라 자신 삶의 자리를 완성하고 싶었던 것이다. 그리고 자기 자존감을 지켜냈다. 그에게 자존감은 목숨보다 귀한 것이었다.
 
시 속 화자는 환갑이 넘어서도 자주 시골집을 찾았다. 어머니가 여든이 넘은 나이에도 혼자 지내시는 게 안타까웠으나 그런 심정을 제대로 표현하지 못하는 자신이 원망스러웠다.
 
남성들은 대부분 상실감에서 오는 슬픔과 애석한 마음을 제때 제대로 표현하지 못한다. 그런 상실 감정을 맞닥뜨렸을 때 처음에는 분노로 표현한다. 남자가 불쑥 화를 내는 이유 중에 상당수가 자기가 슬프다는 표현이다. 그런 사연을 남성 자신도, 그 상대방도 잘 모른다. 그럴 때는 가만히 지켜봐 주는 게 정답이다. 이처럼 보통 남성들은 자기감정의 색깔과 근원을 잘 헤아리지 못하고 엉뚱하게 반응한다.
 
그의 어머니는 맏아들을 잘 알았다. 아들이 그렇게나 아버지를 원망하면서 용서하지 못하는 줄을. 아버지에 대한 분노의 감정이 환갑이 지난 나이에도 삭지 않는 게 안타까웠다. 그 분노는 아버지 자리가 상실된 데서 왔다는 걸 모성본능으로 알았다.
 
그렇기에 아들이 찾아올 적마다 어머니는 맏아들을 아버지를 모시듯 대접했다. 당신과 아버지의 지난 세월을 용서받고 이해받고 싶었던 게다. 어머니는 옛날에 아버지께 올리던 소반을 버리지 않고 두었다가 아들이 찾아오는 날에만 꺼내 쓰셨다. 그리고 아버지가 즐기시던 맑은장국을 소고기 듬뿍 넣어 끓여냈다. 모두 아버지를 떠올리게 하는 무대장치였다.
 
60 넘어서야 이해한 어머니의 ‘몸 언어’ 
어머니는 당신과 아버지의 세월을 용서받고 싶어하셨다. 그러나 화자는 어머니의 '몸 언어'를 쉽게 깨닫지 못했다. 화자는 어머니의 '몸 언어'를 이해하고 나니 비로소 어머니의 지혜를 알 수 있었다. [사진 윤경재]

어머니는 당신과 아버지의 세월을 용서받고 싶어하셨다. 그러나 화자는 어머니의 '몸 언어'를 쉽게 깨닫지 못했다. 화자는 어머니의 '몸 언어'를 이해하고 나니 비로소 어머니의 지혜를 알 수 있었다. [사진 윤경재]

 
젊었을 적 맏아들은 이런 어머니의 ‘몸 언어’를 쉽게 깨닫지 못했다. 나이 예순이 훨씬 넘고 어머니께서 병약해지니 비로소 어머니의 ‘몸 언어’가 이해됐다. 자기 얼굴과 몸짓에서 나타나는 아버지 자취에 놀랄수록 응어리졌던 분노의 감정이 조금씩 사그라지는 걸 느꼈다. 환갑이 지난 이 나이에 인제 와서 무슨 용서고 자시고가 있겠는가. 그저 가슴이 먹먹해지고 코끝이 시려 오는 정도였다.
 
그러나 오늘은 달랐다. 쪽 달아난 다리의 소반 그 위에 차려낸 맑은장국을 몇 술 뜨면서, 말없이 아들 곁을 지키고 바라보는 어머니의 주름지고 구부정한자세가 그를 무너뜨리고 말았다. 슬픔이라는 감정을 드디어 거리낌 없이 드러낼 수 있었다. 마음속 그림자가 허물어졌다. 소리 없는 눈물이 배어 나왔다. 일자무식인 줄 알았던 어머니의 지혜가 놀랍기만 하였다.
 
그러자 희미하게나마 아버님 목소리가 저 멀리서 들려오는 듯했다. 그는 자식들에게 그간 숨겨왔던 할아버지 이야기를 들려주어야 하겠다는 마음이 생겨났다.
 
윤경재 한의원 원장 whatayun@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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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경재의 나도 시인] 시를 시인의 전유물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그래서 시쓰기를 어려워들 합니다. 그러나 시인이 따로 있는 것은 아닙니다. 작품이든 아니든 시를 쓰면 모두 시인입니다. 누구나 그저 그런 일상을 살다가 문득 자신의 삶을 돌아보게 하는 경험을 하게 됩니다. 그것이 오래 기억에 남는 특별한 체험이라면 감정을 입혀 쓰는 것이 바로 시입니다. 시인으로 등단한 한의사가 연재하는 시를 보며 시인이 되는 길을 가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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