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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왜 그림 앞에서 눈물을 흘렸을까?

중앙일보 2018.09.02 17:28
이영지,'두근두근 쿵쿵쿵'(장지 위에 분채,140*90cm). 들꽃과 풀의 섬세한 묘사가 돋보인다.[사진 선화랑]

이영지,'두근두근 쿵쿵쿵'(장지 위에 분채,140*90cm). 들꽃과 풀의 섬세한 묘사가 돋보인다.[사진 선화랑]

 
처음엔 모른다. 그저 파란 하늘 아래 나뭇잎이 풍성한 나무들이 서 있는 낭만적 풍경으로만 보인다. 흐드러지게 꽃이 핀 들판, 그 가운데 한가로이 노니는 하얀 새들이 언뜻 단순해 보인다. 그런데 그림 앞으로 한 발짝 다가가면 얘기가 달라진다. 마치 점묘법처럼 붓끝으로 한 점 한 점 찍어 완성한 무수한 이파리, 바늘보다 더 가늘게 화폭을 스친 숱한 붓질로 완성한 들꽃과 풀들이 보인다. 작가의 섬세한 손길은 풍경 속 미풍의 부드러운 촉감까지 살려냈다. 서울 인사동 선화랑에서 열고 있는 한국화가 이영지(43)의 개인전 '네가 행복하니 내가 행복해'전이다.  

선화랑, 한국화가 이영지 개인전
장지에 분채로 표현한 '소확행' 감성

 
이영지,'니네 다 티나' (장지 위에 분채, 72.7*60.6cm). [사진 선화랑]

이영지,'니네 다 티나' (장지 위에 분채, 72.7*60.6cm). [사진 선화랑]

 
 이번 전시에서 작가의 감각이 돋보이는 것은 가느다란 먹선으로 그린 쌀알 크기의 잎에 초록색 물감을 일일이 입힌 기법 때문만은 아니다. 화폭에 스며 있는 '소확행'(작지만 확실한 행복)시대의 감성과 열망이 무엇보다 내 얘기처럼 다가와 마음을 움직인다. '간절히 원하면' '행복한 일은 매일 있어' 등 작가가 공들여 지었다는 작품 제목들은 그림 속 풍경과 하나가 되어 정겨운 이야기로 다가온다.  
 
이영지, '많이 많이 더' (장지 위에 분채, 60*60cm). [사진 선화랑]

이영지, '많이 많이 더' (장지 위에 분채, 60*60cm). [사진 선화랑]

 "무의식중에 한 점으로 시작한 것이 어느새 눈 떠 보니 풍성한 한 그루의 나무가 되어 있었어요. 점이 선이 되고, 그게 다시 면이 되고 또 공간이 되고, 그렇게 완성된 것이 나무였죠. 이런 과정이 모든 사람이 살아가는 모습과 닮은 것 같아요." 전시장에서 만난 작가가 들려준 이야기다.  
 
미세한 터치로 나무와 풀과 꽃, 새를 하나씩 완성하며 작가가 집요하게 매달린 화두가 '행복'이었다. 그런데 그의 그림은 뜻밖의 얘기까지 전해준다. 공중에 떠다니는 듯한 앙상한 줄기의 나무는 작가의 외롭고 불안했던 시간을 말해주는 것 같고, 들판에서 소소한 일상을 즐기는 새들은 '함께 하는 시간'에 대한 작가의 간절한 소망을 대변해주는 것 같다.  
 
 몇 년 전 전시에서 한 여성 관람객이 이 작가의 작품 앞에서 "먼저 저 세상으로 보낸 아들이 생각났다"며 눈물을 훔쳤다는 이야기가 과장으로 들리지 않는다. 이 관람객은 결국 그림을 구매했고, 날마다 그림을 보며 위안을 받고 있다는 소식을 작가에게 전해왔다고 한다.  20대 초반에 불의의 사고로 부모님을 여읜 작가가 마음에 꾹꾹 눌러 담았던 그리움이 그에게 전해졌던 것일까. 
 
'수고했어, 오늘도'라는 작품에서 책에 기대어 쉬고 있는 새를 바라보고 있는 두 마리의 새는 마치 작가가 그리워하는 부모님을 형상화한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이영지, '수고했어, 오늘도' (장지 위에 분채, 162*130.3cm). 장지 위에 먹을 입히고 마른 붓질을 하는 반복작업으로 살려낸 배경은 오래된 회벽처럼 보인다. [사진 선화랑]

이영지, '수고했어, 오늘도' (장지 위에 분채, 162*130.3cm). 장지 위에 먹을 입히고 마른 붓질을 하는 반복작업으로 살려낸 배경은 오래된 회벽처럼 보인다. [사진 선화랑]

 성신여대에서 동양화를 전공한 이 작가는 장지에 분채로 그림을 그린다. 나무 그림을 그려온 지도 벌써 10년 째다. 처음엔 화폭 안에 나무만 있었다. 그러다가 하얀 새들이 하나, 둘 등장하기 시작했다. 나무가 수종을 알아볼 수 없게 그려져 있듯이, 새 또한 사실적 묘사와는 거리가 멀다. 가족 같거나, 연인 같고, 아니면 친구 사이 같은 새들은 함께 과일을 수확하고, 악기를 연주하고, 어디서든 느긋한 시간을 함께 만끽하는 모습이다. 
 
혹자는 이 새들이 이영지 작가의 그림에서 자칫 군더더기처럼 보인다고 지적한다. 주제가 확실히 전해지는 반면, 동화적인 감성이 오히려 이 작가만의 완성도 높은 화법의 균형을 떨어뜨린다는 시각도 있다. 그러나 원혜경 선화랑 대표는 "우리의 모습을 의인화한 이 새들은 정적인 화면에 역동성을 더해주고, 관람객과 감정을 나누게 하는 핵심 요소"라고 설명한다.  
 
이영지,'봄봄봄이 와요'(장지 위에 분채,60*170cm). [사진 선화랑]

이영지,'봄봄봄이 와요'(장지 위에 분채,60*170cm). [사진 선화랑]

  "디테일한 세부 묘사만큼 밑 색을 앉히는 데 많은 시간을 들인다"는 작가는 "오래된 회벽 느낌을 살리기 위해 장지에 먹을 입히고 마른 붓질을 하고 색을 입히는 과정을 반복한다"고 했다. 이 작가는 "전에는 제 그림이 누군가를 위로해줄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지금 생각하니 그게 오만이었다"며 "그림을 그리며 치유를 받는 것은 저 자신이다. 그림을 통해 소소한 일상에 감사하는 마음을 나누고 싶다"고 말했다. 전시는 8일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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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은주 기자 julee@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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