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쉰 살에 은퇴해 '낭만 공장' 짓겠다는 젊은 예술가들의 대부

중앙선데이 2018.08.25 02:00 598호 24면 지면보기
아티스트 기획사 아트피버 주기윤 대표
아티스트 마리킴의 작업실에서 만난 주기윤 대표. 마리킴은 주 대표가 만든 아티스트 기획사 ‘아트피버’에서 발굴·육성한 아티스트다.

아티스트 마리킴의 작업실에서 만난 주기윤 대표. 마리킴은 주 대표가 만든 아티스트 기획사 ‘아트피버’에서 발굴·육성한 아티스트다.

19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 개막식 때였다. 상병 주기윤은 성화대 점화 현장을 내무반 TV로 보고 있었다. 당시 패럴림픽 양궁선수인 안토니오 레볼로가 휠체어에 앉아 불붙은 화살을 쐈다. 불화살이 밤하늘에 포물선을 그리며 날아가 멀리 있는 성화대를 명중하는 순간(연출 장면으로, 실제 화살은 빗나갔다), 내무반은 열광의 도가니가 됐다. 그리고 그 불화살은 상병 주기윤의 가슴팍에도 제대로 꽂혔다. 처음으로 알게 된 ‘이벤트’가 인생 목표가 된 순간이었다.  

 
주 상병은 이벤트 마케팅 회사 리더스 컴의 대표가 되어 패션쇼를 비롯한 각종 행사 무대를 주관하는 이력을 쌓기 시작했다. 동시에 마케팅의 무대를 예술계로 옮겨 무명 작가들을 키우는 일에도 나섰다. 아티스트 기획사이자 아트 콜라보레이션 브랜드이기도 한 ‘아트피버(ART FEVER)’를 만든 지 올해로 10년째다. 그간의 기록을 담은 책 『아트피버: 누구나 아티스트가 될 수 있다』를 출간한 주기윤(47) 대표를 20일 만났다.  
 
인터뷰 장소는 서울 논현동에 있는 아티스트 마리킴의 작업실이었다. 그녀의 트레이드마크인 왕눈이 소녀 캐릭터 ‘아이돌(Eyedoll)’의 그림과 이젤ㆍ물감ㆍ만화책이 곳곳에 놓인 그곳에서 주 대표는 회의를 주재하고 있었다. 지난 2월 론칭한 마리킴의 브랜드 ‘마리마리(MARIMARI)’의 홍보 전략 회의였다. 일러스트 작가에서 세계 경매 시장에서 수천만 원 대에 그림이 거래되는 파인 아트 작가로 자리매김한 마리킴은 자신의 아트 브랜드를 앞세워 패션ㆍ뷰티ㆍ리빙 업계까지 진출하고 있다. 그런 마리킴의 옆에는 무명시절부터 지금까지 주 대표가 있었다.  
 
주기윤 대표와 마리킴

주기윤 대표와 마리킴

“호주에서 유학을 하다가 일러스트 작가가 되고 싶어 2007년 귀국했을 때 당시 롤모델이 일러스트레이터 ‘밥장’이었어요. 주 대표님이 발굴해 키웠다고 해서 나도 밥장 오빠처럼 책도 내고 잘 되고 싶다며 찾아갔어요. 욕심만 많았던 제게 어느날 주 대표님이 ‘마리킴 너는 입으로 그림 그리니’라고 말씀하셔서 충격 받았어요. 그때부터 자유분방한 아티스트 스타일을 벗어던지고, 직장인처럼 ‘아트피버’ 사무실로 출근해 출근도장 찍듯 그림 그리기 시작했어요. 작가로서 중요한 시기에 정신 교육을 제대로 받았습니다. 성실하게 노력해야 한다고요.”(마리킴)  
 
홈쇼핑에서 판매한 아트 가방

홈쇼핑에서 판매한 아트 가방

10년 전 주 대표가 결성한 아티스트 그룹 ‘아트피버’는 예술가라면 한량 같은 자유인으로 여기던 예술계에서 이상하게 결이 다른 ‘범생이 집단’이었다. 주 대표는 “누구나 아티스트가 될 수 있다”며 전 국민의 아티스트화를 외치면서, 대신 “엉덩이 무겁게 그림 그려야 한다”는 것을 강조했다. 작가 스스로 SNS 홍보를 하게끔 독려하기도 했다. 마리킴도 자신의 블로그에 매일 그림을 올리며 수백 장의 그림을 온라인에서 볼 수 있게 했다. 대중적인 인지도를 착실히 쌓아갔고, 갤러리에서 먼저 연락이 왔다. 작가 스스로 브랜드가 되어 자신의 채널을 통해 대중과 바로 소통해야 한다는 주 대표의 마케팅 전략은 주효했다.  
 
예술가도 발품 팔아 홍보해야 성공한다
‘휴먼 브랜드’ 전략이라고 했다.  
“옛날 방식대로라면 작품이 잘 되면 작가가 알려진다. 그런데 그 과정이 너무 오래 걸린다. 인터넷 시대에서는 누구나 쉽게 자기를 알릴 수 있다고 생각했다. 작품보다도 인간 자체를 브랜딩하고 알리면 작품은 자연히 따라온다고 생각했다.”  
 
