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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이프 스타일] 차례상에 현대식 그릇 … 커피·피자도 올리고

중앙일보 2018.09.04 00:02 종합 20면 지면보기
재단법인 아름지기가 가을 기획전시에서 제안한 현대 제사상. 상차림을 간소화한 것이 특징이다. [사진 아름지기]

재단법인 아름지기가 가을 기획전시에서 제안한 현대 제사상. 상차림을 간소화한 것이 특징이다. [사진 아름지기]

추석이 얼마 남지 않았다. 멀리 있던 가족들이 모여 즐거워야 될 명절이지만 차례상을 차려야 하는 며느리들은 벌써부터 한숨이 나온다. 조율이시(왼쪽에서부터 대추·밤·배·감 순), 홍동백서(붉은 과일은 동쪽, 흰 과일은 서쪽), 생동숙서(생채는 동쪽, 숙채는 서쪽), 좌포우해(포는 왼쪽, 젓갈은 오른쪽), 어동육서(생선은 동쪽, 육류는 서쪽). 국립민속박물관 전시 해설에 따른 전통 제사상차림대로라면 평균 35~40종의 제물을 차려야 한다. 하루 종일 종종걸음을 쳐도 힘에 부치는 건 당연하다.
 

아름지기가 권하는 한가위 차례
집마다 상차림 다른 게 우리 전통
퇴계 가문에선 한과 내놓지 않아
달라진 세상, 제사상도 바뀌어야
성묘용 ‘이동형 제기세트’ 눈길

유교적인 가치관을 기반으로 삼은 조선시대 이후, 우리 민족은 조상을 섬기기 위한 중요한 의식으로 제사와 차례를 지내왔다. 하지만 현대인의 삶의 문화가 급격하게 변화하면서 전통적인 제사 형식이 과연 오늘날의 생활방식과 맞는 것인지 세대 간 갈등이 벌어지고 있다. 요즘 젊은이들에게 어쩌면 제사는 그저 귀찮은 과거의 산물일 뿐이다.
 
안 지낼 수는 없고, 지내자니 지켜야 할 원칙은 힘들기만 한 전통 제사의 예와 형식이 고민이라면 아름지기가 준비한 ‘가가례(家家禮): 집집마다 다른 제례의 풍경’전이 그 해법이 될 수 있을 것 같다.
 
파평윤씨 명재 윤증 선생 종가의 기제사상. [사진 아름지기]

파평윤씨 명재 윤증 선생 종가의 기제사상. [사진 아름지기]

한국 전통문화의 창조적 계승이라는 목표 아래 전통장인 및 현대 작가들과 함께 의·식·주 생활문화를 연구해온 재단법인 아름지기의 신연균 이사장은 “엄격한 제사의 본질과 우리 문화의 정체성을 지켜가되 현대에 맞는 적절한 형식으로 변화할 수 있도록 현대 제사 상차림을 제안한다”고 이번 전시의 기획의도를 밝혔다. 전시 자문 위원인 호서대학교 식품영양학과 정혜경 교수 역시 “시대가 급격히 변화해 핵가족·1인 가정 등이 늘고, 제사를 지내야 하는 공간도 대부분이 아파트가 됐고, 여행 중 또는 해외에서 제사를 지내는 상황도 생겼다”며 “그렇다면 변화하는 시대상에 맞게 제사 상차림과 그 풍경 또한 변해야 한다는 게 이번 전시의 의미”라고 말했다.
 
전시의 주요 컨셉트는 ‘현대인의 일상 공간과 삶의 모습에 맞도록 간소화한 제사상’이다. 품격 있는 제사상을 차리되 음식과 그릇 종류를 간소화한 상차림, 일상에서도 쓰일 수 있는 새로운 디자인의 제기 등을 제안하고 있다.  
 
이건민 산업디자이너가 제작한 ‘이동형 제기 세트’. 가방 안 제기들이 뒹굴며 내는 소음을 방지하기 위해 퍼즐처럼 그릇을 잡아주는 케이스를 고안했다.

이건민 산업디자이너가 제작한 ‘이동형 제기 세트’. 가방 안 제기들이 뒹굴며 내는 소음을 방지하기 위해 퍼즐처럼 그릇을 잡아주는 케이스를 고안했다.

