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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을 때 "여한이 없다" 말할 수 있기를

중앙일보 2018.09.02 07:01
[더,오래] 송미옥의 살다보면(42)
『만화 토지』는 만화가 가지고 있는 특유의 맛과 스타일로 원작 토지에 새로운 생명을 불어넣었으며 시각적인 재미와 흥미뿐만 아니라 원작의 감동까지도 섬세하게 담아내었다. [출처 yes24]

『만화 토지』는 만화가 가지고 있는 특유의 맛과 스타일로 원작 토지에 새로운 생명을 불어넣었으며 시각적인 재미와 흥미뿐만 아니라 원작의 감동까지도 섬세하게 담아내었다. [출처 yes24]

 
도서관에 비치된 책을 정리하다가 『토지』 책이 만화로 나온 걸 알았다. 매우 잘 그려져서 소설보다 감동이 배가 된다. 토지는 젊은 시절 매스컴의 힘으로 따라 읽기는 했으나 후반에 가서는 등장인물이 너무 많아 대충 읽은 기억이 있다. 지난주 근무하는 동안 틈틈이 ‘청소년과 성인을 위한 만화 토지’를 다시 읽었다. 만화를 그리는 사람들에게 다시 한번 감사드린다.
 
역사와 사회문제의 이야기는 그냥 술술 넘어가고 주인공 중에서 이전엔 사랑 못 받는 강청댁이 불쌍해서 등장인물과 아픈 마음을 나눴다. 30대, 40대, 50대를 거치면서 내 마음속의 주인공 친구가 자꾸 바뀌었다. 이번에 만화를 보면서는 용이와 월선의 사랑에서 가슴이 먹먹해지는 감동을 받았다. 월선의 죽음을 앞두고 용이가 먼 길을 찾아온다.
 

용이가 월선을 품에 안고 묻는다.
"여한이 있나……·"
월선이 대답한다.
"없습니더……."
용이의 품에서 월선은 눈을 감는다!!!

 
이 대목에서 왜 그리 울컥 눈물이 나던지…. 나도 나이가 들었나 보다.
 
소설 속의 두 사람은 힘들고 어렵고 고통스러운 시절을 겪고 겪으며 세월을 함께 한다. “여한이 없다”는 건 그것이 어떤 상황이었든 매 순간 치열하게 부딪히고 끌어안고 살면서 후회 없이 살았다는 표현일 것이다. 또한 삶에 미련이 없이 죽음을 맞이할 수 있다는 뜻이기도 할 것이다.
 
박경리 작가의 대하소설 '토지'. 1969년에서 1994년까지 26년 동안 집필되었으며 그 크기만 해도 200자 원고자 4만여 장에 이르는 방대한 분량이다. [중앙포토]

박경리 작가의 대하소설 '토지'. 1969년에서 1994년까지 26년 동안 집필되었으며 그 크기만 해도 200자 원고자 4만여 장에 이르는 방대한 분량이다. [중앙포토]

 
이 이야기를 하면서 딸에게 “나도 지금 여한이 없다”고 하니 30대인 딸아이가 반기를 든다. 자기가 도서관에 자원봉사하러 갔을 때 도서를 대여해 가신 80대 할아버지가 계시는데 책 제목이 『도전하는 용기』 『인생에 승부를 걸어라』라는 두 권의 책이었단다.
 
“엄마. 내가 생각하기엔 80대면 인생을 다 사신 것 같은 연세거든. 그 연세에도 승부를 걸만한 것이 무엇이 있을까? 생각하니 마음이 짠했어. 그러나 사는 동안은 인생에 승부를 걸고 희망을 이야기하는 게 맞는 거지. ‘여한이 없다’고 말하기엔 너무 빨리 인생을 포기하는 말 같아서 나는 듣기 안 좋은데”라고 했다.
 
내방 한쪽 벽에는 “내일은 없다”라는 글귀가 붙어있다. 누군가가 무기력에 빠졌나? 우울하나? 라고 물을 때도 있을 만큼 이상한 문장 같기도 하지만 언젠가부터 나는 꿈과 희망을 가지고 새로운 만족을 위해 계속 시간을 쫓기보다는 오늘을 ‘오로지 감사함’으로 바꾸기로 했다.
 
오늘 하루를 적당하게 일하고 적당하게 벌고 주위를 둘러보며 봉사하면서 그렇게 보내는 것이다. 그것은 인생을 포기하는 게 아니라 나이 들어서는 관조하는 인생으로 살았으면 하는 나의 바람이다.
 
‘잠에서 깨었을 때 아무 고통이 없다면 죽은 줄 알라’는 러시아 속담처럼 살아 있다면 눈을 뜨는 순간부터 보이는 모든 것과 양보하고 타협하며 하루하루를 감사함으로 살아간다면 후회와 아쉬움은 없을 것이다.
 
그리고 지금 이 순간 삶의 마지막 날이 되었을 때 소설 속의 주인공처럼 ‘여한이 없다’는 말을 할 수 있도록 남은 인생에 승부를 걸어야겠다.
 
송미옥 작은도서관 관리실장 sesu323@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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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미옥 송미옥 작은도서관 관리실장 필진

[송미옥의 살다보면] 요양보호사 일을 하다 평범한 할머니로 지낸다. 지식은 책이나 그것을 갖춘 이에게서 배우는 것이지만, 인생살이 지혜를 배우는 건 누구든 상관없다는 지론을 편다. 경험에서 터득한 인생을 함께 나누고자 가슴 가득한 사랑·한·기쁨·즐거움·슬픔의 감정을 풀어내는 이야기를 쓴다. 과거는 억만금을 줘도 바꿀 수 없지만, 미래는 바꿀 수 있다는 말처럼 이웃과 함께 남은 인생을 멋지게 꾸며 살아보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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