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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맥 적폐청산, 사익·파벌은 막고 공동체 유대는 살려야

중앙선데이 2018.08.25 01:00 598호 27면 지면보기
빠른 삶, 느린 생각
[일러스트 강일구 ilgook@hanmail.net]

[일러스트 강일구 ilgook@hanmail.net]

이번 정부의 대표적 정책 구호는 ‘적폐청산’인데, 인사 문제에 있어서의 여러 규정은 그 실천 방안의 하나이다. 그리하여 정부 부처 또는 다른 공공기구에서 사람을 채용하는 데에는 어디까지나 엄격한 객관적 원칙이 있어야 한다고 한다. 그러한 당위를 나타내는 말 하나가 요즘 흔히 보는 바 외래어와 한국어를 기이하게 접착한 ‘블라인드 채용’과 같은 말이다. 최근에 계속되는 대학 입시제도 개정도 그 테두리에 드는 목표를 가졌다고 할 수 있다. 공적으로 주어진 일에 적임자를 채용하고, 그 채용의 기준이 누가 보아도 공정한 것이어야 한다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요구이다.

객관적 원칙에 따르는 상호 관계는
‘만인의 전쟁’ 막는 보편 규칙 담아

동문, 평생 직장 같은 감정적 요소
사회를 하나로 묶는 중요한 역할
그런 요구 수용할 공간 아껴두길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종종 지켜지지 않은 것도 사실이다. 거기에 흔히 스며드는 것은, 여러 복합적인 인간관계 그리고 그에 연유한 부패이다. 이런 관계에 드는 것이 학연, 지연, 혈연, 인맥 등이다. 이 시점에서 언급하기가 미안한 말이기는 하지만, ‘우리가 남이가’하는 말은 이러한 인간관계를 중시하는 말이다. 우리에게도 알려진 중국어 표현에 ‘관시(關係)’라는 것이 있다. 그것은 사업이나 공적인 거래에서 신뢰가 쌓이게 된 관계, 그리고 인정(人情)을 주고받을 수 있는 관계를 말한다. 여기에서 출발하는 그러한 관계는 종종 부패한 상호관계를 지칭하기도 한다.
 
제대로 된 나라에서는 인맥에서 나오는 사적 이익 그리고 그에 근거한 파벌의 가능성이 철저하게 배제되어야 한다. 그렇기는 하나, 부패와 타락의 가능성에도 불구하고, 위에서 말한 바 사람과 사람의 여러 관계도 인간 본연의 성품에 근거하는 것이라는 것을 상기해보고자 한다. 일상적인 상황에서 사람과 사람이 서로 만나게 되는 것은 어떤 구체적인 계기를 통하여서이다. 거기에서 생겨나는 친소(親疎)의 감정이 사람들을 하나로 묶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 이렇게 형성되는 유대감은 파벌을 만드는 바탕이 되기도 하지만, 공동체의식의 출발이 되기도 한다.
 
이러한 접촉과 감정적 유대에 대조하여, 생각할 수 있는 것은 합리적인 상호 관계이다. 이 관계 속에서 사람들은 다 같이 자유롭고 동등한 권리와 의무를 갖는 개인이다. 그들은 일정한 협약을 통하여 그것을 규율하는 법 또는 국가 체제에 복종한다. 이 체제하에서 사람들의 심리에 작용하는 것은 합리성이다. 이 합리성이, 특히, 자본주의 사회에 있어서, 이해관계의 인정(認定) 그리고 그에 근거한 이해관계의 균형을 얻을 수 있게 한다. 그러한 사회는 대체로는 개인주의적 이해관계 속에 있지만, 일정한 협약과 법적 규제가 있어 사회는 만인전쟁(萬人戰爭)으로 떨어지는 것을 피할 수 있게 된다. 그러면서 거기에는 힘의 균형을 넘어 정신적이고 문화적인 자산의 뒷받침이 필요하다. 반성적 사고의 관점에서 보면, 이성은 삶과 사회와 세계의 원리이면서 인간의 내면 질서의 원리이다. 그리고 그것은 보편적 윤리 의식으로 이어진다.
 
