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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새색시는 어떻게 늙은 남편의 수호천사가 됐나

중앙선데이 2018.08.25 02:00 598호 14면 지면보기
석영중의 맵핑 도스토옙스키 <31> 유럽: 삼십육계
안나 도스토옙스카야는 남편과의 진실된 정신적 교감을 바탕으로 완벽한 내조를 했다.

안나 도스토옙스카야는 남편과의 진실된 정신적 교감을 바탕으로 완벽한 내조를 했다.

 
도스토옙스키 부부는 1867년 4월 14일, 아직 신혼의 단꿈이 깨기도 전에 국경을 넘어 유럽으로 향했다. 견문을 넓히기 위해서, 혹은 지루한 일상에 자극을 주기 위해서 그런 것은 아니다. 해외 체류는 부인의 뜻에 따른 것으로 그럴만한 사정이 있었다.  
 
도스토옙스키와 안나의 극적인 만남과 결혼은 25회 원고에서 소상하게 밝혔다. 가정생활에 목마른 가난뱅이 중년 작가와 착하고 건실한 젊은 아가씨의 결혼에 독자들은 흐뭇한 미소와 진심 어린 축복을 보냈다. 그러나 결혼은 현실이며 현실에는 중산층 가정에서 곱게 자란 스물한 살 신부를 울리는 ‘복병’들이 곳곳에 숨어있었다.  
 
군식구들 뒷처리에 질린 새신부
“불쾌하고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 시작되면서 결혼 생활의 첫 몇 주일이 망가졌다.”  
 
문우들의 방문은 부인도 반겼지만, 날마다 떼지어 몰려오는 이른바 ‘군식구’들은 버거웠다. 도스토옙스키의 동생들, 조카들, 죽은 형 미하일의 가족이 시도 때도 없이 찾아와 점심은 물론 저녁까지 먹고 밤늦도록 눌어붙어 있다가 갔다. 그들을 대접하고 응대하는 것은 고스란히 부인의 몫이었다.  
 
죽은 형 미하일의 부인과 아이들은 도스토옙스키의 부양을 이미 오래전부터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있었다. 사치를 모르는 작가가 늘 돈에 쪼들린 데에는 그들의 기여도 무시할 수 없다. 형수는 미하일 생전에 누렸던 생활수준을 그대로 유지하고 싶어 했고, 자식들이 장성해 제 앞가림을 할 수 있게 되어서도 도스토옙스키에게 당당하게 돈을 요구했다. 도스토옙스키는 한 때 가장 사랑했던 형에 대한 의리 때문에 그녀의 요구 사항을 거의 언제나 들어주었다.  
 
부인의 회고록에 따르면 형수는 격렬하게 도스토옙스키의 결혼에 반대했고 결혼 후에는 거의 매일 같이 찾아와 ‘시어머니 노릇’을 했다. “그녀는 언제나 표도르 미하일로비치가 있는 자리에서 나를 가르치려고 했다. 그가 보는 앞에서 내 살림 솜씨가 엉망이며 내가 게으르다는 것을 집요하게 내보였기 때문에 나는 기분이 좋을 수가 없었다.”  
 
그러나 그 누구보다 안나를 괴롭힌 것은 한 집에 같이 사는 의붓아들 파벨 이사예프(1847~1900)였다. 도스토옙스키는 첫사랑인 전처에게 한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 파벨의 교육에 시간과 돈을 아끼지 않았다. 아이는 의붓아버지가 넣어준 페테르부르크 중학교에서 심한 장난 때문에 퇴학당했다. 아버지가 차선책으로 고용한 가정교사는 얼마 지나지 않아 화를 내며 나가버렸다.  
 
도스토옙스키는 파벨과 떨어져 있을 때는 정기적으로 편지를 쓰고 반드시 돈을 부쳐주었으며 지인들에게 그를 보살펴 달라고 부탁했다. 그가 성인이 되자 백방으로 뛰어다니며 일자리를 알선해주었다. 하지만 그는 얼마 못 가서 그만 두었다. “상사의 모욕을 견딜 수 없다”는 게 이유였다. 도스토옙스키는 그러한 그의 됨됨이를 다 알면서도 교육적인 훈계를 넘어서는 비난이나 심판은 하지 않았고, 눈을 감는 순간까지 물심양면으로 도와주었다.  
 
