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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미X발' 크게 적힌 칠판…학교는 침묵했다

중앙일보 2018.09.10 11:29
(※학생들과 교사의 요청으로 기사에서 이름은 모두 닉네임으로 처리합니다)
 
'여성의 상승세가 남성의 하락세를 의미하지 않는다.'
'여자도 바위처럼 단단할 수 있고 남자도 꽃처럼 약하고 예쁠 수 있습니다.'
 
전북 A중학교 학생 8명은 올해 학기 초부터 이런 내용들이 적힌 포스트잇과 팻말을 학교 곳곳에 붙였습니다. 최근 가장 큰 사회 이슈 중 하나인 성차별·페미니즘 이슈에 대해 학교 구성원들과 함께 이야기해보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구성원들의 반응은 차갑다 못해 폭력적이었습니다. 팻말은 세워진 지 얼마 안 돼 누군가에 의해 부러지고 구멍이 뚫린 채 발견됐습니다. 그렇게 내동댕이 처진 팻말엔 '느큼'이라는 욕도 적혀 있었습니다. '느큼'은 '너희 엄마 김치녀'의 준말입니다.
 
"하루는 교실에 들어갔는데 칠판에 크게 '페미X발' 이라고 적혀 있는 거예요. 하지만 학교와 선생님들은 아무 조치도 취하지 않으셨죠." 8명의 학생 중 한 명인 3학년 '당근'(닉네임)이 말했습니다. 당근을 포함한 8명의 학생들은 A중학교 내 페미니즘 동아리 '우모페'(우리는 모두 페미니스트가 되어야 한다)의 멤버들입니다. '김모씨 이야기' 취재팀은 이들에게서 교내에서 벌어지고 있는 여러 일화들과 각자의 생각을 들어봤습니다.
 
우모페가 결성된 계기는 올해 초 2학년 '사랑'과 교사 '바람'이 우연히 대화를 나누다 둘 다  책 『82년생 김지영』을 읽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서부터였습니다. "선생님한테 책 내용이 진짜 있는 일인지 여쭤봤더니 맞다고 하셨어요. 제가 몰랐던 게 너무 많은 거예요. 그래서 이 주제에 대해 더 알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 선생님께 동아리를 만들어보고 싶다고 말씀드렸어요." 이후 사랑은 하나 둘 멤버들을 모았습니다.
 
우모페 멤버들이 학교에 붙인 페미니즘·성평등 관련 포스트잇. [사진 우모페]

우모페 멤버들이 학교에 붙인 페미니즘·성평등 관련 포스트잇. [사진 우모페]

 
학교에 성평등 팻말 세우기, 여자 화장실에 페미니즘 관련 문구가 적힌 포스트잇 붙이기, 여성영화제에서 판매할 굿즈 제작 등 짧은 시간 동안 우모페는 많은 활동을 해왔습니다. '보이루'(보겸+하이루의 합성어로 유명 BJ 보겸이 만든 유행어. 일각에서는 보겸이 과거 데이트 폭력의 가해자였고 보이루에 여성 성기를 지칭하는 비속어가 섞여 있어 사용을 자제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음)'앙기모띠'('기분이 좋다'는 뜻으로 일본 AV에서 여성들이 많이 쓰는 표현) 등 여성혐오 논란이 있는 유행어들은 사용하지 말자고 학우들을 설득하기도 했습니다. 
 
외로운 싸움이었습니다. 같은 반 아이들은 "너네도 메갈(메갈리아)이었어?"하며 비난했고 팻말과 포스트잇은 훼손된 채 발견되기 일쑤였습니다. 그래도 희망은 보이고 있습니다. 2학년 '샤프펜'은 "이제 애들이 여성혐오성 유행어들은 잘 안 써요. 조금씩 저희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있어요"라고 했다. 당근은 "제가 이해한 페미니즘은 남권을 끌어 내림으로써 여권을 상승시키려는 게 아니에요. 그냥 '성평등'이에요. 다음 학기가 되면 제가 느낀 것들을 학내 구성원 모두 앞에서 이야기해 사람들의 인식을 바꿔주고 싶어요."
 
"누군가의 인식을 바꾼다는 말을 자꾸 하잖아. 근데 인식을 바꾸는 게 세상에서 제일 어려운 건지 알지? 제일 어려운 일에 도전하려고 하는 거야 우리가." 바람이 제자들을 바라보며 말했습니다. "저희 엄마랑 오빠는 바뀌었어요. 원래 끈질기게 하면 다 알아듣는 법이에요"…. 학생들의 또렷한 답변이 쏟아졌습니다. 인터뷰를 하며 그런 확신이 들었습니다. 앞으로 더 많은 시행착오와 벽에 부딪히더라도 이들은 자신들만의 답을 꿋꿋이 찾을 거라는 걸요. 글에 미처 다 담지 못한 우모페의 이야기는 영상으로 확인해주세요.
 
(편집자 주: 페미니즘에 '페'자만 나와도 온갖 혐오와 비난이 쏟아지는 게 현실인 요즘입니다. 그런 현실 속에서 우모페 학생들은 학교 내 상황과 자신들의 생각을 취재팀에 용기 내 이야기해 줬습니다. 부디 이 기사의 댓글에서만큼은 아이들을 향한 험한 말은 자제해주시길 부탁드립니다.)
 
※세상 '어디에나 있는 이야기'를 들려드립니다. 유튜브로 놀러오세요!  
: https://www.youtube.com/channel/UCWnyqTsk86NFkmzranBFkLw  
 
'김모씨 이야기' 취재팀 hongsam@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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