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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일수교 다섯 번째 기회 … 과거 청산 vs 납치, 이번엔 풀릴까

중앙선데이 2018.08.25 01:00 598호 29면 지면보기
오영환의 외교노트
2002년 9월 17일 평양을 방문한 고이즈미 준이치로 일본 총리(왼쪽)가 김정일 국방위원장(오른쪽)과 북·일 평양선언에 서명한 뒤 악수를 나누고 있다. 김정일은 당시 일본인 납치가 특수기관 소행이라고 밝히면서 사과를 표명했다. 이후 수교 교섭은 북한 핵, 납치 문제로 중단됐다. [중앙포토]

2002년 9월 17일 평양을 방문한 고이즈미 준이치로 일본 총리(왼쪽)가 김정일 국방위원장(오른쪽)과 북·일 평양선언에 서명한 뒤 악수를 나누고 있다. 김정일은 당시 일본인 납치가 특수기관 소행이라고 밝히면서 사과를 표명했다. 이후 수교 교섭은 북한 핵, 납치 문제로 중단됐다. [중앙포토]

전후 일본 외교의 양대 숙제는 북방 영토(쿠릴열도 4개 섬) 반환과 북·일 국교정상화다. 북·일 수교는 두 개의 청산을 뜻한다. 과거사와 적대 관계다. 양자 간엔 네 번의 기회가 있었다. 처음은 1956년 일·소(러시아) 국교 회복 때다. 미·소 평화 공존 시기였다. 두 번째는 1972년 중·일 국교정상화의 데탕트 때다. 그러나 두 시기 모두 집권 자민당과 국민적 관심이 높지 않았다. 세 번째는 1990년 자민당 실력자 가네마루 신(金丸信) 부총재와 다나베 마코토(田邊誠) 사회당 부위원장의 방북이다. 가네마루·다나베는 김일성 주석과의 3당(노동당, 자민·사회당) 선언을 통해 수교 교섭의 길을 열었다. 그러나 북한의 핵 개발, 일본인 납치 의혹으로 교섭은 중단됐다. 마지막은 2002년 고이즈미 준이치로(小泉純一郞) 총리 방북이다. 당시 김정일과의 평양선언은 북한 핵·미사일·납치 문제의 포괄적 해결을 통한 국교정상화와 일본의 경제 협력을 담았다. 획기적 문서다. 그러나 이후 수교 교섭은 2차 핵위기와 납치 문제로 파국을 맞았다. 90년, 2002년엔 핵 비확산을 내세운 미국의 대일 견제가 만만찮았다.

납치 화두로 보수 아이콘 된 아베
교섭 창구 만들고 정보라인 활용
협상 출구 어떻게 찾을지 주목

북한은 일본 경협 규모에 초점
2002년 100억 달러 이상 요구
현재 가치로는 200억 달러 넘어

 
 
북·일, 다양한 외교 채널로 응수타진
 
김일성 주석(가운데)이 1990년 방북한 가네마루 신 자민당 부총재(왼쪽), 다나베 마코토 사회당 부위 원장과 노동당, 자민·사회당의 3당 선언을 한 뒤 악수하는 모습. [중앙포토]

김일성 주석(가운데)이 1990년 방북한 가네마루 신 자민당 부총재(왼쪽), 다나베 마코토 사회당 부위 원장과 노동당, 자민·사회당의 3당 선언을 한 뒤 악수하는 모습. [중앙포토]

북·일 관계는 올해 새로운 전기를 맞고 있다. 남북, 북·중, 북·미 정상회담이 이어지면서다. 아베 신조(安倍晋三) 일본 총리로선 대북 압박 노선의 일정 부분 수정이 불가피해졌다. 대북 철벽 공조를 자랑하던 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이 대화로 돌아섰다. 북·중 정상은 세 번이나 만났다. 북한 비핵화, 한반도 평화체제 프로세스에 관여하려면 대북 채널을 터놓아야 할 판이다. 북한도 중장기적으로 일본의 협력이 긴요하다. 일본은 확실한 자금줄이다. 경제의 중국 종속 현상도 완화해준다. 북·일이 교섭의 전초전에 들어간 것은 우연이 아니다.
 
지난 3일 싱가포르에서 열린 아세안지역안보포럼(ARF) 외무장관 회의 환영 만찬장. 고노 다로(河野太郞) 일본 외상이 이용호 북한 외무상과 접촉했다. “북·일 간에 대화할 용의가 있다. 납치문제 해결로 연결되는 것이 극히 중요하다.” 고노는 평양선언을 바탕으로 한 일본 입장을 전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이용호는 “일본이 먼저 해야 할 과제는 과거 청산”이라고 답했다. 대화를 거부하지도, 납치 문제를 언급하지도 않았다. 서서 이뤄진 대화는 2분 만에 끝났다. 응수타진이었다. 사흘 후인 6일 오전 히로시마(廣島)시. 아베 총리는 기자회견에서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과의 정상회담에 의욕을 보였다. 북·일 외상 면담을 언급한 뒤 “최종적으로는 나 자신이 김 위원장과 마주 보고 대화해 핵·미사일, 납치 문제를 해결하고 새로운 북·일 관계를 구축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아베는 4·27 남북 정상회담을 전후로 북·일 정상회담 개최 뜻을 밝혀왔다. 6월엔 몽골 국제회의에서 북·일 당국 간 접촉도 이뤄졌다. 일본 정부는 이를 이례적으로 공개했다.
 
