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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영기의 퍼스펙티브] 블록체인 신대륙에 암호화폐 깃발을 꽂아라

중앙일보 2018.08.30 00:02 종합 30면 지면보기
일자리·먹거리 폭발시킬 알라딘의 요술 램프
www 이후 가장 혁신적인 발명품
암호화폐 빠진 블록체인은 무의미
말이 없으면 마차는 굴러가지 않아
  
암호화폐 신기술 명줄 쥔 문 대통령
오늘 청와대 담판 준비하는 원희룡
“제주, 암호화폐 특구 지정해 달라
2차 인터넷 혁명에서 승자되겠다”
 
29일 오후 싱가포르 플러턴베이 호텔에서 L재단이 블록체인 국제 콘퍼런스를 열었다. 이상윤(왼쪽)·김근영 L재단 공동창업자 가운데는 아랍에미리트 국왕의 전 비서실 차장인 투자자 칼판. [전영기 기자]

29일 오후 싱가포르 플러턴베이 호텔에서 L재단이 블록체인 국제 콘퍼런스를 열었다. 이상윤(왼쪽)·김근영 L재단 공동창업자 가운데는 아랍에미리트 국왕의 전 비서실 차장인 투자자 칼판. [전영기 기자]

암호화폐를 향한 현대판 골드러시 

 
“2008년 사토시 나카모토라는 익명의 인물이 비트코인이라는 새로운 화폐를 창안했다. 이 화폐는 1993년 월드와이드웹(www) 이후 가장 혁신적인 인터넷 발명품이라는 블록체인 기술로 개발됐다. 나카모토는 2009년 ‘오픈 소스 비트코인 클라이언트 프로그램’을 설치해 최초의 블록을 만들어 50비트코인을 채굴했다. 비트코인 최초의 실물 거래는 2010년 어떤 프로그래머가 피자 두 판에 1만 비트코인을 지불하면서 시작됐다. 2011년 위키리크스, 전자프론티어재단 등이 비트코인으로 기부를 받았다. 상품 및 서비스의 대가로 비트코인을 받는 곳이 점점 늘어났다. 원시시대 물물교환처럼 정부가 발행한 화폐를 통하지 않고 비트코인을 매개로 개인들이 직거래하는 시대가 열린 것이다. 은행이나 카드 회사를 통하지 않았으니 수수료도 없고, 실명도 노출되지 않았다. 누구나 컴퓨터에 비트코인 클라이언트 프로그램을 설치하면 비트코인을 채굴할 수 있다고 하니 많은 사람이 뛰어들었다. 암호화폐를 향한 현대판 골드러시가 시작된 것이다.”(이태억 KAIST 교육원장 언론 기고문에서 발췌)
 
‘블록체인 기반 암호화폐(Block-chain based crypto-currency)’의 발명은 신대륙의 발견과 같다. 신대륙에 건너온 이민자들은 계급장을 떼고 기득권을 포기했다. 그들이 한 번도 보지 못했던 광활한 영토와 환상적인 자원, 만인의 만인에 대한 평등한 인간관계에서 구대륙의 권력과 자본, 가치관은 통하지 않았다. 10년 전 등장한 블록체인 암호화폐의 세계에서 우리는 신대륙 새 질서의 기운을 느낀다.
 
암호성+평등성+보상성=진보적
 
블록체인 암호화폐 신대륙의 3대 특성은 암호성·평등성·보상성이다. 이곳에서 중앙 권력이 독점 장악하던 암호 원장(原帳)은 폐기된다. 모두가 평등하게 원장을 나눠 갖는다. 어떤 참여자가 암호성을 강화하는 기술 발굴에 성공하면 암호화폐를 보상으로 받는다. 암호화폐가 말이라면 블록체인은 마차와 같다. 말이 없으면 마차를 굴릴 수 없는 법. 보상성이 없으면 암호성·평등성도 늘어나지 않는다. ‘보상성↔암호성↔평등성’은 서로 꼬리를 물고 ‘블록체인 암호화폐’라는 시스템에 생명력을 불어넣는 삼위일체다. 한 가지만 빠져도 역동성은 사라진다. 지금 한국 정부와 집권 민주당엔 “암호화폐는 버리고 블록체인 기술만 활용하자”는 편의적인 생각이 퍼져 있는데 보상성 없는 블록체인은 한낱 소모품일 뿐이다.
 
