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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언의 시선] "여기가 적폐의 땅이냐"…TK 사라지는 최고법관

중앙일보 2018.09.06 00:39 종합 28면 지면보기
이상언 논설위원

이상언 논설위원

문재인 정부 출범 뒤 지금까지 대법관 8명, 헌법재판소 재판관 2명이 바뀌었다. 헌재 재판관 5명이 곧 추가로 교체되는데 이에 따라 후보 4명이 지명돼 있다(자유한국당에 추천권이 있는 후보 한 명이 아직 정해지지 않았다). 이 총 14명의 새 대법관, 새 헌재 재판관, 후보자 중 대구·경북(TK) 출신은 단 한 명도 없다. 14명의 고향 분포를 보면 호남 5명, 서울·경기 3명, 충청 3명, 부산·경남(PK) 2명, 강원 1명이다.
 

이 정부 임명한 대법관·헌재 재판관 중 TK는 ‘제로’
국민이 원한 것은 탕평이지 특정 지역 응징 아니다

박근혜 정부 말기 기준으로 대법관(14명)·헌재 재판관(9명) 총 23명 중 영남권 출신은 10명(그중 TK는 3명)이었다. 그런데 헌재 재판관 5명이 교체되는 오는 19일에는 그 절반인 5명 또는 6명(자유한국당 지명자가 TK 출신인 경우)으로 줄어든다. 5명만 남으면 그중 4명은 PK, 딱 한 명이 TK 출신이다. 나 홀로 TK가 될 조희대 대법관(경주 출생)이 1년 반 뒤에 퇴임하면 TK 출신 대법관·헌재 재판관 절멸 사태에 이를 수도 있다.
 
다음 주에 국회 청문회장에 나오는 헌재 재판관 후보자들이 모두 무사히 임명될 경우 헌재 재판관 9명 중 6명이 충남(4명)과 전남(2명) 출신으로 구성된다. 광역·특별시를 포함한 충남·전남 인구는 721만 명으로 전체 국민의 14.1%에 해당한다. 인구 비율로 보면 14%가 두 최고 법원 중 한 곳의 67%를 차지하는 게 된다. 지역 분포 측면에선 전례 없는 편중이다.
 
대법관과 헌재 재판관을 출신지에 따라 고르게 임명해야 한다는 법이나 규칙은 없다. 관행적으로 다양성과 지역 균형을 고려했을 뿐이다. 지명권을 행사한 문 대통령, 김명수 대법원장, 더불어민주당이 TK를 의도적으로 배제한 것이 아니고 어쩌다 보니 결과가 그렇게 된 것일 수도 있다. TK 출신 법조인 중 상당수가 이래저래 전 정부 ‘적폐급’ 인사들과 연결돼 있어 적당한 인물 찾기가 어려웠을지도 모른다. TK 지역이 고향인 판사 출신의 한 법조인은 “이번 정부에서 민변(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 모임) 소속 변호사나 우리법연구회, 국제인권법연구회에서 활동한 판사를 후보로 지명하다 보니 그런 곳에 참여한 법조인 수가 상대적으로 적은 TK 지역이 소외되는 현상이 나타난 것 같다”고 말했다. 극단적으로는 정권 내부에 TK에 대해 ‘마이 무따 아이가’ 심리가 작동했을 수도 있다. 대법관·헌재 재판관만 놓고 보면 이런 ‘포식론’은 사실에 부합하지 않는다.
 
[일러스트=김회룡 aseokim@joongang.co.kr]

[일러스트=김회룡 aseokim@joongang.co.kr]

김대중 정부가 출범한 1998년 호남 출신들이 곳곳에서 약진했다. 요직 등용과 우선 승진이 잇따랐다. 검찰·국가정보원·국세청 등 주요 권력 기관의 장은 몽땅 호남 출신들이 차지했다. 서울의 주요 경찰서장까지 물갈이가 될 정도였다. 갑자기 “우리집이 원래는”으로 시작하는 가족사 커밍아웃을 하며 ‘고향 세탁’을 시도하는 공직자도 있었다. 언론사에선 주요 출입처에 호남 출신 기자들을 전진 배치했다. “랭귀지가 같아야 뉘앙스를 캐치할 것 아니냐”는 농반진반의 말이 유행했다. 박정희·전두환·노태우·김영삼 정부에서 호시절을 누렸던 영남 출신 공직자들이 앙앙불락했고, 영·호남 어느 쪽에도 끼지 못하는 중간지대 출신들은 “우리는 늘상 핫바지”라며 자조했다. 그런데도 집단적 저항은 없었다. ‘기울어진 운동장’ 바로 잡기라는 명분이 어느 정도 통했고, 쌓인 억울함을 푸는 ‘살풀이’로 여기는 분위기가 있었다. 지역 차별 없는 세상으로 가기 위한 통과 의례로 여기며 마음을 달래는 사람이 많았다.
 
하지만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기대했던 탕평의 시대는 오지 않았다. 이명박 정부 때도 ‘우리 편 챙기기’가 이어졌고, 박근혜 정부 시절에는 TK 출신들이 검찰총장·서울중앙지검장·청와대 민정수석 등 권력의 길목을 두루 꿰차며 다시금 전성시대를 구가했다. 지난해 봄 국민은 이런 비정상이 정상화되기를 바랐다. 그게 촛불 정신이라고 생각했다. 그때 국민이 원한 것은 TK 응징·박대는 결코 아니었다.
 
지난해 문재인 정부에서 장·차관급으로 임명된 공직자 114명 중 TK 출신은 11명이었다. TK와 인구가 비슷한 전남·북 지역 출신은 29명이었다. 경찰 고위 간부 중에서도 TK를 찾기가 힘들게 됐다. 대구에서는 “여기가 적폐의 땅이냐”는 냉소가 넘친다. 시민의 마음에 옹이가 자리 잡으면 없애기가 어렵다. 소외 의식은 복수심을 낳는다. 업보(業報)를 쌓는 인사는 여기서 멈춰야 한다.
 
문 대통령의 광화문광장 기억을 소환한다. “오늘부터 저는 국민 모두의 대통령이 되겠습니다. 저를 지지하지 않았던 국민 한 분 한 분도 저의 국민이고, 우리의 국민으로 섬기겠습니다. 저는 감히 약속드립니다. 2017년 5월 10일 이날은 진정한 국민 통합이 시작된 날로 역사에 기록될 것입니다.” 취임사 앞 대목이다. 불과 16개월 전인 그날 국민은 열렬히 손뼉을 쳤다.  
 
이상언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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