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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신마취 상태서 떠난 스무 살 여성의 슬픈 이별

중앙일보 2018.09.10 09:02
[더,오래] 조용수의 코드 클리어(2)
코드 클리어는 응급실에서 응급상황이 종료된 상태를 말한다. 의사는 누구보다 많은 죽음을 지켜본다. 삶과 죽음이 소용돌이치는 응급실과 중환자실에서는 특히 그렇다. 10년 가까이, 셀 수 없이 많은 환자의 생과 사의 현장을 함께 했다. 각양각색 인생의 마지막 순간을 지켜보며, 이제는 죽음이 삶의 완성이란 말을 어렴풋이나마 알 것 같다. 환자를 통해 세상을 보고, 글을 통해 생의 의미를 함께 고민해 보려 한다. <편집자>
 
병원에서 보는 죽음은 언제나 고독했다. 생의 마지막 순간을 누구보다 많이 지켜보았고 그중에는 자신이 죽는지도 모르는 채 죽음을 맞이하는 환자도 있었다. [중앙포토]

병원에서 보는 죽음은 언제나 고독했다. 생의 마지막 순간을 누구보다 많이 지켜보았고 그중에는 자신이 죽는지도 모르는 채 죽음을 맞이하는 환자도 있었다. [중앙포토]

 
병원에서 보는 죽음은 언제나 고독했다. 응급실과 중환자실에서 보낸 세월이 10년. 적지 않은 환자를 보았고 일부를 잃었다. 죽음은 언제나 내 곁에 있었고, 생의 마지막 순간을 누구보다 많이 지켜보았다. 그중에는 자신이 죽는지도 모르는 채 죽음을 맞이하는 환자도 있었다.


전신 마취 상태서 생 마감한 20세 여성
스무 살 여성이 있었다. 어느 날 예고 없이 쓰러졌고, 병원에 왔을 때는 이미 손 쓸 도리가 없었다. 하지만 의사도 부모도 차마 그녀를 포기하지 못했다. 꽃다운 나이였기에. 살리고 싶은 욕심은 죽는 순간까지 치료를 멈추지 못하게 했다.
 
치료 과정은 끔찍하게 힘들었다. 고통을 줄여야 했기에 전신 마취를 했다. 그 여성은 의식을 잃었다. 아무것도 느끼지 못해 시간이 멈춰 섰을 것이다. 부모는 날마다 딸의 손을 잡고 눈물을 쏟았지만, 그는 그 사실을 알 수 없었다.
 
“더는 방법이 없습니다. 곧 숨이 멎을 겁니다.”
“마지막 인사라도 하게 해줄 수 없겠습니까?”
“전신마취를 풀어 달란 얘기인가요? 많이 괴로울 거예요. 진통제를 충분히 쓰고 있지만, 자신이 처한 상황까지 받아들일 수 있을지는 모르겠네요.”
“그래도 마취를 풀었으면 합니다.”
“외람된 얘긴데, 정신 차리면 어떤 얘길 해주실 건가요. 넌 이제 죽을 거라고, 다가올 죽음을 기다리라고 하실 건가요. 그거 알려주려고 깨우는 건가요.”
“모르겠습니다. 선생님 같으면 어쩌실 건가요. 저는 어떻게 해야 하나요.”
“죄송합니다. 잘 모르겠습니다. 제게도 어려운 질문이네요. 정답이 따로 있을 거 같진 않습니다. 선택이 있을 뿐이죠. 그건 아버님 몫이고요. 원하는 대로 해드리겠습니다. 마취를 풀까요.”
“…아니요.”
 
환자는 마지막까지 마취 상태였다. 죽기 직전 아버지는 아이를 깨우려 했지만, 의사의 완곡한 만류에 주저앉았다. 그렇게 그는 죽음을 맞이했다. 자신이 죽는지도 모르는 채. 늦게라도 마취를 풀었어야 했을까. 그랬으면 죽음을 준비하게 할 수 있었을까. 인간답게 삶을 마감할 수 있었을까. 쉽게 대답할 문제는 아니다.
 
90대 노인이 있었다. 인공호흡기 때문에 말은 못 했지만, 고개로 의사 표현을 했다. 하지만 연세가 너무 많아 몸이 버텨내질 못했다. [중앙포토]

90대 노인이 있었다. 인공호흡기 때문에 말은 못 했지만, 고개로 의사 표현을 했다. 하지만 연세가 너무 많아 몸이 버텨내질 못했다. [중앙포토]

 
90대 노인이 있었다. 인공호흡기 때문에 말은 못 했지만, 고개를 끄덕이는 거로 의사 표현을 했다. 의식이 또렷했다. 하지만 연세가 너무 많았다. 몸이 버텨내질 못했다. 
 
