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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하경 칼럼]김정은이 꾸물대면 트럼프는 판깨고 돌아선다

중앙일보 2018.09.10 00:15 종합 35면 지면보기
이하경 주필

이하경 주필

역시 미국은 달랐다. 아무리 충동적인 대통령이 사고를 치려 해도 제어할 수 있는 나라임을 입증하고 있다. 트럼프의 독주와 일탈을 의회와 언론, 싱크탱크는 물론 백악관과 행정부까지 나서 견제하고 있다. 클린턴·오바마 행정부에서 일했던 브루킹스연구소 수석연구원인 로버트 아인혼의 장담이 다시 한번 떠오른다. 그는 미국 대선을 앞둔 2016년 필자에게 “트럼프가 대통령이 돼도 미국의 시스템이 제어할 수 있다”고 했다. 그가 맞았다.

트럼프, 전방위적인 저항에 휘청

불리하면 협상 판 확 엎을 것

트럼프·문재인은 하늘이 준 카드

자기 입으로 비핵화 일정 밝혀야

 
 살아 있는 대통령의 부당한 권력은 시스템이 아니라 오직 광장으로 뛰쳐나온 시민과 학생에 의해 견제되고 있는 한국과는 너무도 다르다. 남이 만든 제도인 민주주의를 공짜로 덜컥 이식받은 원죄가 이렇게 큰 것인가. 시스템의 한 축을 담당하는 언론인으로서 부끄러움을 느낀다. 
 
 어쨌든 한국인으로서는 도저히 지나칠 수 없는 심각한 상황이 지금 워싱턴에서 전개되고 있다. 결정타는 29세에 워터게이트 특종으로 닉슨을 물러나게 한 워싱톤포스트의 전설인 75세 노기자 밥 우드워드가 날렸다. 이번 주에 출간되는 저서 『공포(Fear)』에서 트럼프가 차지하고 있는 백악관을 켈리 비서실장의 말을 인용해 “미친 동네”, 트럼프는 “정신나간 멍충이 대통령”으로 묘사했다. 참모들은 장사꾼 출신 대통령의 충동적 결정을 저지하기 위해 온몸을 던지고 있었다. '나는 트럼프 저항군의 일원이다'라는 제목의 뉴욕타임스 익명 기고도 백악관을 혼란의 도가니에 빠뜨렸다. 펜스 부통령이 유력한 용의자로 떠올랐고, 각료의 대부분이 경쟁적으로 “나는 아니다”라며 충성선언을 하는 소동이 벌어졌다.
 
 트럼프는 "우드워드 책은 가짜 출처를 따른 사기·속임수"라면서 반발했다. 그러자 워싱턴포스트는 11분짜리 트럼프-우드워드 전화 대화 녹취록을 4일 공개했다. 트럼프가 지난달 14일에 먼저 전화를 걸어 이 책에 대해 인터뷰 요청을 받은 적이 전혀 없다면서 따지자 우드워드는 조목조목 반박했다. 결국엔 트럼프가 인터뷰 요청을 전해들은 사실이 있다고 인정했다. 우드워드는 수백 시간에 달하는 인터뷰 녹취록을 가지고 있음을 알렸다. 백악관 참모와 각료들의 강력한 부인이 허위로 드러날 가능성이 있는 것이다.  
 
 우드워드의 책에서 남북한이 가장 주목해야 할 대목은 트럼프가 합참의장을 통해 ‘대북 선제공격’을 실행하려 했다는 점이다. 우드워드는 트럼프가 한·미 FTA를 폐기하려고 하고, 사드 배치에 불만을 표시했다는 사실도 공개했다. 이런 좌충우돌식 지도자의 손에 한반도의 운명이 달려 있다는 사실을 절대로 잊어선 안 된다.  
 
 이 모든 것이 도대체 무엇을 의미하는가. 장사꾼 출신 트럼프는 상황이 달라지면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표변할 수 있다는 슬픈 사실이다. 북핵 협상을 성과로 포장해 표를 얻어야 하는 결정적인 시점인 11월 미국 중간선거가 끝나고 북한의 태도가 성에 차지 않으면 북·미 협상의 판을 깨버릴 수도 있다.  
 
이하경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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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국 스탠퍼드대 대니얼 슈나이더 교수는 지난달 27일 도쿄 비즈니스 데일리 기고를 통해 "워싱턴의 대북정책이 혼돈에 빠졌다"고 전했다. 그는 미국의 고위 행정부 관리들, 2명의 대북 협상팀 멤버, 폼페이오 국무장관과 NSC에 자문해 주는 전직 국가안보 관리들과 대화를 나눴다. 단 한 사람도 미국이 목표로 내세운 '최종적이고 완전히 검증된 비핵화(FFVD)'의 달성이 가능하다고 보지 않는다고 했다. 유일한 예외가 있다면 대통령 자신뿐이라고 했다. 심지어 대북정책을 수행하는 전문가 대부분의 목표는 "트럼프가 김정은을 다시 만나는 것을 연기하는 것"이라고 했다. 이런 지경인데도 김정은이 불성실하게 나오면 사면초가의 트럼프가 더 버틸 재간이 있을까. 
 
 문재인 정부의 사정도 간단치 않다. 문 대통령은 "올해 말까지 되돌아갈 수 없을 정도로 진도를 낼 것"이라고 했지만 지지부진한 북핵 협상은 야당과 보수세력의 공격 거리가 되고 있다. 다음주 평양 정상회담을 앞둔 김정은이 숙고해야 할 점이다. 
 
 김정은은 트럼프와 문재인이라는 하늘이 선사한 최상의 협상 파트너를 만났다. 핵물질·시설 신고를 성실하게 하고 비핵화 일정표를 구체적으로 제시해야 한다. 시간이 많지 않다. 미국과 한국은 여론에 좌우되는 나라다. 이대로 가면 트럼프도, 문재인도 더 버틸 재간이 없다.  
 
 김정은이 중국의 후견에 기대서 적당히 협상하고, 시간 끌면서 인도· 파키스탄처럼 핵보유국으로 인정받으려 하는 것은 자살행위다. 북이 핵보유국이 되면 일본이 핵무장하고, 중국이 무장을 강화하며, 대만·베트남·한국이 핵무장한다. 핵확산금지조약(NPT) 체제가 붕괴한다. 이것이 북한이 원하는 결과인가. 이러고도 미국과의 관계가 정상화될 수 있다고 보는가.  꿈에서 깨어나야 할 것이다. 김정은이 비핵화 결단을 못하고 꾸물대면 지금까지의 성취는 한순간에 물거품이 될 것이다.
 
이하경 주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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