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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향기] 남겨진 것들에 관하여

중앙일보 2018.09.04 00:24 종합 28면 지면보기
전수경 화가

전수경 화가

콸콸거리는 소리, 역한 냄새. 새벽같이 눈이 뜨였다. 욕실 하수구가 역류했다. 낙엽이며 온갖 찌꺼기들이 떠 있는 물이 넘실거렸다. 낭패다. 때아닌 가을장마에 사방에서 사태가 나고 침수가 일어났다고 한다. 오전에 은사님의 정년퇴임식에 들러야 하고 멀리 양산으로 가 동료와의 전시회에도 참석해야 한다. 부랴부랴 바가지로 물을 퍼 쏟아부었다. 작업실을 비운 사이 또 역류가 생길까 하수구 구멍에 빨간 고무장갑으로 마개를 만들어 막아놓았다.
 
덕분에 퇴임식에 늦게 도착했다. 나는 먼발치에서 교수님의 고별사를 들었다. 가슴이 먹먹했다. 이미 학교를 졸업했지만 교수님이 항상 학교를 지키고 계실 줄 알았다. 교수님은 연구자와 교육자를 농부에 비유하신다. 알곡을 제대로 수확한 농부는 작물에 눈을 떼지 않는다. 이는 곧 그가 제자리를 지켰기 때문이다. 그렇듯이 연구자와 교육자는 주변의 다양한 변화 속에서도 그들의 자리를 지켜야 한다고 역설하신다. 농부가 때를 기다리듯 인내도 주문하신다. 교수님은 “홀로 빛나는 별이 없고 저 혼자 아름다운 꽃이 없다”고 하시며 떠나는 당신과 남아 있는 후학이 연결되었음을 밝히신다.
 
갤러리 오픈식은 생각보다 성대했다. 많은 관객이 왔고 주최 측이 멋진 음악회를 함께 베풀었다. 통도사 부근에 이렇게 반듯한 문화공간이 있다니 놀라웠다. 행사를 마치고 숙소가 있는 부산 해운대로 넘어가야 할 때 이미 밤이 되었고 장대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발을 동동거리는 우리를 관객 중 한 분이 숙소까지 태워주셨다. 차가 부산에 접어들자 비는 더 거세게 퍼부었다. 온 부산 시내가 마치 어항 속에 잠긴 것처럼 보였다.
 
우리를 태워주신 분은 마침 오늘 한 초등학교의 교장선생님으로 정년퇴임하셨다고 했다. 평생 독신 여성으로 학생을 가르치셨다 한다. 차가 지나는 곳곳의 역사며 문화 그리고 우리의 숙소 부근의 명소까지 일일이 설명해 주셨다. 그의 설명은 여유롭고 유쾌했고 어느 덧 한 두 해 위의 선배나 집안의 언니처럼 느껴졌다.
 
그분은 지금까지 해온 일에 대해 여한이 없다고 했다. 교육하는 농부로서 제자리를 잘 지키고 시간을 두고 아이들의 성장을 묵묵히 지켜 오셨음이 분명하다. 나와 동료는 차를 타고 오는 동안의 짧은 만남임에도 우리가 이분과 연결되었음을 느꼈다. 우리는 모두 함께 빛나는 별처럼 그리고 함께 아름다운 꽃처럼 다투어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교장선생님은 우리의 젊음을 확인하면서 삶을 즐길 것을 권했다. 두 분의 퇴임사를 들은 하루다.
 
조르지오 데 키리코, 사랑의 노래, 캔버스의 유채, 1914.

조르지오 데 키리코, 사랑의 노래, 캔버스의 유채, 1914.

뭔가 남겨진 것들에 관해 그린 이태리 화가 조르지오 데 키리코(1888~1978)가 있다. 그의 인생은 여행과 만남, 작별로 이루어졌다. 그리스에서 태어나 아테네와 피렌체에서 미술을 공부했고 그 후 뮌헨과 파리, 뉴욕, 이탈리아를 오갔다. 50대 중반인 1944년에 비로소 로마에 정착했다. 그런 탓인지 그는 일상과 동떨어져 보이는 장면을 많이 그렸다. 그래서 그의 그림들을 쉽사리 초현실주의와 연결짓거나 꿈을 그린 것이라고 판단하기에 십상이다.
 
하지만 그의 비일상적인 아이디어는 그것과 구별되는 특징이 있다. 그가 그린 ‘사랑의 노래’는 연극무대처럼 설정된 공간에 남겨진 물건들로 채워진다. 고대 지중해 문화권에서 경배되었던 아폴로의 두상과 그때 사용된 건물의 회랑이 버려진 채 있다. 누군가 사용했던 외과수술용 빨간 고무장갑이 버젓이 벽에 걸려 있다. 가지고 놀던 아이는 오간 데 없고 주인 잃은 녹색 공이 덩그러니 놓여 있다. 멀리 담 너머 증기기관차가 지나간다.
 
여기에는 역설이 있다. 고대인이 남긴 것에서부터 산업혁명시대의 고안물 그리고 막 사용한 듯한 장갑에 이르기까지 인간의 부재를 통해 각각의 시대, 장소, 서로 다른 계층의 사람들이 사랑하고 부딪고 살았던 사실을 환기시킨다. 지금은 사라졌지만 그들의 보이지 않는 영향이 여전하다는 논증이다. 그래서 맥아더가 퇴임사에서 자신은 “죽지 않고 사라질 뿐”이라고 했나 보다.
 
전수경 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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