“상태가 너무 안 좋아요. 이제 준비를 해야겠습니다.” 아들은 그대로 주저앉아 울음을 터트렸다. 아버지가 들을까 봐 소리도 내지 못했다. 그저 하염없이 눈물만 쏟아냈다. 한참을 그렇게 소리 없이 울더니, 이윽고 눈물 흘린 흔적을 깨끗이 닦아내기 시작했다.
 
“아버지! 힘내세요. 많이 좋아지셨대요. 조금만 더 힘내세요!” 아들은 애써 웃으며 말했다. 노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혈압과 맥박이 서서히 떨어졌다. 몇 시간 남지 않은 것이다. 나는 다시 한번 보호자를 불렀다. 마지막으로 얼굴을 보게 해주려는 의도였다. “곧 사망하실 겁니다.”
 
노인은 이제 의식이 없었다. 아들을 알아보지도 못했다. “아버지, 꼭 좋은 곳으로 가세요.” 아들은 잘 가라는 인사를 아버지에게 건넸다. 아무 말도 알아들을 수 없게 된 이제서야. 울음이 잦아들 때쯤 나는 어렵게 얘기를 꺼냈다. “다시 밖에서 기다리시겠습니까.”


환자의 마지막 순간 지키는 건 가족 아닌 의사
중환자실이었다. 감염을 이유로 면회를 통제했다. 결국 마지막 눈 감는 순간 환자 곁을 지킨 건 보호자가 아니라 의사였다. 정작 가족들은 무덤에서야 비로소 한 데 모여 망자를 떠나보낼 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 죽고 싶은 사람은 없을 것이다. 아마도 십중팔구는 가족들 곁에서 잠들고 싶을 것이다. 죽음을 묘사한 소설에서처럼 평온하게 떠날 거라 믿어 의심치 않을 것이다.
 
현실은 다르다. 사람은 수명을 다 채운 순간 숨이 딱 끊기지 않는다. 폐렴이든 욕창이든 무언가를 앓게 되고, 그 때문에 죽음에 이른다. 진단서의 사망원인에 노환을 쓰는 일은 없다. 100살 넘은 노인도 종국엔 병으로 숨을 거두니까. 결국 종착지는 누구나 병원인 셈이다.
 
인간은 누구나 죽는다. 그리고 인간은 죽는 순간까지 싸워야 한다. 눈부신 의학발전이 가져다 준 역설이다. [사진 pixabay]

인간은 누구나 죽는다. 그리고 인간은 죽는 순간까지 싸워야 한다. 눈부신 의학발전이 가져다 준 역설이다. [사진 pixabay]

 
모두가 아는 진리, 인간은 누구나 죽는다. 모두가 알아야 할 또 하나의 진리, 인간은 죽는 순간까지 싸워야 한다. 눈부신 의학발전이 가져다준 역설이다. 사람들은 병원에서 죽는다. 심지어 자신이 죽는지도 모르는 채. 그리고 그 곁엔 가족이 아닌 생면부지의 의사가 함께한다. 좋든 싫든, 현실의 죽음 대부분이 그렇다.
 
죽는 순간만 따지자면, 차라리 암 같은 시한부 인생이 더 나을지도 모른다. 적어도 주변을 정리하고 가족들과 얘기할 기회는 있으니까. 사랑하는 사람들 품에서 생을 마무리할 수 있으니까.
 
‘추억이 주마등처럼 지나간다. 인생을 헛살진 않았다. 평생 함께해 온 아내의 주름진 얼굴이 사랑스럽다. 아들의 손을 꼭 쥐었다. “나 대신 엄마를 잘 돌봐다오.” 훌쩍이는 소리가 들린다. 딸 아이 뒷모습이 눈에 찬다. 삶의 마지막 순간에 가족들과 곁에 있어 행운이다. 따뜻한 벽난로의 기운이 느껴진다. 눈꺼풀이 감겨온다.’
 
이런 죽음은 이제 없다.
 
조용수 전남대병원 응급의학과 조교수 semi-moon@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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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용수 조용수 전남대학교병원 응급의학과 조교수 필진

[조용수의 코드 클리어] 의사는 누구보다 많은 죽음을 지켜본다. 삶과 죽음이 소용돌이치는 응급실과 중환자실에서는 특히 그렇다. 10년 가까이, 셀 수 없이 많은 환자의 생과 사의 현장을 함께 했다. 각양각색 인생의 마지막 순간을 지켜보며, 이제는 죽음이 삶이 완성이란 말을 어렴풋이나마 알 것 같다. 환자를 통해 세상을 보고, 글을 통해 생의 의미를 함께 고민해 보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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