베니스 총독궁(팔라초 두칼레) ’남편은 그곳의 놀라운 건축물을 보며 경탄했다. 15세기의 뛰어난 화가들이 그린 총독궁 천장화의 숨막히는 아름다움에도 경탄했다.“ 안나 부인의 회고록 중

베니스 총독궁(팔라초 두칼레) ’남편은 그곳의 놀라운 건축물을 보며 경탄했다. 15세기의 뛰어난 화가들이 그린 총독궁 천장화의 숨막히는 아름다움에도 경탄했다.“ 안나 부인의 회고록 중

 
유명 작가인 의붓아버지를 내세워 안하무인으로 지내던 파벨은 동년배인 젊은 부인의 등장에 분노했다. 그는 사사건건 불화를 일으켰고 눈엣가시인 ‘새엄마’를 내쫓으려고 야비한 음모를 꾸미기도 했다. 도스토옙스키 앞에서는 그녀에게 싹싹하게 굴다가 단둘이 있을 때면 잔인하고 무례한 인신공격을 했다. 아버지가 번 돈을 헤프게 쓴다며 몰아붙였고, 그녀 때문에 아버지의 간질이 심해졌다는 근거 없는 비난을 퍼부었다. “누가 이 집안의 진짜 주인인지”겨뤄보자며 협박까지 했다. 이 모든 세부사항은 어디까지나 부인의 회고록에 따른 것이지만 대부분의 객관적인 전기도 파벨에 관해서는 비슷한 얘기를 한다.    
 
“해외에서 보낸 둘만의 4년은 인생의 황금기였다”
베니스 산마르코 광장 ’4일 동안 우리는 산마르코 광장을 벗어나지 못했다. 그 만큼 그 광장은 아침은 아침대로, 저녁은 또 저녁대로 매혹적인 느낌을 불러일으켰던 것이다.“ 안나 부인의 회고록 중

베니스 산마르코 광장 ’4일 동안 우리는 산마르코 광장을 벗어나지 못했다. 그 만큼 그 광장은 아침은 아침대로, 저녁은 또 저녁대로 매혹적인 느낌을 불러일으켰던 것이다.“ 안나 부인의 회고록 중

 
안나 부인은 몇 주일 간 상황을 지켜본 뒤 ‘삼십육계’를 결정했다. “우리의 사랑을 구원하기 위해서는 두 세달만이라도 사람들로부터 떨어져 있는 게 상책이라고 생각했다.”  
 
도스토옙스키는 후속 소설의 선불로 받은 돈 대부분을 ‘군식구’들에게 향후 생활비로 나누어주었다. 부인은 혼수로 가져온 물건들, “피아노와 멋진 작은 탁자들과 수납장, 모든 예쁜 물건들”을 저당 잡혀 당장 필요한 여행 경비를 확보했다. 만족을 모르는 군식구들은 자기네 ‘돈줄’이 젊은 부인과 줄행랑을 치는 걸 바라보며 발을 동동 굴렀다.  
 
 
부부는 처음에는 한 서너 달 바람이나 쐬고 오리라고 생각했지만, 여러 변수가 생기는 바람에 1871년 7월까지 4년 3개월 동안 스위스·독일·이탈리아의 수많은 도시를 떠돌아다니며 살았다. 도스토옙스키는 드레스덴의 미술관과 이탈리아 곳곳에 있는 성당과 궁전을 좋아했다. 특히 밀라노 대성당, 피렌체 대성당, 피티 궁전, 베니스의 산마르코 대성당과 총독궁(팔라초 두칼레)은 그를 매료시켰다. 도스토옙스키는 젊은 부인에게 고양된 어조로 고색이 창연한 건축물의 아름다움을 설명해주었다. 도스토옙스키 전기의 길고도 흥미진진한 새 챕터가 시작된 것이다.
  
밀라노 대성당(두오모) ’이 성당의 구조는 그에게 언제나 깊은 감탄의 대상이었다. 어느 맑은 날에는 주변 경관을 감상하고 성당을 둘러싼 조각상들을 더 잘 보기 위해 성당 꼭대기까지 올라갔다.“ 안나 부인의 회고록 중

밀라노 대성당(두오모) ’이 성당의 구조는 그에게 언제나 깊은 감탄의 대상이었다. 어느 맑은 날에는 주변 경관을 감상하고 성당을 둘러싼 조각상들을 더 잘 보기 위해 성당 꼭대기까지 올라갔다.“ 안나 부인의 회고록 중

 
스트라호프는 “표도르 미하일로비치가 해외에서 보낸 4년이란 시간은 그의 인생의 황금기였다”고 확신했다. 늘 돈에 쪼들리며 싼 셋집을 찾아 이곳저곳 집시처럼 방랑하는 삶, 도박 중독과 간질발작, 그리고 그 밖에도 크고 작은 슬픔들로 얼룩진 세월이 황금기라니 조금 과장이 아닌가 싶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이 시간이 대문호의 삶과 작품에서 또 하나의 분수령이 된 것만큼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일단 『죄와 벌』로 전국적인 지명도를 얻은 도스토옙스키는 해외에서 후속 대작인 『백치』와 『악령』을 완성하여 돌아올 무렵에는 대문호로서의 입지를 완전히 굳혔다. “스스로 택한 해외 유형 생활”은 그에게 독서와 “내면으로 침잠해 들어갈 수 있는” 시간을 주었다. 그는 해외에 거주하는 러시아 망명객들과는 별로 사이가 좋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너무 궁핍해서 ‘사교계’에 끼어들 여유도 없었다. 오로지 서로에게만 의지하는 가운데 가난한 부부 사이에는 형언하기 어려운 모종의 깊고도 진실한 정신적 관계가 무르익어 갔다. 그의 생각은 깊어졌고 마음은 안정을 찾았다. “태도도 완전히 달라져서 아주 부드러워졌고 가끔은 그야말로 온화하기까지 했다.”  
 
