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남편·자식 죽인 독한 여자를 보는 두 가지 시각

중앙일보 2018.09.07 07:00
[더,오래] 권도영의 구비구비 옛이야기(15)
자기 욕망에 충실하고 원하는 것들을 얻기 위해 무슨 짓이든 하는 여성을 흔히 독한 여자라고 부른다. 독한 여자라는 표현은 남성 위주로 돌아가던 옛날 사회 구조를 잘 보여주는 표현이 아닐까. [사진 pixabay]

자기 욕망에 충실하고 원하는 것들을 얻기 위해 무슨 짓이든 하는 여성을 흔히 독한 여자라고 부른다. 독한 여자라는 표현은 남성 위주로 돌아가던 옛날 사회 구조를 잘 보여주는 표현이 아닐까. [사진 pixabay]

 
독한 여자들 이야기 좀 해볼까 한다. 자기 욕망에 충실한 나머지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무슨 짓이든 할 수 있었던 여자들 이야기다.
 
옛날에 변춘정이란 사람이 있었는데, 과거 보러 가던 길에 혼약을 맺은 집에 인사하려고 들렀다. 마침 앵두가 많이 날 때여서 처가에서는 앵두를 쟁반에 담아 대접했다. 변춘정은 문밖에 일행을 세워 두고 잠시 인사만 하려고 들렀다가 처가에서 자꾸 먹고 가라고 권하니 한 번에 한 줌씩 집어넣고 우물우물 먹고 씨를 뱉어냈다. 장인 될 사람은 변춘정의 인물 풍채는 좋은데, 음식 먹는 모습이 영 상놈이라 파혼을 해버렸다. 그리고 딸은 곧 다른 집에 시집을 보냈다.
 
남편 죽이고 원래 혼약했던 사람과 혼인
딸이 혼례를 치른 후 친정에 머무르고 있을 때 변춘정이 과거에 급제하고 오던 길에 다시 이 집에 들렀다. 딸은 자신과 혼인할 뻔한 사람이었기에 몰래 문틈으로 엿보았다. 그런데 인물과 풍채가 지금 남편보다 아주 준수한 데다 과거에 급제까지 한 사람이라 후회가 밀려왔다. “햐, 울 아버지가 참 옳지 않은 짓을 했구나. 조금만 더 참고 계셨으면 내가 저 사람한테 시집을 갔을 텐데.”
 
여자는 남편이 자는 사이에 남편의 귀에 끓는 참기름을 부어 죽였다. 남편의 장례를 지낸 후 여자는 곧 변춘정을 찾아갔고, 어찌어찌해 그와 혼인하게 됐다. 여자는 변춘정과 사이에 아들 삼 형제를 두었고, 변춘정은 높은 벼슬을 지내며 잘 살다가 고향으로 돌아왔다.
 
부슬비가 내리는 어느 날 변춘정이 안채에 들어와 여자와 함께 앉았다. 여자는 바느질하다가 비 내리는 문밖을 내다보고 살짝 웃음을 지었다. 변춘정이 비를 보고 웃는 이유를 물었다. 
 
여자는 처마에서 물이 떨어져 방울을 일으키는 것을 보니 옛날 생각이 난다고 말했다. 그리고 아버지가 변춘정과 파혼시키고 다른 데로 시집보낸 일, 자신이 문틈으로 엿보았던 일을 이야기했다. 남편이 자는 사이에 기름을 끓여 귀에 부으니 입에서 거품을 내며 죽었는데, 떨어지는 빗물 방울이 거품을 일으키는 것을 보니 그때 생각이 난다고도 했다.
 
변춘정은 다 듣고 나서 조용히 사랑채로 나와 종들에게 장작을 마당에 쌓으라고 말했다. 그리고 여자와 아들 삼 형제를 전부 묶어 장작더미 위에 올려놓으라고 명했다. 여자는 그렇게 묶여서도 후회 없다고 말했다. 변춘정은 “너는 나보다 더 잘난 사람 있으면 나도 역시 죽일 년이구나. 너 같은 독한 년한테서 난 아이들도 다 필요 없다” 며 여자와 아들 삼 형제를 전부 그 자리에서 태워 죽였다. 당시에는 개가가 허용되어 있었는데, 이 일 이후로 변춘정이 개가를 일절 금하도록 했다.
 
영화 악녀의 한 장면. 영화 뿐 아니라 TV 드라마에서도 악녀 캐릭터는 끊임없이 재생산되고, 막장이라 욕하면서도 보는 데엔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정확히 아는 감정과 본능에 충실한 여성이 행복을 쟁취하는 모습에서 카타르시스를 느끼기 때문에 꾸준한 소비가 있는 것이 아닐까. [중앙포토]

영화 악녀의 한 장면. 영화 뿐 아니라 TV 드라마에서도 악녀 캐릭터는 끊임없이 재생산되고, 막장이라 욕하면서도 보는 데엔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정확히 아는 감정과 본능에 충실한 여성이 행복을 쟁취하는 모습에서 카타르시스를 느끼기 때문에 꾸준한 소비가 있는 것이 아닐까. [중앙포토]

 
개인적으로 ‘복수’ 주제에 관심을 갖게 만들었던 이야기다. 이렇게도 끔찍한 복수극이 우리 옛이야기에도 있구나 싶었다. 변춘정은 학식과 덕망이 높은 ‘어르신’으로 일컬어지는 인물이다. 많이 과장됐겠지만, 여자의 욕망에 대한 두려움, 이를 남자의 권위와 이름으로 억압하는 구조가 잘 드러나는 이야기다.
 
