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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수대] 교사 상피제

중앙일보 2018.08.31 00:07 종합 31면 지면보기
김남중 논설위원

김남중 논설위원

세종이 신하에게 물었다. 집현전에 ‘옛 사례’ 조사를 명해 놓고서다. “옛 법을 고찰해 보니 인사행정을 맡은 자의 자손은 관직을 제수받지 못하게 돼 있다. 내가 이 법을 세우고자 하니 어떠한가.” 『세종실록』에 보인다. 문벌 귀족의 기세에 눌려 유명무실했던 고려의 상피제(相避制)를 세종이 정비하고 법제화하는 장면이다. 『경국대전』에 수록된 조선 상피제의 요체는 두 가지다. ‘혈연의식 제어’와 ‘사적관계에 의한 부정행위 차단’이다. 이는 관리의 배치뿐 아니라 선발 단계인 ‘과거시험’에서도 구현됐다.
 
과거시험 규정은 이렇다. “시험장은 2~3개소를 둔다. 시관(試官)과 상피에 해당하는 응시자는 다른 시험장에서 응시해야 하고, 아버지가 응시하면 아들은 피한다.” 혈연관계에서 발생하는 부정을 ‘원천봉쇄’하기 위함이다. 이런 조선시대 상피제는 엄격한 공정성을 바탕으로 민주주의의 한 단면을 보여주었다는 평가도 따른다(『 역사로 보는 민주주의』, 전덕재·김문식).
 
상피제가 난데없이 21세기 고교에 소환돼 교육계가 연일 시끄럽다. 발단은 최근 불거진 고교 교무부장의 ‘쌍둥이 자녀 전교 1등’ 사건이다. 시험지 유출 의혹이 청와대 국민청원 게시판에까지 번진데 놀란 교육부가 응급처방을 내놓은 것이다. 내년 3월부터 교사 부모와 자녀가 한 고교에 다니지 못하게 하는 게 골자다. 부정의 소지를 ‘원천봉쇄’하겠다는 의도다.
 
그런데 부정 원천봉쇄라는 같은 취지에도 현대판 상피제를 보는 시선은 사뭇 다르다. 민주주의는커녕 ‘선택권 제한’ ‘불신 사회 조장’ 등을 이유로 항의와 비난이 거세다. 무엇보다 자녀가 가고 싶은 학교에 부모가 근무한다고 못 가게 하는 것은 헌법이 보장한 개인의 선택권을 침해하는 행위란 거다. 현재 자녀와 같은 학교에 다니는 교사는 560개(23.7%) 고교에서 1005명, 그 자녀는 1050명이다. 이들 대다수를 강제로 떼어놓겠다는 것이니 당사자로선 기가 막힐 노릇이다. 교사를 잠재적 범죄인으로 몬다는 이유에서도 교사들은 불쾌한 기색이다. 현 정권과 코드가 맞는 진보 성향 교육감들조차 예외가 아니다. 김승환 전북교육감의 상피제 반대 메시지는 격렬하다. “우리 사회는 여전히 불신 사회, 불신 공화국이다.”
 
조선시대 상피제를 현재의 학교에 도입한다는 발상은 애초부터 무리다. 김 교육감 말마따나 공정성이란 이상만 좇고 현실은 외면한 교육부의 ‘날림공사’가 자초한 결과다. 실효성이 의심되는 상피제를 고집하다 교각살우의 우를 범하지 않을까 걱정이다.
 
김남중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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