아베가 정보기관을 활용하고 있다는 얘기도 나온다. 총리 직속의 내각 정보조사실을 통한 대북 접촉이다. 이 기관 수장인 기타무라 시게루(北村滋) 내각 정보관은 경찰청 출신으로 아베의 최측근이다. 2006~2007년 아베 1차 내각 때 비서관이었고, 2012년 말 2차 내각 이래 현직을 지키고 있다. 한해 아베를 가장 많이 만나는 인사이기도 하다. 정찰총국장 출신인 김영철 노동당 부위원장이 대남, 대미 관계의 전면에 나서고 있는 점을 고려한 것으로 보인다. 일본 정부는 외무성 조직도 개편했다. 7월 1일부로 한반도 전체를 담당해온 아시아대양주국 북동아과를 둘로 나눴다. 1과는 한국을, 2과는 북한을 다룬다. 북한 전담과 신설은 향후 대북 교섭을 대비한 포석이자 대북 외교를 본격화겠다는 메시지다.
 
 
납치 문제 집착하면 접점 찾기 힘들어
 
일본인 납치 피해자 요코타 메구미의 어머니 사키에씨가 2006년 4월 미 의회 청문회에서 딸의 구출을 호소하고 있다. [중앙포토]

일본인 납치 피해자 요코타 메구미의 어머니 사키에씨가 2006년 4월 미 의회 청문회에서 딸의 구출을 호소하고 있다. [중앙포토]

아베는 남북, 북·미 정상회담도 놓치지 않았다. 한·미 정상에 납치 문제 해결을 전제로 한 북·일 국교정상화를 타진했다. 김정은은 원칙적 입장을 밝히고 있다. 문재인 대통령에게 “언제든 일본과 대화할 용의가 있다”고 했다. 북·일 정상회담을 권유한 트럼프엔 “알았다”고 답했다고 한다. 트럼프는 북·미 정상회담 후 아베에게 “김정은은 북·일 회담에 열려 있다”고 설명했다는 보도다. 북한도 4~6월 사이에 대일 교섭 조직을 신설했다고 한다. 지난 4월 노동당 전원회의가 “사회주의 경제건설 등을 위해 주변국들과 긴밀한 연계와 대화를 적극화해 나갈 것”이라고 결정한 것이 계기다. 조직의 수장은 김영철의 이름이 오르내리고 있다고 교도통신은 전했다. 반면 북한 관영 매체는 연일 일본을 때리고 있다. 아베가 정상회담에 의욕을 보인 6일 조선중앙통신은 논평에서 아베와 고노를 비판했다. 납치 문제에 대해선 “이미 다 해결됐다”며 과거 침략에 대한 반성과 사죄, 배상을 주장했다. 노동신문의 15일 논평도 같은 논조였다. 향후 협상에서 입지를 높이려는 심리전 성격이 짙다. 양쪽 모두 상대방의 손에 든 패를 훤히 읽고 있는 분위기다.
 
향후 북·일 교섭의 최대 쟁점은 납치 문제다. 일본 정부가 납치 피해자로 인정한 일본인은 17명이다. 이 중 5명은 2002년 고이즈미 총리 방북 직후 귀국했다. 남은 12명에 대해 북한은 8명은 사망했고, 4명은 북한에 입국하지 않았다는 입장이다. 고이즈미 방북으로 납치 문제가 종결됐다는 것이다. 반면 일본 정부는 납치 피해자 전원의 생환이 목표다. 북한과의 간극이 너무 큰 셈이다. 여기에 납치 문제 해결은 아베 총리의 어젠다다. 내각의 최우선 과제로 삼고 있다. 아베는 2002년 9월 관방부 장관으로 고이즈미의 방북을 수행했을 당시 내부 회의에서 김정일이 납치에 대해 사죄하지 않으면 평양선언에 서명하지 않고 돌아가야 한다고 했다. 김정일은 납치에 대해 사과했다. 그해 10월 일시 귀국한 납치 피해자 5명을 북으로 돌려보내지 않도록 주도한 것도 아베였다. 납치 문제는 아베가 우파 정치인의 아이콘으로 자리 잡는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 그는 지금도 납치 피해자 구출을 상징하는 ‘푸른 리본’ 배지를 양복의 깃에 달고 있다. 북·일 간 입장차로 납치 문제 해결에는 정치적 결단이 불가피하다. 하지만 리스크도 크다. 그새 피해자 구출 운동은 퍼졌고, ‘해결’의 기대치도 올라가 있다. 납치 문제는 일본 국내 정치 문제이기도 하다. 외교적 합의가 이뤄져도 피해자 가족·단체, 여론의 지지를 얻기가 쉽지 않다. 한·일 위안부 문제 협상과 닮은 구석이 없지 않다.
 