2018년 5월 현재 세계 암호화폐 시장에서 실제 거래되는 돈의 규모는 3000억 달러(330조원)로 추정된다.(7월 25일, 국회 정무위 전상수 수석전문위원 ‘가상화폐업에 관한 특별법안, 암호통화 거래에 관한 법률안 검토보고’에서) 2008년 탄생한 지 10년 만에 도달한 수치다. 암호화폐에 내재한 기술적 진보성(암호성+평등성+보상성)이 무서운 속도로 세계 통화시장에 합류하고 있다.
 
신기술·산업발전은 정치의 문제
 
[그래픽=김영옥 기자 yesok@joongang.co.kr]

[그래픽=김영옥 기자 yesok@joongang.co.kr]

싱가포르, 어떻게 앉아서 돈 버나
블록체인 콘퍼런스 연 한국 기업
국내서 거둘 세금 딴 나라에 내는 셈
“정부의 정책 변화 기다리고 있어”
 
진보 기술 억압하는 정부와 민주당
오히려 한국당이 전진적 입법 추진
“2030년 글로벌 시장 규모 3400조”
 
문재인 대통령은 마차 시대에 자동차라는 발명품이 등장하자 차의 속도를 제한하는 ‘붉은 깃발법’을 입법한 나라와 아무런 제한을 두지 않은 나라 사이에 산업 경쟁력 격차가 벌어졌다고 지적했다. 신기술과 산업 발전은 결국 정치의 문제로 적극적으로 길을 터줘야 한다는 얘기였다. 맞는 말이다. 그런데 문 대통령의 정부는 정반대로 행동하고 있다. 법무부(박상기 장관)는 지난해 10월부터 ‘암호화폐 상장 공개(ICO·Initial Coin Offering)’를 불법 행위로 금지하고 암호화폐 거래소를 마약 밀매장이나 투기 환전장이라도 되는 양 “폐쇄 입장”을 줄기차게 외쳐댔다. 금융위원회(최종구 위원장)는 암호화폐의 본원적 가치와 현실에서 통용되는 교환 가치에 눈을 감은 채 자금세탁방지법이나 유사수신금지법상 감시와 처벌 대상으로만 취급하고 있다.
 
그나마 입법부에 ‘암호통화 거래에 관한 법률안(정병국 의원)’ ‘가상화폐에 관한 특별법안(정태옥 의원, 이상 자유한국당)’ 논의가 정무위원회에서 진행되고 있어 다행이다. 정무위의 전상수 수석전문위원에 따르면 암호화폐는 ▶현재 법 체계상 자본시장법이 규율하는 금융 투자 상품이 아니어서 시세 조종, 부정 거래, 미공개 주요 정보 이용 등 불공정 거래를 규제할 근거가 없고 ▶전자상거래법상 통신판매업으로 분류돼 이용자들이 충분한 보호를 받지 못하고 있으며 ▶관련 기술을 발전시켜 4차산업혁명을 촉진하고 창업과 벤처기업을 육성할 수 있다. 규제 근거를 만들기 위해서든, 이용자의 법적 보호를 강화하기 위해서든, 기술 진보의 문을 열기 위해서든, 암호화폐에 관한 독자 법률이 빨리 마련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중국은 전면 금지, 한국은 강한 규제
 
암호화폐의 진보성에 글로벌 국가들이 대처하는 방식도 다양하다. 가장 수구적인 ‘전면 금지(중국·인도)’부터 ‘강한 규제(한국·미국·러시아)’ ‘약한 규제(일본)’ ‘적극 허용(스위스·싱가포르·영국·독일)’ 등이 있다. 금융과 야경과 국제회의의 도시 싱가포르를 보자. 29일 저녁 플러톤베이 호텔에선 4시간에 걸쳐 ‘월드서밋 싱가포르’라는 블록체인 컨퍼런스가 있었다. 블록체인 플랫폼의 역사는 1세대 비트코인(사토시 나카모토가 개발), 2세대 이더리움(비탈릭 부테린)을 거쳐 3세대 경쟁 각축기에 접어들었는데 플랫폼 참여자가 많아질수록 병목 현상 때문에 작업 속도가 느려지는 것이 골치 아픈 문제가 되었다.
 