그러나 참으로 만족할 만한 인간질서가 성립하기 위해서는 사회 속에 감정적 유대감도 유통되어야 한다. 또는, 이미 시사한 바와 같이, 이러한 유대감은 이성적인 이해에 선행한다고 할 수도 있다. 사실 인간관계에서만이 아니라, 다른 사람과 사회 그리고 세계에 대하여 사람이 갖는 가장 근원적인 태도는 감정에 의하여 매개된다고 할 수도 있다. 조선유교사에서 유명한 사단칠정(四端七情) 논쟁은 어떻게 사람의 감정이 이성과 윤리로 승화(昇華)될 수 있는가에 대한 논쟁이었다.
 
이렇게 볼 때, 감정과 이성이 하나의 조화원리가 되어 개체로서의 인간과 사회 집단의 일원으로서의 인간이 하나가 될 수 있게 하는 사회가 좋은 사회이다. 그러나 지나치게 사회 질서가 개인적인 감정 그리고 이해관계에 의하여 왜곡되고 부패하게 될 때, 사회질서의 합리적 원리가 강조되는 것은 불가피하다. 그것을 보충하여 지금까지의 여러 정부는 국가주의적 이데올로기 그리고 거기에서 도출되는 윤리적 강령을 부과해보고자 하였다. 이에 비슷하면서 조금 다르게, 이번의 정부는 인사정책이나 공무집행에 있어서, 공평하고 투명한 규범의 준수를 강조한다.
 
그것이 잘못되었다고 할 수는 없으나, 여기에서 하고자 하는 것은, 위에서 이미 말한 바와 같이, 사회적 조화에 감정적 요소가 있다는 것을 상기해보고자 한다. 다만 합리적 사회제도의 어디에 그 설 자리가 있는가는 알 수가 없다. 그것은 특히 자본주의 체제하에서 그렇다고 할 수 있다. 사회체제로서의 자본주의는 이해관계에 의하여 움직이는 개별적 계산 단위의 집약이다. 거기에서 유일한 질서는 공공 규범의 존중에서 나온다. 다만 그러한 체제에도 다른 종류의 인간관계의 흔적들, 인맥으로 연결되는 공동체적 의식의 관계들이 남아 있게 마련이다. 그리고 그것이 체제를 인간화하는 데 도움을 줄 수도 있다. (그러나 정부는 인간적인 균형은 오로지 정부 권력의 소관사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
 
최근 기업가뿐만 아니라 근로자 사이에서도 대를 물리는 취업이 주장된다는 보도들이 있었는데, 정부는 이에 대하여 날카로운 부정적인 눈을 돌리는 것으로 보인다. 오래전에 한 미국의 노동자로부터 들은 이야기다. 디트로이트의 포드 자동차 회사에 근무하는 한 노동자는 2대에 걸쳐 같은 직장에서 일하면서, 미시간 호수 가에 별장까지 지니게 되었다고 했다. 조금 다른 각도에서 일본의 기업들은 필요에 따라 고용을 조종하는 대신 피고용자로 하여금 한 기업에 계속 머물게 하는 종신고용제로 유명했다. 이러한 일들이 보장하는 개인이나 가족의 연속성은, 그것대로 문제를 가진 것이기는 하지만, 생활의 안정을 기약하면서, 유대감이나 충성심을 확보하는 데 도움을 줄 것으로 생각된다. 필자가 근무하던 고려대학교에서는 80년대까지 입학 전형에 있어서 사무직원들을 포함하여 고대 재직자의 자녀들에게는 일정한 가산점을 주어 입학을 용이하게 하였다. ‘고대가족’이라는 말이 자주 쓰였는데, 이 말은 가족적인 유대감을 가질 수 있게 하는 학교 체제를 표현하는, 내실이 없지 않은 말이었다.
 