가령 뷔페처럼 여러 음식을 큰 그릇에 모아 담거나, 병풍 대신 실내 가림막을, 제사상 대신 식탁을 사용하는 방식이다. 1년에 몇 번 안 쓰는 유기·목기로 된 제기 대신 평소 손님접대용 또는 디저트 그릇 등으로 사용할 수 있는 사기·유리 소재의 현대 디자인 제기도 볼 수 있다. 평소 각각의 굽이 있어 보관이 어려운 전통 제기의 단점을 보완해 겹치고 펼치기가 가능한 새로운 디자인도 선보인다. 성묘를 갈 때나 집이 아닌 다른 곳에서 제사를 지내야 할 때 편리하도록 작은 손가방에 담은 ‘이동형 제기 세트’도 있다. 퍼즐에서 영감을 얻은 이 이동형 제기 세트는 접시·술잔·촛대·젓가락까지 고루 종류를 담되 서로 부딪쳐 소리가 나지 않도록 틀에 꼭 맞게 디자인 된 것이 특징이다.
 
신 이사장은 “제사는 조상을 섬길 뿐 아니라 가족 간의 화목을 도모하는 우리만의 문화와 정서를 담은 의식인데 그 본질은 사라지고 한상 가득 차려야 한다는 가문의 허례허식만 남았다”며 “조선시대에도 지역과 가문의 특색에 맞게 상차림을 하는 ‘가가례’가 제사의 기본 원칙이었다”고 말했다.
 
퇴계 이황 선생 종가의 불천위 제사상 차림. 두 종가의 제사상은 검소하면서도 상차림이 달라 ‘가가례: 집집마다 다른 제례의 풍경’의 좋은 예를 보여준다. [사진 아름지기]

퇴계 이황 선생 종가의 불천위 제사상 차림. 두 종가의 제사상은 검소하면서도 상차림이 달라 ‘가가례: 집집마다 다른 제례의 풍경’의 좋은 예를 보여준다. [사진 아름지기]

아름지기 전시장에 차려진 퇴계 이황 선생의 불천위 제사상과 검박한 조선 학자를 대표하는 명재 윤증 선생의 기제사 상차림을 보면 가가례의 의미를 알 수 있다. 두 분 모두 조선을 대표하는 유학자들이지만 그 후손들이 차리는 제사상은 우리가 알고 있는 일반적인 상차림과는 많이 다르다. 퇴계 이황 선생의 불천위제사상에는 유과·정과 등의 한과류가 오르지 않는다. 생전에 퇴계 선생이 “기름에 튀긴 과자는 사치스러우니 제물로 사용하지 말라”는 유언을 남겼기 때문이다.
 
명재 선생 또한 “제사는 엄정하되 간소하게 하라. 제사상에 떡을 올려 낭비하지 말고, 손이 많이 가는 화려한 유밀과와 기름이 들어가는 전도 올리지 말라”는 유언을 남겼다. 때문에 명재 종가에선 떡·유밀과·전을 올리지 않고, 과실도 대추·밤·감만 올린다. 또 3색 나물은 별도의 제기에 나눠 담지 않고 한 접시에 모아 담고, 어물인 조기는 온마리가 아니라 토막을, 닭도 반마리만 올린다. 두 종가 모두 상에 놓인 음식의 위치도 다르다. 퇴계 선생 제사상에는 앞줄 가운데 커다란 대구포가 놓인다. 퇴계 선생의 손부인 권씨가 “포를 상 가장자리에 놨더니 치맛자락에 걸려 자꾸 떨어지더라”며 위치를 바꾼 것을 후손들이 그대로 따르기 때문이다.
 
또 다른 자문 위원인 한국국학진흥원 김미영 수석연구원은 “식생활이 변하면서 제물에도 변화가 생겼다”면서 “이제 제사상에 바나나를 올리고, 겨울철에 수박과 참외를 차리는 경우도 흔하다. 또 커피·사이다·피자 등 고인이 생전에 즐기던 음식을 추가하는 모습도 흔히 볼 수 있는데 조상을 기리는 정성으로 차린 것이라면 나무랄 일이 아니다”라고 했다. 그는 또 “역사 속 기록에 반드시 이래야 한다고 정해진 법도는 없다”며 “상을 차리는 것부터 가족들끼리 음식을 나눠먹는 과정까지, 예를 갖추되 최대한 간소하고 편하게 차릴 수 있도록 현대에 맞는 제사상을 고민할 때다”라고 설명했다.
 
전통문화가 현대의 일상과 안 맞을 때, 아예 그 부분을 도려내 버리기보다 현대에 맞게 잘 변화시키는 일이 옳은 해법이다. 아름지기 장영석 국장은 "제사와 차례가 끝나고 ‘이번에도 힘들었어’라고 며느리들끼리 성토하는 문화가 아니라, 인스타그램에 ‘이번에 우리 제사상은 이렇게 예쁘게 만들었다’ 자랑하고 보여주는 문화가 되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전시는 11월 2일까지. 
 
서정민 기자 meantree@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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