아티스트의 작품을 그려 넣은 오토바이 헬멧

아티스트의 작품을 그려 넣은 오토바이 헬멧

이벤트ㆍ마케팅 회사 대표에서 갑자기 아티스트 양성에 나선 까닭은
“군 제대 후 작은 이벤트 회사에 취업했다. 열심히 해서 인정받으니 더 큰 마케팅 회사로 스카우트됐다. 1997년 외환위기 때 아예 마케팅 회사 ‘리더스 컴’을 창업했다. 어려울 때니까 망해도 욕먹지 않겠다고 생각해서 직원 세 명과 함께 옥탑방에서 출발했다. 잘 풀려서 직원은 60명으로 불어났지만 한ㆍ일 월드컵 무렵 딜레마가 왔다.”
 
당시 가장 호황기가 아니었나.  
“마케팅에 성공했어도 제품이나 브랜드 자체가 실패하면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다는 데서 스트레스가 왔다. 돈은 잘 벌었지만 의미를 찾지 못해 술만 마셨다. 그러던 어느 날 홍대 극동방송국 앞을 지나다가 담벼락에 쓰인 글귀를 봤다. ‘그림도 돈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겠다’고 빨간색 물감으로 쓴 글이었다. 왜 저런 글을 썼을까 싶어 작가들을 만나다 그 배고픈 세계를 알게 됐고, 무명 작가들을 마케팅해 ‘예술로도 돈 버는 것 보여주자’며 뛰어들었다. 내 보람 찾자고 시작한 일이었다.”  
 
아티스트 그룹 ‘아트피버’는 어떻게 결성했나.  
“일러스트레이터 밥장을 만나 그를 마케팅했고, 첫 책 ‘비정규 아티스트의 홀로그림’을 출간하면서 점점 유명해지기 시작했다. 밥장의 성공사례를 본 작가들이 나를 찾아 왔다. 포트폴리오가 쏟아졌고, 자연히 그룹이 만들어졌다.”  
밥장의 그림을 그려넣은 컨버스 운동화

밥장의 그림을 그려넣은 컨버스 운동화

 
작가와 작품 보는 안목이 있어야 육성할 수 있는 것 아닌가.  
“나는 대단한 심미안이나 철학을 갖고 있지 않다. 내가 작가를 선택한 가장 큰 기준이 대중성이었다. 지금은 궁궐에서 예술가를 찾던 시대가 아니라, 대중 예술의 시대 아닌가. 대중이 주인공이니 그들이 좋아할 만한 그림을 골랐다. 몽환적인데 예쁜 인형을 그리는 마리킴의 그림, 꼬불꼬불 귀엽게 그리는 밥장의 펜화에 담긴 남성성에서 이야기를 발굴했다.”  
 
“인생 2막으로 ‘러브 팩토리’의 사장 되겠다”
‘아트피버’에서 발굴·육성한 남영인 작가의 세라믹 아트

‘아트피버’에서 발굴·육성한 남영인 작가의 세라믹 아트

주 대표는 아트피버에 소속됐던 20여명의 작가들과 보통의 연예 기획사처럼 계약을 맺지 않았다. 그는 “아티스트가 그림을 판 수익을 나누지 않고, ‘아트피버’라는 브랜드 안에서 새로운 파생상품을 만들어서 그 수익을 나눴다”고 설명했다. 아트 콜라보레이션 상품이었다. 주 대표는 아트피버에 소속된 작가들의 그림이 그려진 티셔츠와 가방을 홈쇼핑에서 팔았다. 아트를 입은 티셔츠, 하나밖에 없는 제품이라는 컨셉트는 트렌드가 됐다. 가방의 경우 연 40억 가량의 매출을 올리기도 했다. “누구나 아티스트가 될 수 있고, 돈 벌 수 있다”는 것을 10년간 보여줬고, 교육 차원에서 책도 출간했지만 정작 그는 “쉰 살에 은퇴하는 게 목표”라고 말했다.  
 
아트 상품으로 만든 핸드폰 케이스

아트 상품으로 만든 핸드폰 케이스

은퇴까지 3년 남았다.  
“쉰 살까지 마케터로서 한 길을 살아왔으니 그 이후부터 다른 삶을 살고 싶다. 내가 하고 싶은 것을 하려 한다. 모텔을 짓고 싶다.”  
 
웬 모텔인가.  
“옛날에 전남 장흥의 유명한 모텔 사장을 만났는데, 그의 피부가 너무 좋아 비결을 물었다. 그가 말하길, 사연이 어떻든 모텔에서는 사랑만 나누고 가니 그 엔도르핀과 에너지를 받아 행복하다고 하더라. 감복했다. 하하하. 틈날 때마다 지방에 부지를 샀다. ‘낭만 공장’이자 ‘로맨스 팩토리’를 만들 계획이다.”
 
은퇴가 아니라, 오십 이후 전국 방랑을 할 모양이다.  
“작가 알랭 드 보통이 ‘리빙 아키텍처’를 설립해 유명 건축가가 지은 집에서 일반인이 숙박할 수 있게 한 것과 비슷하다. 좋은 공간을 만들어 사람들이 체험하게 하고 싶다. 제주의 경우 2020년부터 공사를 시작할 예정이다. 부산ㆍ강릉 등 전국 열 곳 정도에 ‘사랑 공장’을 만들 계획이다. 작가들과 협업해서 방을 꾸밀까도 싶고, 자꾸 엉뚱한 생각이 샘솟고 있다.”  
 
주 대표를 만나고 돌아서는 길, 그의 열정에 데인 기분이 들었다. 바르셀로나 올림픽 때 상병 주기윤의 가슴팍에 꽂힌 불화살은 여전히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글 한은화 기자 onhwa@joongang.co.kr  사진 신인섭 기자·아트피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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