서구어에 ‘콤뮌(commune)’이라는 말이 있다. 이것은 19세기 중반 이후, 사회혁명과 더불어 인간의 삶의 집단적 성격을 강조하는 공동체를 말하는 말로 쓰였다. 그러나 그것은 반드시 정치적 관점에서 말하는 것이 아니라도, 그 라틴어 어원으로  짐작할 수 있듯이, 예로부터 한 고장에서 노동과 생활을 함께하는 공동체를 의미하는 말이었다. 위에 말한 여러 경우들은 정치적인 의미에서의 ‘콤뮌’의 이념에 자극된 것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보다 자연스러운 집단적 삶의 현실에 대한 느낌과 실천의 모습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근년에 와서 미국의 하버드대학은 아시아계 지원자에게 불공평한 입학 기준을 적용한다는 것으로 하여 소송의 대상이 되었다. 아직 소송이 끝나지 않았음으로, 무엇이 사실인가는 확실히 알 수가 없지만, 단순한 추측으로는, 흔히 이야기 되듯이, 아시아계 학생들이 특히 우수한 성적을 가진 지원자가 많음으로 하여, 유달리 엄격한 자격 기준을 적용받게 된 결과라고 한다. 학교의 의도는 입학생의 인종적 균형을 유지하려는 것으로 추측된다. 미국의 법 규정으로 보아 이것을 내세울 수는 없는 일이겠지만, 이러한 의도는 이해할 수는 있는 일이 아닌가 한다. 대학은 사회 공동체의 일부이고 그것을 적절하게 대표하는 구성원을 가져야 한다고 할 수 있다.
 
여기에서 공동체는 지금에 와서는 미국 사회 전체를 말한다고 할 수 있지만, 대학의 역사로 보아, 하버드대학은 출발 시점에서 식민지시대의 주정부의 허가를 받고, 교회들의 지원을 받아, 목사 양성을 목적으로 건립된 대학이다. 하버드대가 대표하는 공동체는 이 모든 역사적 사실도 포용하는 것일 것이다. 하버드대학은 창설자나 졸업생의 자녀들에게 입학의 우선권을 준다. 이것도 좁은 의미에서의 공동체로서의 자기 인식을 나타낸다고 할 수 있다.
 
이러나저러나 서구에서 대학은 역사적으로 대학의 교원과 학생들의 공동체 그리고 학술 공동체로 성립하였다. 오늘에 와서도 대학이 이러한 공동체적 전통을 가지고 있는 것은 이해할 만한 일이라 할 것이다. 지금에 와서 하버드를 비롯하여 명문이라고 할 수 있는 대학들이 하나의 보편적 기준 또는 서열의 기준에 맞아들어 가야 하는 것은 대학들이 출세를 위한 자격증서의 출고지로 간주되게 된 데에 관계된다고 할 수 있다. 그리하여 다분히 학생들의 공동체, 학술 공동체 그리고 지역의 정신 문화의 공동체로서의 성격을 잃어버리게 된 것이다.
 
이러한 사정은 한국에서도 마찬가지라고 할 수 있다. 일반인들의 관점에서 대학은 학술 공동체로서의 성격을 잃어버리고 자격증 발행처가 되었다. 독자적인 공동체가 아니라 만인에게 유용한 자격증 또는 상표의 발행자가 된 것이다.
 
말할 것도 없이 여기에서 이러한 이야기를 하는 것은 사회 체제가 거대한 통일체가 됨으로써, 자연스럽고 구체적인 집단성, 집단적 유대감, 공동체 의식이 들어설 자리가 없게 되었다는 것을 상기하자는 것이다. 서양문학의 이론에 낭만적인 사랑은 사회 기구의 거대화의 한 결과라는 것이 있다. 획일적일 수밖에 없는 보편 규칙이 지배하는 큰 사회로부터 마음의 진실에 충실할 수 있는 내면의 공간이 필요했던 것이다. 가족, 그중에도 소가족이 중요해지는 것도 사회의 거대 구조로부터의 피난처가 필요한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대체로 말하여, 사회 전체를 하나로 묶는 체제 이외에 그보다 작은 구체적인 공동체에 대한 요구도 없어질 수는 없는 것이 아닌가 한다. 거대한 규칙의 사회 안에라도, 그것이 보편적 이성과 윤리에 모순되지 않는 한 그러한 요구를 수용할 수 있는 공간들을 아껴둔다면, 그것은 보다 인간적인 사회를 잊지 않는 일이 될 것이다.
 
김우창 고려대 명예교수
고려대 명예교수. 서울대에서 영문학을 공부한 뒤 미국 하버드대에서 미국문명사 박사학위를 받았다. 1977년 첫 저서 『궁핍한 시대의 시인』 이후 『지상의 척도』 『심미적 이성의 탐구』 『자유와 인간적인 삶』 『기이한 생각의 바다에서』 등을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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