어쨌든 여자가 자신의 마음에 드는 남자를 차지하기 위해 태연하게 남편을 죽이고, 그 이후 자기 뜻대로 행복을 쟁취하는 모습이 놀랍다. 감정과 본능에 충실하지 못하고, 내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도 제대로 알지 못하고 살아온 사람에게 이런 이야기는 자극과 카타르시스를 함께 줄지도 모르겠다. TV 드라마에서도 여전히 악녀 캐릭터는 끊임없이 재생산되고, 이걸 막장이라고 욕하면서도 보는 데엔 어쩔 수 없이 카타르시스가 존재하기 때문이지 않을까.
 
앞집 부인에게 흑심 품은 뒷집 남자 이야기 
이와 비슷한 이야기가 또 하나 있는데, 남녀의 위치가 바뀐 버전이라 할 수 있을 듯하다. 옛날 한 마을에 앞 뒷집으로 붙어사는 두  남자가 있었다. 이들은 서로 친하게 지내다가 앞집 남자가 먼저 장가를 갔다. 뒷집 남자가 앞집 남자의 부인에게 검은 마음을 품었다. 뒷집 남자는 어느 날 앞집 남자에게 나무를 같이 하러 가자고 불러냈다. 그리고 높은 바위 위에서 앞집 남자를 밀어 죽여 버렸다.
 
해가 지도록 남편이 돌아오지 않자 앞집 부인이 뒷집 남자를 찾아가 남편은 어디 가고 혼자 와 있느냐고 물었다. 뒷집 남자는 자기도 찾다가 나무도 못하고 그냥 돌아왔다고 말했다. 그 뒤로 뒷집 남자는 앞집을 계속 들락거리며 혼자 된 부인을 위해 밭도 갈아주고, 부뚜막도 닦아주며 마당도 쓸어주었다.
 
부인은 아무래도 뒷집 남자가 수상했지만 내치지 못하고 점심과 저녁을 해먹이고 그랬다. 그러다 보니 검은 맘을 먹고 너부죽 누워 있는 것을 어쩌지도 못하고 함께 지내다 보니 어느덧 아들 삼 형제를 낳고 그럭저럭 살게 됐다.
 
남편 죽음 복수한 여인에겐 열녀각 세워져   
전라북도 순창에 있는 열녀각. 열녀의 기준은 지극히 남성의 입장에서 정해진 주관적인 기준이 아닐까. [중앙포토] (이야기 속의 열녀각과 사진 속 열녀각은 무관하다)

전라북도 순창에 있는 열녀각. 열녀의 기준은 지극히 남성의 입장에서 정해진 주관적인 기준이 아닐까. [중앙포토] (이야기 속의 열녀각과 사진 속 열녀각은 무관하다)

 
하루는 비가 와 일하러 나가지 못하게 된 뒷집 남자가 부인에게 귀나 후벼 달라며 마루에 드러누웠다. 부인은 무릎에 남자 머리를 받치고 귀를 파주면서 죽은 남편 생각을 했다. ‘빗물은 떨어져 저렇게 물방울을 만드는데, 어째서 사람은 죽어도 흔적을 남기지 않을까’ 하며 속으로 한탄하는데, 뒷집 남자가 피식 웃었다. 부인이 무얼 보고 그리 웃느냐고 하니, 뒷집 남자는 죽어 가는 사람은 핏방울이 저렇게 퐁퐁퐁 솟더라고 말하는 것이었다.
 
그의 말을 들은 부인은 술을 실컷 먹여 잠들게 한 뒤 끓는 기름을 귀에 부어 죽였다. 부인은 곧 아들 삼 형제도 모두 죽여 버리고는 관아에 가 이실직고한 후 그 자리에서 칼을 물고 엎어져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놀라운 것은 이 여자가 열녀로 인정받아 열녀각이 세워진 것이다. 좋아하는 남자와 살려고 남편을 죽인 여자로 인해 개가금지법이 시행되지만, 남편을 죽인 자와 함께 살다가 복수한 여자한테는 열녀각이 세워진 것이다. 남성 위주로 돌아갔던 옛날의 사회구조를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권도영 건국대학교 서사와문학치료연구소 초빙교수 irhett@naver.com
 
관련기사
미세먼지 실험 아이디어 공모, 이벤트만 참여해도 바나나맛 우유가!
공유하기
권도영 권도영 건국대학교 서사와문학치료연구소 필진

[권도영의 구비구비 옛이야기] 우리 옛이야기에는 치유의 힘이 있다. 신화, 전설, 민담에는 현대에도 적용 가능한 인간관계의 진실이 숨어 있기 때문이다. 관계에서 생기는 갈등은 어느 무엇보다도 우리를 지치게 한다. 나 하나를 둘러싼 인간관계는 단순하지 않고 복잡하게 얽혀 있기 때문이다. 이런 관계의 갈등을 심도 있게 들여다볼 수 있는 자료가 옛이야기이다. 우리 옛이야기를 통해 내 안에 숨어 있는 치유의 힘을 일깨운다.

광고 닫기

미세먼지 심한 날엔? 먼지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