이 문제를 기술적으로 해결하는 데 사업 역량을 집중한 L재단이 세계 투자자들을 상대로 그동안 사업 성과를 설명하는 자리였다. L재단의 플랫폼 기술은 한국의 게임 개발자 출신인 이상윤 공동창업자가 개발하고 있다. 정작 중요한 비즈니스는 서울이 아닌 싱가포르에서 일어나고 있었다. 재단의 본부도 한국이 아니라 싱가포르에 뒀다. 재단에서 투자·마케팅을 담당하는 김근영 공동창업자는 “그동안 런던·도쿄·두바이·지브롤터와 콩고·모리셔스 등 유럽·중동의 유관 기관과 아프리카의 자원 부국을 상대로 투자 및 구매 계약을 체결했다. 여기서 발생할 수익의 17%를 재단 본부가 있는 싱가포르 정부에 세금으로 내야 한다”라고 밝혔다. 암호화폐를 배척하는 기업 환경만 아니었다면 그 세금은 한국 정부가 거둘 수 있었던 돈이다. 김근영 공동창업자는 “한국에서 사업 진행은 정부의 정책 변화에 달렸다”고 말했다. 실제 세계 100위권에 들어있는 한국 토종의 암호화폐 회사들이 정부의 압박을 견디다 못해 외국으로 탈출하는 일은 더는 뉴스가 아니다.
 
대통령 허락 없이 한 발짝도 못 나가
 
블록체인 플랫폼 산업의 운명 줄은 문재인 대통령이 쥐고 있다. 그가 생존을 허락하지 않으면 한 발짝도 나아갈 수 없다. 그런 점에서 30일 청와대에서 있을 17개 시도지사 간담회가 주목된다. 시도지사들에겐 각 3분의 스피치 시간이 주어진다고 한다. 블록체인 신대륙에 암호화폐의 깃발을 꽂는 대담한 항해는 원희룡 제주지사가 앞장선다. 원 지사는 대통령을 어떻게 설득할지 밤잠을 설치며 고민해 왔다. 원희룡은 블록체인 기술만 허용하고 암호화폐는 불허하는 중앙정부의 완고함과 싸우기보다 특별법에 따라 국제자유도시인 제주도에서만이라도 블록체인 암호화폐 산업을 허용해달라고 호소할 작정이다.
 
2030년까지 글로벌 블록체인 관련 시장이 3조1000억 달러(3400조원)로 성장할 것으로 예상하고(글로벌 시장조사 기관인 가트너가 2017년 5월 발표), 한국의 암호화폐 회사들이 당국의 억압과 냉담 속에서도 세계의 블록체인 생태계를 주도하는 리딩 그룹에 속해 있다는 게 원희룡의 도전 근거다. 그는 암호화폐 신기술이 먹거리와 일자리를 폭발시키는 알라딘의 요술 램프가 될 수 있다고 믿는다.
 
“1990년대부터 본격화된 1차 인터넷 혁명기의 최종 승자는 네트워크 생태계의 플랫폼을 구축한 구글과 애플이다. 2010년대 시작된 2차 인터넷 혁명기의 승자는 아직 없다. 모든 국가가 같은 출발선에 있다. 한국이 블록체인 암호화폐 생태계의 게임 체인저, 룰 메이커가 될 수 있다. 관건은 젊은 기업들이 플랫폼 기술의 선도자가 되게 할 것이냐, 다른 나라가 개발한 기술의 조립업자가 되게 할 것이냐를 정치가 결정한다는 점이다.”
 
몰타·모리셔스같은 실험지대 필요
 
원희룡은 일단 제주가 싱가포르나 스위스의 주크, 몰타나 모리셔스같은 암호화폐의 실험지대가 되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제주를 테스트베드로 설정해 성공하면 암호화폐 자유화를 한국 전역에 확장하고, 시원치 않으면 섬 지역에서 리스크를 흡수하겠다는 얘기다. 해볼 만 하지 않은가. 소득 3만 달러를 겨우 넘겨 놓고 어설픈 선진국병에 걸린 한국이 다시 바라볼만한 희망의 등불 아닌가. 원희룡의 제안은 문 대통령의 업무 지시로 중앙정부의 암호화폐 억압 정책을 제주에는 적용하지 않도록 하는 방식으로 실현될 수 있다. 혹은 제주특별자치법을 개정해 암호화폐 실험을 법적으로 보호하는 방법도 가능할 것이다.
 
산업화 시대의 ‘패스트 팔로워(fast follower)’였던 한국이 정보화 시대의 ‘퍼스트 무버(first mover)’가 될 찬스가 열렸다. 1차 인터넷 혁명에서 놓쳤던 퍼스트 무버의 지위를 2차 혁명기 때는 반드시 잡아채야 한다. 블록체인의 신대륙에 암호화폐의 깃발을 꽂아야 할 시점이다. 문재인 대통령이 사회적 약자를 위한 정의의 정부일 뿐 아니라 국민 전체를 부자 되게 하는 혁신의 정부임을 증명해 주었으면 한다.
 
전영기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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