일본의 대북 경제협력 규모도 관심이다. 일본에선 1965년 한·일 국교정상화 당시 한국 국가 예산과 일본의 경협 규모를 잣대로 삼는 시각도 있다. 당시 경협 액수는 5억 달러(무상 3억 달러, 유상 2억 달러)로 한국 예산의 1.5배였다고 한다. 한국은행 집계 북한의 지난해 예산은 77억5000만 달러인 만큼 1.5배는 약 116억 달러다. 65년의 5억 달러(1800억엔)를 현재 가치로 환산하는 방식도 나온다. 일본 물가상승률을 감안하면 7380억엔(약 67억 달러)이다. 방식에 따라 적잖은 차이가 나는 셈이다. 북한은 2002년 평양선언 교섭 당시 강석주 외무성 제1부상이 요구 금액을 밝혔다. 액수는 100억 달러 이상이었다고 한다(『김정일 최후의 도박』, 후나바시 요이치). 이는 태영호 전 영국주재 북한 공사의 얘기와 일치한다. 태 공사는 저서에서 당시 강석주가 “최소 100억 달러는 들어올 것이다. 100억 달러면 조선의 도로와 철도 등 기본 하부구조는 다 현대화할 수 있다”고 말했다고 소개했다. 2002년의 100억 달러는 물가상승률 등을 반영하면 현재 가치가 200억 달러에 이른다는 추계도 있다.
 
 
동북아 역사 청산, 평화체제 디딤돌
 
향후 초점은 교섭 방식이다. 실무 협상을 통한 정상회담 개최와 국교정상화 교섭 속개다. 2002년 평양선언 때가 그랬다. 당시 실무협상은 1년 이상 걸렸다. 여기에 일본이 납치 문제 해결을 정상회담의 전제로 삼는 ‘입구론’을 견지하면 회담은 더 더뎌질 수 있다. 시바야마 마사히코(柴山昌彦) 자민당 총재 특보는 “대화와 압력, 행동 대 행동이 일본의 기본 입장이다. 북한이 눈에 보이는 형태로 납치·핵·미사일 문제에 대한 태도 변화를 보이는 행동을 하면, 우리도 행동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북이 대화를 희망해오면 우리도 실무 레벨에서 고위 레벨 대화로 갈 수 있다”고 설명했다. 일본 내에선 6·12 북·미 정상회담 모델을 참조할 필요가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정상회담을 문제 해결의 첫걸음으로 삼는 방식이다. 이럴 경우 납치 문제는 후속 교섭에서 해결을 모색하게 된다. 이런 입장은 2002년 평양선언 교섭의 주역인 다나카 히토시(田中均) 당시 아시아대양주국장(일본총연 국제전략연구소 이사장)이 대표적이다.
 
아베 총리는 다음 달 20일 자민당 총재선거(임기 3년)를 앞두고 있다. 현재로선 3선은 떼어 놓은 당상이다. 2021년까지 집권의 길이 열린다. 임기 중 내·외정(內外政)에 통치 유산을 남길 수 있는 적기는 내년 여름의 참의원 선거 전까지로 보인다. 그 이후론 레임덕에 빠질 수 있다. 내각제 총리는 임기가 정해지는 순간 힘이 빠진다. 내정의 개헌은 아베가(家) 3대(代)의 숙원이고, 외정의 북·일 관계는 전후 일본의 외교 과제다. 북·일 수교는 양자 관계를 넘어 동북아 역사 청산과 평화체제 구축의 디딤돌이라는 역사적 의의도 갖는다. 두 사안은 변수도, 장애물도 많다. 아베가 전후 다섯 번째로 찾아온 북·일 수교의 기회를 어떻게 맞을지 주목된다.
 
납치 문제를 둘러싼 움직임
■  2002년 9월 17일 고이즈미 준이치로 일본 총리 방북. 김정일 국방위원장, 납치 인정하고 ‘5명 생존, 8명 사망’ 설명. 북·일 평양선언 서명
■  2002년 10월 15일 납치 피해자 5명 일본 귀국
■  2004년 5월 25일 고이즈미 총리 2차 방북. 납치 피해자 어린이 5명 일본 귀국. 북한이 납치문제 재조사 약속
■  2004년 7월 납치 피해자 가족 3명 일본 귀국
■  2014년 5월 26~28일 스웨던 스톡홀름에서 북·일 간 정부 교섭. 북한이 납치문제 재조사를 약속
■  2016년 2월 12일 북한이 납치문제 재조사의 전면 중지와 특별조사위원회 해체를 선언
■  2018년 6월 12일 북·미 간 사상 첫 정상회담. 트럼프 미 대통령이 납치 문제를 제기
 
오영환 군사안보연구소 부소장·논설위원 hwasa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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