남편의 도박중독을 고친 부인의 비결은 
비스바덴 러시아 정교회 성당 도스토옙스키는 1865년 비스바덴에서 도박으로 전 재산을 다 잃었을 때 이 성당의 야니셰프 신부한테서 물심양면으로 도움을 받았다. 1871년에는 유대교 회당을 러시아 정교 성당으로 착각한 것을 계기로 도박에서 벗어났다.

비스바덴 러시아 정교회 성당 도스토옙스키는 1865년 비스바덴에서 도박으로 전 재산을 다 잃었을 때 이 성당의 야니셰프 신부한테서 물심양면으로 도움을 받았다. 1871년에는 유대교 회당을 러시아 정교 성당으로 착각한 것을 계기로 도박에서 벗어났다.

 
또 한 가지, 그는 해외에서 마침내 도박과 연을 끊었다. 드레스덴에 거주할 당시 글이 안 써져 괴로워하는 남편에게 부인은 ‘피 같은 생활비’를 쥐여주며 비스바덴 도박장에 다녀오라고 했다. 그는 비스바덴에서 순식간에 가진 돈을 다 잃고 부인에게 편지를 썼다(1871년 4월 28일). “거의 10년 동안이나 나를 괴롭혀온 이 혐오스러운 환상이 사라졌소. 이제 모든 게 끝났소!”  
 
전기 작가들은 그가 도박에서 탈출하게 된 구체적인 계기 두 가지를 언급한다. 하나는 꿈 속에 등장한 아버지다. 아버지가 꿈에 나타날 경우 항상 불행한 사건이 일어났으므로 그는 무서워서 도박을 끊기로 결심했다.  
 
다른 한 가지는 교회와 관련된다. 돈을 다 잃고 절망의 구렁텅이에 빠진 그는 사제에게 의탁하기 위해 한밤중에 비스바덴 러시아 정교회를 찾아갔다. 막 들어가려는 찰나 자세히 보니 그건 러시아 정교회가 아니라 유대교 회당이었다. 신의 철퇴를 맞는 기분이었다. “찬물을 확 뒤집어 쓴 것 같았소.” 바로 이 순간 그는 도박이라는 지옥에서 벗어났다고 회고한다.  
 
그러나 그의 도박 중독을 진짜로 치유해 준 것은 부인의 인내였다. 그녀는 단 한 번도 잔소리를 하거나 화를 내지 않았다. 결혼반지, 브로치, 외투와 숄까지 저당 잡혀가며 그에게 도박 자금을 쥐여주었다. 아주 가끔 돈을 땄을 때 함박웃음을 지으며 꽃과 과일과 자질구레한 장신구를 사서 집으로 달려와 부인에게 자랑하는 그 ‘순진무구함’에 부인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돈을 다 잃고 돌아와 자책하는 모습은 또 너무 불쌍해서 역시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부인은 그에게 설탕이나 커피를 사오라고 심부름을 시키거나 데리고 나가 함께 산책을 하면서 그의 절망을 달래주었다. 그는 부인한테 너무나 미안하고 부끄러워서 제풀에 도박장에서 걸어 나왔다.  
 
도스토옙스키가 부드럽게 변했다면 부인은 단호하게 변했다. 짧은 시간 동안 ‘산전수전’ 다 겪은 그녀는 남편을 지켜주는 현명하고 강인한 수호 천사로 변모했다. 그녀가 귀국했을 때 친구들은 4년 동안 “너무 늙은” 그녀의 외모에 깜짝 놀랐다. 실제로 부인은 이 시간 동안 비약적으로 성숙했다. 어리고 미숙한 ‘새색시’는 한 가정의 어엿한 주부이자 어머니이자 대문호의 든든한 반려자가 되어 돌아왔다. 그녀는 아무것도 겁날 게 없었다.  
 
안나 부인은 해외에서 보낸 세월을 오로지 감사하는 마음으로만 회상했다. “정말로 깊고 눈부신 기쁨의 감정”을 경험했다며 늘 감격스러워 했다. 모든 고통과 시련을 다 잊게 만들어준 것은 단 한 가지, 남편과의 ‘완전한 사랑’이었다. 그녀는 4년 여 동안 남편을 문자 그대로 독점했으며 남편의 ‘절대적인 사랑’을 ‘절대적으로 확신’할 수 있었다. 사실상 인생에서 가장 소중한 것을 거머쥔 것이다. “우리가 해외에서 보낸 그 멋진 몇 해, 놀랄 만큼 고귀한 성품을 지닌 사람과 거의 단둘이서 보낸 그 몇 해에 축복 있기를!”
 
고려대 노문과 교수. 『도스토예프스키, 돈을 위해 펜을 들다』『자유, 도스토예프스키에게 배운다』등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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